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요(遼)나라의 성종(聖宗)은 987년 발해(渤海)의 유민들이 목단강(牡丹江)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건국한 정안국(定安國)을 정벌해 일본 차(茶)를 초원로(草原路)로 유통시키는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착실하게 국가재정을 쌓아 나갔다. 993년 경쟁자인 송나라와 가까워 지려는 고려를 소손녕을 보내 서희와의 담판으로 통제한 그는 1004년 송나라와 전쟁을 치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전연지맹(澶淵之盟)으로 백자의 원료인 고령토가 나는 고북진(古北鎭) 서남단에 있는 고령진(高嶺鎭)을 포함한 연운 16주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회흘(回紇)의 서역까지 공격, 하서회랑 서쪽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송나라로부터 실크로드 통제권마저 빼앗게 된다. 이로써 거란인들은 대륙에 존재하는 두 개의 주요 무역로 통제권을 한 손에 거머쥐게 된다.물샐틈 없는 무역로 지배권에 균열이 생긴 건 고려에서 흘러나온 황차(黃茶)때문이었다. 모든 머천트(merchant:차상인)들이 고려에서 생산된 황차(黃茶)를 확보하기 위해 요나라가 지배하는 차(茶)들을 구매하지 않으려 하자 성종(聖宗)은 고려에 압력을 행사해 고려의 황차 생산을 붕괴시키려고 기도했다. 고려 왕 목종(穆宗)의 살신성인으로 황차 생산 파괴 기도가 실패하자 성종(聖宗)은 40만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1010년 고려를 침공했다. 서북면 순무사 강조가 이끄는 30만의 고려군을 격파하고 개경에 입성한 성종은 그러나 고려의 황차 산업을 파괴하지 못한 채 철군해야만 했다. 고려의 황차 산업을 이끌고 있는 것이 전임 왕 목종이 보호하고 강조가 정변으로 옹립한 현임 고려왕 현종이라는 것을 그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문종(文宗)의 부왕(父王)인 현종(顯宗)은 왕족이었으나 사생아였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인 안종이었고 어머니는 고려 5대왕인 광종의 아들 경종(景宗)의 비인 동시에 고려 6대왕 성종(成宗)의 여동생이었던 헌정왕후였다. 그러나 현종은 어머니 헌정왕후의 친언니이면서 역시 경종의 비로 목종(穆宗)을 낳아 천추태후로 불리던 헌애왕후와 그녀의 애인 김치양으로부터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토굴 속에 숨어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아들보다 우선인 왕위계승권(왕건의 손자)을 가진 현종을 왕위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대량원군(후일 현종)을 승려로 만든 천추태후는 그것도 모자라 자객들을 여러 차례 보내 죽이려 했다. 진관(津寬)이라는 스님 하나 달랑 있는 암자에 대량원군을 신혈소군(神穴小君)으로 만들어 절로 보낸 후 독을 탄 음식을 보내어 독살시키려 하고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신혈소군이란 왕의 서자이면서 출가해 스님이 된 왕자를 부르는 호칭이었는데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승려가 되어 신혈소군이 되자 진관스님의 암자는 신혈사(神穴寺)로 불리게 되었다. 결국 진관스님은 자객의 암살 위협에 놓인 대량원군을 보호하기 위해 불상을 모신 단(佛壇:須彌壇) 밑에 조그만 토굴을 파고 그 속에 대량원군을 숨겼다. 그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해 나가던 상황에서 현종은 토굴 속에 비상용 약(藥)으로 가져간 차(茶)에서 우연히 황차(黃茶) 제조법을 터득했다. 습기가 가득 찬 좁디좁은 토굴 속에 종이로 포장된 차(茶)들이 현종의 체온에 데워진 공기에 발효(醱酵)가 된 거였다. 고구려 시절 목단강(牧丹江)에서 꽃피웠던 황차 제조기술이 고구려 멸망이후 끊어졌다 현종의 고난 어린 토굴 속에서 부활한 것이었다. 직접 개발한 황차 제조비법 때문에 현종은 거란족 요(遼)나라 성종(聖宗)의 침략을 받아야 했고 나주까지 몽진(蒙塵)을 떠나야만 했다. 거란인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사라진 목단강변의 황차가 고려에서 수출되고 있음을 확인하곤 지체없이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황차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고구려와 함께 한 거란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혈소군이 황차를 개발하고 고려왕이 되자 진관(津寬)스님이 있던 신혈사는 진관사로 확장창건되었다.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津寬寺)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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