태종무열왕 차남 김인문의 5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이 내물왕계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 경쟁을 포기하고 하슬라로 잠적하자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한 김경신은 이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하서주도독(河西州都督)과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임명해 그에게 지금의 강원도 통천(通川)부터 울진(蔚珍)에 이르는 동해 연안(沿岸)의 땅을 모두 다스리게 해 준 게 786년이었다. 반란 수괴 안록산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감히 당(唐) 황제를 욕보인 죄로 아들 혜공왕을 에밀레종에 넣어버린 경덕왕(景德王) 부부의 죄로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빛나는 태종무열왕의 후손(後孫)들은 높고 높은 산맥 동쪽 너머에서 갇혀 사는 신세가 되었다. 조부(祖父) 진지왕이 황음(荒淫)에 미쳐 날뛰다 왕위에서 쫓겨난 자(者)란 말도 안되는 불명예 딱지도 버티고 버텨 결국 그의 손자를 왕위에 올렸듯 참고 버티는 데에는 특장(特長)이 있는 김용춘(金龍春) 집안이었다. 김주원과 일족들이 아무 말 없이 영지(領地) 경영에 온 힘을 쏟는 동안 세상은 또다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향해 요동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당(唐) 현종이 믿고 총애했던 소그드 사람 안록산에게 배신당하고 능멸당하는 수모를 지켜본 그의 아들(숙종)과 손자(대종), 증손(덕종)이 소그드 상방(商幇) 압살 정책을 대(代)를 이어가며 시행하다 죽자 세상은 또다시 뒤집기를 시작했다. 805년 덕종의 아들(순종)은 즉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아들인 헌종(憲宗)에게 양위했는데 이는 756년부터 시행해 온 소그드 상방 죽이기 시대를 끝내고 그동안 반사 이익으로 너무 커져 버린 마린 로드 상방을 제어(制御)할 수 있도록 홀로 남은 진상방(晉商幇)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황실 안팎의 경고(警告) 때문이었다. 50년을 세 명의 황제가 대(代)를 이어온 정책을 뒤집기에는 순종(順宗)은 너무 허약했다. 젊은 아들을 내세우고 순종은 퇴위했다. 강력한 황권 회복과 중앙집권을 기치로 내건 헌종(憲宗)의 개혁 칼끝은 그동안 마린 로드 상방의 보호자 역할을 하며 번영을 구가한 제(齊)나라를 향했다. 제(齊)나라를 건국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당(唐) 대종으로부터 받은 첫 관직은 해상무역 관리책임을 맡은 해운육운신라발해양번등사(兩藩等使)였다. 이제 그의 증손자가 해상무역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이정기(李正己)의 손자에게 관직을 반납하고 해상 무역에서 손을 떼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원성왕이 된 김경신이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해 과거 아닌 과거제처럼 시행한 것도 경덕왕과 혜공왕때 중용된 관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 때문이었다. 천사옥대로 상징되는 차(茶)산업과 해상무역을 이토록 망쳐놓은 경덕왕(景德王)의 실정에 대한 단호한 평가였다. 805년 또하나의 급변침(急變針)을 준비하는 당(唐) 헌종이 즉위하기 6년 전에 죽은 그를 위해 그의 증손자가 조성(造成)한 능(陵)엔 전대(前代)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특이한 석조물이 설치되었다. 왼손에 검을 잡고 턱수염이 상대적으로 짧은 무인석(武人石)과 오른손에 검을 잡은 턱수염이 긴 무인석 두 개가 그것인데 이들은 파사(波斯)라고 쓰였던 페르시아인과 대식(大食)이라고 쓰였던 아랍인을 각각 본뜬 무인석들이었다. 태종무열왕계 문무왕처럼 용이 되어 내물왕계 왕권과 왕국을 지키고 싶어 했던 원성왕이었기에 연못이 있던 자리를 메워 능(陵)을 조성했는데 관(棺)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양쪽에 거는 장치를 달아 관(棺)을 걸었다고 해서 괘릉(掛陵)이라는 특이한 별명으로도 불리는 왕릉이었다. 이 무인석들은 원성왕(元聖王)이 재위할 당시 신라의 해상무역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느 곳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웅변해 주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원성왕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진짜 용도를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만파식적은 내물왕계 후손(後孫) 집안이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만파식적은 태종무열왕계인 신문왕(神文王)때 이미 세상을 떠난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도움으로 용(龍)으로부터 받은 신물(神物)이었다. 내물왕계가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내세워 천수왕권(天授王權)을 주장할 때 태종무열왕계가 지지 않고 내세우는 천수(天授)가 만파식적이었다. 그 만파식적을, 후일 명덕왕(明德王)으로 추존되는 자신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대대로 집안에서 전수(傳授)되어 오던 것을 자기에게 전(傳)해 주었다 자랑한 것이 원성왕이었다. 큰돈을 내서라도 만파식적을 보고 싶어 하는 왜왕(倭王) 사신들에게 끝내 보여주지 않고 더욱 깊이 숨겼다는 기록은 원성왕이 만파식적의 진짜 용도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일본 찻잎(茶葉)을 수입해 가공한 후 경주(慶州)에 상주(常住)해 있는 대식국(아랍)과 파사국(페르시아) 머천트(merchant)들에게 수출하며 번영을 주도하던 원성왕이 죽고 후사(後嗣)는 모두 죽은 원성왕의 세 아들들을 대신해 이미 장성한 혜충 태자의 큰아들이 잇게 되었다. 그러나 원성왕의 장손(長孫)인 소성왕은 왕이 된 지 1년도 안되어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성왕 원년(799년) 5월 기사엔 지금의 원주, 영월지역에 코끼리가 돌아다니는 소식을 싣고 있는데 이는 명주(溟州) 지역 해안(海岸)으로 들어온 일본 찻잎을 가공해 원주, 영월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차무역(茶貿易)이 코끼리를 이용해 배에 싣고 내리는 일을 해야 할 만큼 그 양(量)과 규모가 상당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었다. 우두주는 경덕왕때 삭주(朔州)로 개명된 주(지금의 영서지방)였다. (牛頭州都督遣使奏言, 有異獸若牛, 身長且髙, 尾長三尺許, 無毛長鼻. 自峴城川向烏食壤去. 삼국사기) 동모형(同母兄)인 소성왕이 죽자 후일(後日) 헌덕왕(憲德王)이 되는 김언승(金彦昇)과 흥덕왕(興德王)이 되는 김수종(金秀宗)은 합심하여 형의 어린 아들 애장왕을 보필했다. 13살에 즉위한 애장왕(哀莊王)이 18살이 되자 친정(親政)에 들어갔고 숙부(叔父)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해 805년 당(唐) 순종은 황위를 아들 헌종에게 양위했다. 헌종은 산동반도에 터잡은 제(齊)나라에게 큰 이익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 해상(海上)으로 차(茶)를 무역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안록산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부터 당(唐) 황실로부터 지원되어 온 차(茶)의 해상무역이 역적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당(唐) 황실에 반기를 들어온 제(齊)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도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유명한 간무(桓武) 천황이 806년 죽고 장남인 헤이제이(平城) 천황이 즉위해 있었는데 809년 당(唐)으로부터 퇴위(退位)하라는 통첩(通牒)을 받고 동생인 사가(嵯峨) 천황에게 양위했다. 신라에서는 제(齊)나라와 긴밀하게 지내온 책임을 지라는 통첩에 저항하려는 애장왕을 숙부들인 김승언과 김수종, 육촌형인 김제륭(金悌隆)이 죽였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항의하는 애장왕의 동생 김체명(金體明) 또한 형 애장왕과 함께 죽였다. 상황(上皇)으로 물러난 헤이제이(平城) 천황은 억울했고 아버지 간무(桓武)가 천도한 헤이안쿄(교토)에서 헤이조쿄(나라)로 재천도하며 정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군사행동에 나선 동생 사가(嵯峨) 천황의 무력에 굴복해야만 했다. 구스코의 변(變)으로 일본 역사에 기록된 810년의 정변(政變)은 809년 7월에 벌어졌던 경주에서의 국왕 시해(弑害)와 똑같은 이유에서 벌어진 피바람이었다. 당(唐) 헌종(憲宗)이 제(齊)나라와 이익을 나눈 것들을 없애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통천(通川)에서부터 울진에 이르는 명주의 동해 연안(沿岸)을 통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의 양(量)이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중요하게 되자 애장왕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을 시중(侍中)에 임명해 명주(溟州) 지역으로 들어오는 차(茶)들을 관리토록 했었다. 원주와 영월을 통해 집산된 명주(溟州)의 차(茶)들은 산동반도의 제(齊)나라로 보내지기 위해 한강 수로(水路)를 타고 김포반도 위에서 임진강과 합쳐지는 조강(祖江)으로 이동후 백령도에서 산동반도로 떠났다. 관리 능력을 인정 받은 김헌창은 섬진강으로 들어오는 일본 차(茶)들의 가공과 수출 업무까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당나라에서 헌종이 즉위하자 해상무역을 통해 제(齊)나라와 이익을 나눠 가진 자들에 대한 단죄가 벌어졌다. 신라에서는 애장왕이 일본에서는 이미 죽은 간무천황 대신 헤이제이(平城)천황이 책임을 져야 했다. 저항하려 한 애장왕은 죽어야 했고 구스코가 대신 죽은 헤이제이는 왕위에서 영원히 물러나야 했다. 평성의 아들 또한 황태자에서 쫒겨났다. 김헌창은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憲德王) 김승언 밑에서 차(茶) 무역과 관련된 지역(地域)의 도독(都督)들을 계속 돌아가며 역임(歷任)했다. 명주 지역의 해안으로 들어오는 일본 찻잎들은 꾸준했고 이 찻잎들을 이용해 만들어진 차(茶)들은 무진주(武珍州:전남) 와 청주(淸州:충북), 웅주(熊州:충남) 등을 통해 수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813년 무진주 도독으로 816년 청주 도독으로 821년 웅주 도독으로 김헌창이 임명된 기록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819년 2월, 4년이나 반란을 끌어 온 제(齊)나라 이정기(李正己)의 후손들이 처형되었다. 이사도와 그의 아들이 처형되면서 당 헌종의 역할도 끝이 났다. 토사구팽. 820년 2월 14일에 헌종은 환관 왕수징과 진홍지에게 시해되었다. 번진(藩鎭)들과 절도사들의 권한을 줄여 황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통제권을 넘어선 마린 로드 상방들과 그 동조 세력들을 제거하려는 당 헌종의 목표는 완성되었고 시대는 다시 그 와중에 너무 커버린 실크 로드 상방들과 그 동조세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목종(穆宗)이 당(唐) 황제로 즉위하면서 헌종(憲宗)이 강력히 시행하던 해상무역 규제가 없어지자 이를 가장 빨리 알아챈 것은 차(茶) 해상 무역이 활성화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명주(溟州)의 해상세력들이었다. 805년 당 헌종이 즉위하고 해상무역에 대한 당나라 정책이 변해갈 때 일본 간무(桓武)천황은 애장왕에게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을 바치며 당나라의 해상무역 정책이 바뀌더라도 일본과의 무역 관계를 변화시키지 말 것을 요청할 정도로 일본은 찻잎을 팔기 위해 언제나 신라가 필요했다. 그 일본이 당(唐) 헌종이 죽었다는 소식에 신라의 명주 해안에, 섬진강에 찻잎들을 잔뜩 실은 무역선을 보냈다. 웅주(熊州) 도독으로 있던 김헌창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당나라의 해상 무역에 대한 태도가 헌종이 죽은 이 시점에서는 종전과는 다르니 속히 차(茶) 중계무역을 재개해 일본에서 건너온 찻잎들을 수입해야 한다는 건의를 강력하게 경주에 보낸 것은 김헌창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명주에 뿌리 박은 집안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있어서나 자신이 맡고 있는 웅주의 경제를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재개되어야 할 해상무역이었다. 김헌창 웅주 도독의 일본 찻잎 수입 허가와 해상무역 정상화 및 확대 건의는 관련된 모든 지역의 그리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무진주(武珍州:전남), 완산주(完山州:전북), 청주(淸州), 사벌주(沙伐州), 국원경(國原京:충주), 서원경(西原京:남원), 금관경(金官京:김해)등은 웅주도독 김헌창의 건의에 모두 지지를 표시하며 조속한 확대를 거듭 요구하는 서한을 경주에 보냈다. 천사옥대와 만파식적의 교훈을 뼈에 새기며 경덕왕과 같은 섣부른 변침(變針)으로 왕권을 놓치는 우(愚)를 또다시 범하지 않으려는 내물왕계 헌덕왕은 그래서 일본 찻잎을 가득 싣고 온 무역선에서 찻잎을 내리는 것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찻잎을 가공하여 만든 차(茶)를 가득 싣고 대륙으로 가려는 무역선들의 출항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배에서 산화해 가는 일본 찻잎들을 배에서 내려 가공하고 또한 완제품 차들을 싣고 대륙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무역선의 출항을 위해 김헌창은 반란을 선택했다. 국호를 장안(長安)이라고 선언하고 당나라의 눈치만 살피는 헌덕왕에 대한 야유(揶揄)로 경운(慶雲)이라는 연호를 선포했다. 장안국왕(長安國王)의 이름으로 경운(慶雲) 원년(元年)의 무역선 출항을 허가하는 항행(航行) 증명서가 발급되었다. 김헌창이 이끄는 군대는 여전히 헌덕왕의 신라군이었다. 김헌창이 선포한 장안이라는 나라의 군대가 무슨 군사적 활동을 했다고 하는 기록이 없는 연유다. 김헌창은 일본 찻잎의 무허가 수입과 차무역선(茶貿易船) 불법 출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으나 반란의 책임은 물어지지 않았다. 명주에 있는 그의 집안이 반역으로 연루(連累)되지 않고 여전히 건재했던 연유 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