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라와 야마토, 전방후원분의 진실-거석문화의 진실 1

by 檀童稗說 2024. 5. 16.

是時諸天人意決分居 欲保大城於完全 黃穹氏乃分給天符爲信  敎授採葛爲量 命分居四方. 於時靑穹氏率眷出東間之門 去雲海洲 白巢氏率眷出西間之門 去月息洲 黑巢氏率眷出南間之門 去星生洲 黃穹氏率眷出北間之門 去天山洲 天山洲 大寒大險之地라. 此黃穹氏自難忍苦復本之盟誓.
이때에 천인(天人)들이 나누어 살기로(분거:分居)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보전하고자 함으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주고 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黃穹氏)는 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復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 박제상의 징심록 부도지(符都誌) 8장 분거 중에서

서부 사하라 지역에 남아 있는 고인돌. 출처: Live Science - Copyright Nick Brooks and Joanne Clarke


루왜은조리에서 배달(倍達)해 서쪽으로 간 백소씨(白巢氏)의 흔적은 서사하라(West Sahara)에 남아있는 고인돌(Dolmen)의 유적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고인돌은 무덤용(墓制用)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고인돌은 사라져 가는 차나무에서 딴 희귀한 찻잎들을 가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찻물을 공급해 줌으로써 공동체를 지켜내려는 인간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돌마다 박혀있는 찻물제조공장의 흔적이었다. 찻물을 제조해 공급할 때에도 흙으로 흡수되어 손실되는 찻물이 아까워 흙 위에 돌을 깔아 수로를 포장했다. 서부 사하라 사막에는 이러한 인간들의 처절한 사투의 증거들이 아직도 얼마간 남아 있다. 모로코 남부에 위치한 모리타니아국 칭게티(Chinguetti)는 영국처럼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돌들로 집과 탑, 울타리들을 짓고 아직도 살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마을이다. 루웨은조리를 떠나 북쪽(黃穹氏)과 동쪽(靑穹氏)으로 향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에서 흙으로 만든 벽돌로 공동체를 지켜냈다면 서쪽으로 향한 사람들은 돌을 사용해 공동체를 지켜내고 있었다.

서부 사하라 지역에 남아 있는 돌로 만든 찻물 수로의 흔적. 출처: Live Science - Copyright Nick Brooks and Joanne Clarke


모리타니아 사막(Ksour)의 돌문화를 잘 보여주는 고대 마을 유적이 남아 있는 칭게티(Chinguetti). 출처: Live Science - Copyright Joanne Clarke


카메룬(Cameroon)과 가나(Ghana), 모리타니아와 서사하라, 그리고 모로코를 거쳐 지브롤터(Gibraltar) 해협을 건넌 백소(白巢)씨는 결국 차(茶) 나무를 찾아 영국과 아일랜드(Ireland)까지 이르렀다. 아일랜드에서 카(cha, 茶) 나무를 찾아내 정착한 백소씨는 차(茶) 나무를 가(檟)라고 불렀기에 게일인(Gael)이라 불렸다. 아일랜드 동북부 항구인 벨파스트에서 아이리쉬해(Irish Sea)를 건너 북부 영국으로 건너간 게일 인들은 글래스고우와 에든버러까지 진출했다. 글래스고우와 에든버러로 나아가 스코틀랜드를 개발한 게일 인들이 영국땅에 처음 상륙해 내륙으로 들어간 길을 갈러웨이(Galloway)라고 부른 연유였다.

아일랜드에서부터 시작되는 서지중해 찻잎 공급망 지도. 출처:구글지도


에라[ɛrə]라고 발음되는 아일랜드의 국명(國名), 에이레(Eire)는 수메르어로  [E Ra] 였는데 폭풍우신의 신전(Temple of the king of the deities)이라는 뜻이었다. E( )는 사찰(temple)이라는 뜻이고 Ra ()는 신들의 왕이라는 뜻이었다. 수메르인들이 모든 신(神)들 중 최고의 신으로 섬긴 것은 폭풍우(暴風雨)의 신, 엔릴(Enlil)이었다.  수메르인들이 그를 최고의 신으로 섬긴 것은 그가 서로 강력하게 결합되어 비료로 쓸 수 없는 공기 중의 질소를 번개(申)를 쳐서 분리시키고 동시에 비를 뿌려줘 분리된 질소가 수소와 합성되어 암모늄(NH3)으로 변하게 해 주고 또한 바람을 세게 불어 넓은 땅에 암모늄이 비와 함께 떨어지게 해 차나무가 잘 자라게 했기 때문이었다. 차(茶) 나무는 충분한 질소 비료 없이는 생장할 수 없는 나무였다. 폭풍우의 신(God of thunderstorm)이란 뜻의 엔릴(Enlil)은 숫소로 표상되었는데 이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우상숭배했다는 바알(Baal)이었다. 당시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던 유럽인들은 신(神)의 사찰(寺刹 , Temple of God)인 에라(Eire)에서 공급해 주는 찻잎 덕분에 살아나갈 수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 폭풍우의 신(神)은 환웅(桓雄)이다. 그는 풍백(風伯)과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삼천 명과 함께 데리고 내려와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을 개국한 것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투무러스(Tumulus): 내부에 챔버(chamber)를 가지고 적석층(cairn)을 이루며 흙으로 덮인 언덕같은 봉분. 출처: Dr. Barry and Rene Fell 의 무료 이미지


아일랜드 중서부의 클레어(Clare) 카운티(County)의 서쪽 끝 해안에는 뷰런(Burren) 국립공원이 있는데 여기엔 한국 최대의 탁자식 고인돌인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과 쌍둥이로 불리는 풀나브론(Poulnabrone) 고인돌(Dolmen)이 서있다. 아일랜드 전역에 소재한 172기의 고인돌중 가장 유명한 이 고인돌은 기원전 42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강화 부근리 고인돌보다 제작 연대가 훨씬 앞선 것이었다. 그런 이 고인돌이 중요한 것은 아일랜드에서 시작해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과 코르시카를 거쳐 몰타에 이르는 차(茶) 교역로의 시작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표식이기 때문이었다. 석회암(limestone)으로 이뤄진 카이른(cairn:적석총)과 흙들이 함께였을 거라 판단된다는 고고학적 분석은 대단히 타당한 조사결과에 틀림없다. 이 고인돌은 독자적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투무리(tumulus)로 건설되었다가 다른 돌과 흙들이 모두 다른 곳에 사용되어 버린 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홀로 남은 널의 한 부분이었다. 원래 모습은 널과 챔버(chamber)라 불린 원통형(cylinder) 방이 지어지고 그 위로 온도와 습기를 낮추고자 규산(SiO2) 질 돌들이 켜켜이 쌓아져 적석층(cairn)을 이루고 또 그 위로 흙들이 덮인 투무리(tumulus)였다.

아일랜드 클레어(Clare) 뷰런(Burren) 국립공원에 있는 풀나브론(Poulnabrone) 고인돌(Dolmen). 출처:위키미디어


그래서 원래 이름 또한 맷돌 웅덩이(the pool of quernstone)였다. 폴나브론(Poulnabrone)은 영어식 발음을 적은 것인데 아이리쉬(Irish) 철자로 바꿔보면 Poll na Brón 이 된다. 여기서 Brón 은 맷돌(quern)을 뜻하고 poll은 웅덩이, 수조(Pool)를 뜻한다. 따라서 poll na Brón 은 맷돌 수조(pool of the Quernstone)였다. 맷돌에 갈려 착즙(搾汁)되어 나온 찻잎들의 액즙(液汁)이 모이는 수조(水槽,pool) 시설이 있던 곳이었다. 모헨조-다로에서 목욕탕으로 잘못 알려진 대형 수조(水槽) 같은 시설이 있고 스투파 같은 원통형 챔버(chamber)가 있던 곳이었다. 후일 기후변화로 나라의 모든 차나무들이 죽어 사라지자 서지중해 전역에 찻잎을 제공하던 이곳의 찬란한 생명의 역사도 사라지게 되었고 찻잎 교역의 시작점이었던 것 또한 쇠락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곳은 이제 맷돌 수조(poll na Brón)가 아니라 슬픔의 구멍(Hole of Sorrows=Poll na mBrón)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 북쪽으로 50.7km 떨어진 곳에 뉴그란지(Newgrange) 투무루스(Tumulus)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은 투무리를 포함해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거의 모든 것이 다 찻잎 가공 공장 시설의 하나였다는 걸 증명해 주는 훌륭한 증거다.

더블린(Dublin) 북쪽 50.7km 떨어진 곳에 있는 Newgrange Tumulus 전경. 출처: Youtube National Monuments Service Ireland.


찻잎이 교역되던 무역로를 우리 민족은 차널(channel)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찻잎 제조 공장인 투무리(tumuli)의 출입 통로를 널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많은 공기를 집적하기 위해 널찍한 방형(사각형)으로 시작하는 투무리는 온도와 습도를 낮추기 위해 점점 좁혀져 들어가는 통로(널)를 거쳐 찻잎 보관과 찻물을 제조하는 원통형 방(房:chamber)으로 연결되었는데 맷돌이 설치된 챔버(chamber:방)와 연결되는 마지막 부분에서의 통로는 널뛰기할 때 쓰던 널빤지 한 장 정도의 폭으로 좁혀져 있었다.

출처: Youtube National Monuments Service Ireland


좁아지는 출입 통로는 공기의 흐름을 빠르게 만들어 원통형 방(chamber)으로 유입되는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이렇게 차가워진 공기는 찻잎을 보관하고 찻물을 만드는 투무리 안쪽 가장 깊숙이 설치된 원통(圓筒, cylinder) 공간(chamber)의 온도를 내렸을 뿐 아니라 습기까지 제거해 주었다. 그렇기에 투무리를 만들 때 원통 공간(chamber)만큼 정성을 많이 들여 건설한 곳이 널 구간이었다. 현재 탁자식 고인돌로 남아 있는 거석(巨石, megalithic) 유적의 거의 대부분은 투무리의 원통형 공간을 향해 삼각뿔 모양으로 좁아져 가는 이 널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산이나 땅밑을 뚫어 만든 굴을 터널(tunnel)이라 부르는 연유도 이 투무리의 널에서 유래한 것이다.

Newgrange Tumulus 안쪽에 있는 chamber로 가는 진입로인 널의 모습. 점점 좁아져가는 삼각뿔 모양의 널이 분명하다. 출처: Youtube National Monuments Service Ireland.


유체(流動體)의 속도를 높이면 유체의 온도가 낮아진다는 베르누이의 원리를 이용해 삼각뿔(triangular pyramid) 모양으로 시공된 널은 투무리(tumuli) 내부로 유입되는 공기를 차갑게 만들어 투무리에서 보관되는 찻잎들을 산화시키는 온도와 습기를 낮추는 큰 역할을 했다. 속도 에너지가 많아지면 열 에너지가 그만큼 감소하여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이 과학기술을 후세들에게 기억시키게 하고 익히게 하기 위해 널뛰기처럼 고안된 놀이가 오징어놀이였다. 단오절에 소녀들이 널뛰기를 하며 놀이를 한 것은 좁은 널을 드나들 때 널 밖으로 발을 내딛는 실수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한 훈련의 일종이었는데 네모에서 시작해 삼각형을 지나 삼각형 꼭짓점과 공통부분을 이루고 있는 원(圓)에 발을 디뎌야 승리하는 이 오징어 놀이도 대부분의 공간을 한 발은 들고 다른 한 발로만 다니는 깨끔발로 움직이게 해 좁은 널에서 큰 몸집의 장정들이 균형을 잃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훈련으로서 뿐만 아니라 투무리 건축 원리를 몸으로 익히게 하는 학습이었다.

오징어놀이를 하는 공간 모양은 투무러스(Tumulus)의 횡단면도(橫斷面圖)였고 바빌론의 지구라트인 바벭탑의 종단면도(縱斷面圖)였다. 출처:나무위키


오늘날 일본과의 고대사(古代史)에서 논란이 되는 전남 나주 지방의 장고형(杖鼓形) 고분(古墳)과 오사카의 그 유명한 열쇠구멍 모양 고분(전방후원분) 간의 선후(先後) 관계 또한 이 오징어 놀이가 누가 먼저인지 명징히 알려주고 있다. 한국인은 아이들의 놀이로 이 오징어놀이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일본은 이런 놀이 자체가 아예 없었다. 바빌론에 세워진 지구라트인 바벨탑의 최상층부가 만약 원통형이었다면 장방형의 기단부와 계단식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라간 상층부의 삼각형 단면을 원통형의 최상층부와 함께 그려보면 오징어놀이가 이루어지는 장의 형상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우 이정재가 출연해 세계적 열풍을 일으켰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1화에는 도입부에 이 놀이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주인공의 독백으로 소개되었다.

일본 오사카시 사카이부에 있는 전방후원분. 찻잎 가공 공장이었다. 출처: 나무위키

지구라트인 바벨탑이 있던 바빌론(Babylon)은 아카드(Akkad)인이 남긴 수메르어로 하늘의 신(神)이 벼락을 내려친 땅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성이란 뜻이었다.  바빌론(Babylonia)을 세운 아카드인(Akkadian)들이 남긴 설형(楔形) 문자는 위의 사진과 같은데 이때 (kur)는 산이란 뜻이고 (ka)는 입(mouth) 또는 문(門)이라는 뜻이며 (an)은 하늘, (ra)는 낙뢰(落雷:strike down)라는 뜻이고 (ki)는 땅이란 뜻이다. 결국 하늘 신이 벼락을 떨어뜨린 땅으로 들어가는 산문(山門) 또는 성문(城門)이란 뜻이다. 이슈타르의 문으로 알려진 바빌론 성곽의 성문(城門)이 바빌로니아를 건설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그토록 화려하고 장엄하게 건축된 연유였다. 경주의 불국사와 양산의 통도사, 승주의 송광사와 구례의 화엄사, 영주의 부석사와 보은의 법주사등 우리나라의 오래된 대찰(大刹)들에는 일주문(一柱門)으로 시작해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들이 지어져 있고 이들 문(門)들을 차례로 지나야 비로소 법당에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이런 사찰들은 그래서 산문(山門)이라 불렸다. 구산 산문(九山禪門)은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산문(山門)이란 결국 폭풍우 신의 축복인 차(茶) 나무들을 지키고 찻잎을 보관하고 찻물을 제조해 중생들을 살리는 중차대한 일을 수행하던 곳을 말하는 곳이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인 바벨탑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최상층부가 스투파라고 가정하면 투무리의 구조와 똑같다. 오징어놀이판과도 같다. 계단식 피라미드의 한 단면은 삼각형이다.


우리 민족이 국가(國家)를 나라(Na Ra)라고 부르는 것은 수메르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 뜻은 신들의 왕인 폭풍우 신이 벼락을 떨어뜨린 땅이라는 뜻이다. 즉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나라는 수메르어로  위의 사진처럼 쐐기(설형) 문자로 쓰는데 이때  (Na)는 (ki:땅)라는 글자 앞에 쐐기 점자가 덧붙어 특정한 땅이란 뜻이고  (Ra)는 앞서 소개했듯 신들의 왕인 폭풍우의 신이 벼락을 떨어뜨린 것을 뜻했다. 따라서 나라라는 말의 뜻은 신들의 왕인 최고신, 즉 폭풍우 신이 벼락을 떨어뜨린 특별한 땅이라는 것이다. 국가(國家)를 영어로 nation이라고 하는 것도 나(na)의 뜻인 특정 영역의 한정된 영역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야마토라고 불렸던 땅을 지금까지도 나라(奈良)라고 부르고 있는 연유다. 결국 나라는 차(茶) 나무가 자라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생명의 나무인 차나무앞에 앉아 찻잎들을 보고 있는 폭풍우의 신. Enlil. 우리 단군 건국 신화의 환웅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역사적 맥락 없는 대화(大和)라는 뜬금없는 번역으로 진짜 뜻을 더욱 알지 못하게 한 야마토(やまと, yamato)는 배달(背達= 倍達)과 같은 뜻인 산도(やまと: 山倒)라는 말이다. 야마(やま)는 산(山)이고 도(と)는 倒戈(도과: 창(槍)을 거꾸로 한다는 뜻으로, 자기편(自己便)을 배신(背信)하여 난(亂)을 일으킴을 이르는 말)라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 배신(倒)했다는 뜻이다. 우리말에서 달(達)은 산(山)을 뜻했고 따라서 배달(背達= 倍達)은 산을 배신했다는 말이었다. 야마토 또한 산을 배신하고 떠났다는 배달과 똑같은 뜻으로 그것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배신하다의 배(背)자가 달 월(月)자와 북쪽 북(北)자로 이루어진 연유는 신라 박제상 선생이 볼모로 잡혀 있는 눌지왕의 동생,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해 야마토의 땅으로 떠나기 직전 아들 백결선생에게 구술해 지어진 징심록 1권 부도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삼신할미가 다스리는 루에은조리 산에서 오미의 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떠나야 했던 기원전 8천년경의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배달이라는 두 글자에 선명히 전승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배달의 민족이 된 연유였고 동해 바다 건너에 야마토의 땅이 나라(奈良県,ならけん)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역사였다.(자세한 내용은 우리는 왜 배달(倍達)의 민족(民族) 일까 참조)

찻잎이 주로 수로(水路)를 통해 교역되었기에 차널은 주로 뱃길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채널(channel)이었다. 아일랜드 풀나브론(Poulnabrone) 고인돌(Dolmen)이 있는 클레어(Clare) 뷰렌(Burren)에서 시작된 찻잎 교역로는 아일랜드의 Ennis와 Limelick, Clonmel까지 육로로 연결되었다가 Clonmel에서부터 Waterford항의 킹스 채널(Kings channel) 까지는 Suir 강(江)을 통해 이어졌다. 워터포드(Waterford) 하버(harbour)를 출발해 세인트 조지 (St. George) 채널(channel)을 통해 아이리쉬(Irish) 해를 건넌 차(茶) 무역선은 영국 웨일스(wales)의 클레다우 두(Cleddau Ddu) 강으로 들어가 펨브로크(Pembroke) 하버(harbour)에 정박했다. 다시 브리스톨(Bristol) 채널을 거쳐 영국 브리스톨 하버(harbour)에 도착했다. 브리스톨 하버에서 찻잎들은 배에서 내려져 수레에 옮겨 실어졌고 이후 육로로 Bath와 Warminster를 거쳐 스톤헨지가 있는 솔즈베리(Salisbury)에 도착했고 이후 Salisbury에서는 다시 배에 실려 아본강(Avon river) 수로(水路)로 프랑스에 찻잎들을 보낼 Poole 하버(harbour)에 도착했다.


항구를 뜻하는 영어는 Harbour와 Port가 있는데 이는 차(茶) 무역선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우리 민족 해운사(海運史)에서도 포(浦)와 진(津), 나룻터가 구분되어 있듯 서양 해운사(海運史)에도 하버(Harbour)와 포트(Port) 그리고 포드(Ford)가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 찻잎을 실은 선박의 교통과 관련한 것이었다. 나룻터와 포드(Ford)가 작은 강을 오고 갈때 사용하는 부두라면 포(浦)와 하버(Harbour)는 큰 강이 바다를 만나는 곳에 위치해 바다를 오가는 차(茶) 교역선(交易船)이 사용하는 부두였다. 따라서 최고가의 찻잎을 싣고 내리는 포(浦)와 하버(Harbour)에는 방어시설이 특히 중요했었다. 하버에서 하(ha)는 차(cha)에서 C가 생략된 차(茶)를 뜻했고 버(bour)는 요새(Fort)를 뜻하는 부르(Bourg)를 뜻했다.

영국 웨일즈 브리스톨(Bristol) 항구(Harbour)의 성(castle). 출처:위키미디어

독일 지역에서 돌로 쌓은 방어 시설인 성(castle)을 의미하는 부르크(Burg)는 프랑스에서는 브르(Burg)로 잉글랜드에서는 보로(Borough), 스코틀랜드에서는 버러(Burgh)로 불렸다. 기후 변화로 차나무가 사라져 가자 찻잎을 실은 교역선에 대한 약탈이 빈번해졌고 점점 포악해져 갔다. 이제 자체적인 방어시설만으로는 귀중한 찻잎들을 지켜 거래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부두에 정박한 차(茶) 교역선(交易船)을 방어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항구가 요구되었다. 항구 전체가 요새(fort)인 항구, 포트(Port)가 등장한 연유였다. 포트(Port)가 하버(Habour)를 대체하면서 교역(交易)이란 말도 칼이 들어간 무역(貿易)이란 말로 바뀌었다. 나루 진(津)이라는 글자에 있는 붓 율(聿) 자의 갑골문이 삼지창을 손으로 내려 찍는 모습을 상형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풀리(Poole) 하버를 출발한 차(茶) 무역선은 영국 채널(English Channel)을 이용한 뱃길로 프랑스 브르탸뉴(Brittany) 셰부르(Cherbourg)와 Guernsey 섬이나 Jersey 섬 같은 채널 제도(Channel Islands)를 경유해 프랑스 세인트 마로(Saint-Malo) 포트(port)에 연결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육로로 서쪽 대서양 연안 항구인 카르낙까지 수송된 찻잎들은 다시 배에 실려 스페인의 나바르로 들어갔다. 현재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이 활동하는 빌바오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진 찻잎들은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타라고나(Tarragona)항에서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했다. 제노바에서 피렌체의 항구 도시인 리보르노(Livorno)에 도착한 찻잎들은 코르시카 채널을 이용해 마지막 종착지인 코르시카 섬의 바스티아(Bastia)에 다다랐다. 나폴리 이남 지역과 베네치아가 있는 아드리아해 지역, 몰타섬 지역은 크레테와 테라섬에서 찻잎을 공급했다.

Newgrange Tumulus에 설치된 널. 탁자식 고인돌은 이 널을 만들기 위해 설치된 구조물이다. 출처: Youtube National Monuments Service Ireland


희귀해진 찻잎들을 한 곳에 모으고 그렇게 모아진 찻잎들에게서 액즙(液汁)을 내어 그 액즙을 물에 용해시켜 그를 통해 많은 찻물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공동체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여러 특수 시설이 건설되어야만 했는데 그것은 찻잎이 차나무에서 떼어 내지는 순간부터 약효가 감소되는 산화(酸化)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급속히 산화하는 찻잎의 약효를 보존하기 위해서 찻잎을 다루는 곳의 온도와 습도를 최대한 낮추는 과학기술이 필요했다. 산화를 촉진해 찻잎을 그냥 평범한 나뭇잎으로 만드는 고온(高溫)과 다습(多濕)을 낮출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들이 필사적으로 연구 개발되었다.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태양을 피해야 했고 습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찻물을 만들기 위해선 가까이에 물이 있어야만 했고 습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태양빛이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조건들을 맞추기 위해 채택된 공법은 굴(窟)을 찾아 동굴에 찻잎 보관 창고와 찻물 제조 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굴(窟)이 여의치 않을 경우엔 굴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하에 시설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방법이 모두 불가능한 지역에서 채택된 방법은 인위적인 굴(窟)을 지상에 만드는 고분(古墳 tumulus) 공법이었다. 땅을 파고 건설된 것이 아니었기에 온도와 습도를 통제하기 위해 기다란 출입구가 시설되었다. 투무러스(Tumulus)는 무덤이 아니었다. 이 찻잎 가공 공장 건설법을 언제든 다시 기억하자고 지어진 게 경주 석굴암(石窟庵)이었다. 당시 당나라는 통일신라가 차산업을 포기하도록 엄청난 압박을 자행하던 시절이었다.

석굴암 단면도. 출처: Youtube. BTN 다큐멘터리


습기를 잘 빨아들이는 규산질(SiO2) 암석들이 건축재료로 선정되었다. 경주 석굴암은 한국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규산질이 구성의 72% 이상을 차지하는 화강암(花崗巖, granite)으로 만들어졌지만 사하라 사막에서는 화강암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규산질 석회암(石灰巖, limestone)으로 찻잎 보관 창고와 찻물 제조 공장이 만들어졌다. 사하라 사막에서부터 얻어진 규산질 암석의 습기 제거 성질에 대한 이 지식은 유럽에 까지 그대로 이어져 스톤헨지(stonehenge) 건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스톤헨지의 내곽(外廓) 원형(圓形)은 규산질(silicified)의 사암(sandstone)으로 또 외곽(外廓) 원형(圓形)은 청금석(bluestone)이라는 규산질 알루미늄 장석(feldspar)으로 지어진 연유였다. 습기를 잘 흡수하는 규산질(SiO2) 돌들과 찻물을 만들기 위해 언제나 흘러야 하는 물은 돌들로 만들어진 건물 내부의 습도를 낮춰주었다.  이제 낮춰야 할 건 온도였다. 찻잎 보관 창고와 찻물 제조 공장의 온도를 전반적으로 낮춰주는 최고의 방법은 땅을 파고 그 속에 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천연 동굴에서 얻은 지혜였다. 기슭, 굴바위, 석굴이란 뜻을 가진 엄(厂) 자에 공장(工場)이란 뜻이 있는 연유였다. 사막에서처럼 판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에서나 땅을 파는 도구들이 미처 개발되지 못했던 시대에는 땅 위에 찻물 제조 공장을 짓되 굴(窟) 속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지금 고분(古墳, tumuli, tumulus)이라 불리는 건축물이었다.

인공 석굴인 석굴암 출처: Youtube. BTN 다큐멘터리


천장(ceiling)이 높으면 높을수록 공간이 크면 클수록 시원해졌기에 거대한 규산질(Sio2) 돌들이 캐내지고 다듬어져 기둥돌과 천장을 구성하는 들보돌들로 쓰였다. 석굴암(石窟庵)처럼 보다 넓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찻잎 보관 장소와 찻물 제조 공장은 원통형 공간으로 지어졌다. 동일한 길이의 줄로 여러 도형을 만들어 보면 그중 최대의 넓이를 가진 도형은 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원통형의 공간(chamber)을 시원하게 만들어 온도와 습도를 모두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들이 개발되어 적용되었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치를 회전시킨 돔형 천장이 개발되었다. 온도와 습도를 낮출 수 있는 굴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큰 돌이 다듬어져 기둥돌과 들보돌들로 사용되었다. 기둥들 사이로는 그리 크지 않은 다루기 용이한 평범한 규산질 돌들이 다듬어져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벽이 되었고 기둥들 위로는 규산질 암석들이 덮개돌들로 올려져 천장을 만들어 상부의 자갈과 흙들의 무게를 견뎠다. 선돌(立石, menhir:stone long)이라고 지금 불리는 거석문화(megalithic)의 한 형태는 그런 찻물 공장과 찻잎 보관 창고 건물의 기둥으로 쓰이다 다른 돌들이 모두 사라진 후 홀로 남은 돌들이었고 열석(列石, alignement)이라 불리는 것들은 기둥으로 쓰였던 돌들만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사라진 돌들의 대부분은 찻잎 가공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성과 집, 도로와 울타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영국 윈저성 전경. 모두 돌로 만들어졌다. 유럽 고성들의 석재는 모두 찻잎가공시설에서 뜯어온 것들이었다. 집도 도로도 다리도. 출처:위키미디어

스톤 헨지에 규산질 사암(砂巖)(silicified sandstone)과 규산질 알루미늄 장석(feldspar)이 그토록 큰 돌들로 만들어져 운반되어 온 연유는 바로 습도와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였다. 높이가 13ft(4m)에 폭은 7ft(2.14m) 무게가 25톤에 달하는 돌들이 외곽 벽기둥으로 둘러져 있고 높이가 24ft(7.32m)에  무게가 50톤에 달하는 돌들이 내곽 벽기둥으로 둘려진 것이 스톤헨지였다. 외곽에 둘려진 돌들이 내곽에 둘려진 돌들보다 3m 이상 높이가 낮은 건 스톤 헨지가 둥그런 고분(tumuli)이었기 때문이었다. 돌들을 세워 원형 벽을 만들 기둥을 세우고 상인방(lintel)들로 내곽과 외곽의 각 기둥들을 서로 연결한 다음 내곽과 외곽의 상인방들을 덮개 돌들로 덮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돌을 쌓아 채워 넣어 벽을 만들었다. 내곽과 외곽의 상인방들을 덮은 돌들 위에 다시 덮개돌들을 걸쳐 쌓았다. 그런 후에 작은 돌들로 지붕을 덮었고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적석총과 고분을 만드는 공법이 차례로 적용된 것이었다. 스톤 헨지는 헨지 위에 조성된 투물리였고 그 역할은 찻물 제조 공장 및 찻물 공급 기지였다. 스톤 헨지에 높이 13ft(4m) 짜리로 만들어진 원형과 높이 24ft(7m) 짜리로 만들어진 원형 두 개가 내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찻물을 내보내는 물길에 원심력을 주어 멀리까지 흘러갈 수 있는 운동에너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모헨조-다로의 소용돌이 모양의 미로(labyrinth) 수로와 같은 역할이었다.

Newgrange Tumulus 내부 널 기둥 벽에 새겨진 소용돌이(labyrinth)문양. 내보내는 찻물에 원심력을 주어 멀리까지 흐르게 하는 장치. 출처:National Monuments Service Ireland

돌들로 이루어진 석실(chamber) 위로 자갈과 흙을 차례로 올린 이유는 통풍 때문이었다. 바깥의 더운 공기가 투뮬러스(tumulus)안으로 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투뮬러스의 겉면을 덮고 있는 흙과 자갈을 통과하게 해 품고 있던 습기를 수증기로 응축시켜 자갈에 남게 하고 그렇게 해서 건조해진 공기는 차가워져 무거워지면서 아래쪽 투뮬러스의 내부로 내려가 투뮬러스 내부의 온도를 낮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게 만들었다. 찻물 제조를 위해 또 찻물 공급을 위해 항상 흐르던 내부의 찬 물은 투뮬러스 내부의 습기를 에어컨의 냉기처럼 붙잡아 외부로 내보내는 역할을 해 찻물 제조 공장 내부의 낮은 습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획득한 경험적 발견은 이후 찻잎을 보관만 하는 창고 역할을 하는 헨지에도 물을 흐르게 해 온도와 습도를 낮추는데 활용하게 되었다.

스톤헨지 서쪽 8km 지점에 있는 Yarnbury 헨지. 대륙 수출용으로 솔즈베리(salisbury)의 아본(Avon)강을 통해 Poole항으로 보내지는 찻잎들을 보관했던 창고. 출처: 위키미디어

지붕 모양 중 원형이 방형보다 실내 온도가 낮다는 것을 알아낸 이후부터 찻물 제조가 이뤄지는 공간은 모두 원형으로 건설되었다. 찻물을 만들어 내보내는 수로는 원심력을 만들어 멀리까지 흐르게 하기 위해 최대한 소용돌이형으로 만들어졌다. 원형 또는 타원형의 모습을 띤 헨지(Henge)가 만들어진 연유였다. 카르나크의 열석(Alignements de Carnac)은 그런 찻잎 창고들의 널들이 뜯겨 남은 잔해들이다. 찻잎 관련 시설들에서 뜯겨 나간 돌들은 모두 성을 쌓거나 집을 짓거나 도로를 포장하거나 울타리를 치는 데 사용되었다. 유럽의 고성들이 거의 전부 다 돌들로 만들어진 연유였다. 지금 살아남아 거석문화란 이름이 붙어 그 용도를 알 수 없게 된 돌들은 그런 건축 자재로 사용되기에는 맞지 않는 돌들이거나 해체하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 더 들어가는 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차가 없어 술만을 마셔왔던 사람들은 그 돌들이 이루고 있던 구조물들이 찻잎을 가지고 찻물을 만들어 공급하던 시설이란 걸 알 수 없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성도 교회도 시청건물도 집도 울타리도 심지어 도로도 모두 돌로 되어 있다. 모두 찻잎가공시설들을 해체해 가져온 것들이다. 출처:KBS 파노라마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로 남아 있는 고인돌(Dolmen) 같은 유적들은 무덤으로 쓰기 위해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