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契丹)이 보낸 낙타(駱駝) 50마리를 만부교(萬夫橋)의 교각(橋脚)들에 붙들어 매어놓고 굶겨 죽인 사건(事件)으로 고려(高麗) 최대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만부교(萬夫橋) 사건(事件)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죽기 한해 전인 942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遼)나라 태종(太宗)이 낙타(駱駝)들과 함께 보낸 사신(使臣)들 30명 또한 섬으로 유배(流配) 보낸 왕건(王建)의 이러한 조치(措置)는 후세(後世) 국왕(國王)들에게도 기이(奇異)하게 여겨져서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한 충선왕(忠宣王)이 자신의 총신(寵臣)이었던 이제현(李齊賢)에게 그 이유(理由)를 물어본 것이 김종서(金宗瑞)가 편찬(編纂)한 고려사(高麗史)에 기사(記事)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충선왕(忠宣王): 태조대왕께서는 거란이 보낸 낙타 50 마리를 키우는 게 백성들에게 무슨 피해가 간다고 굶겨 죽이셨을까? 나라 임금이 그 정도 낙타를 키우지 못했을까? 백성들에게 그리 큰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을 텐데…그리고 싫으면 돌려보내면 될 일이 아닌가? 이제현(李齊賢): 원래 나라를 건국한 분의 소견은 워낙 원대하고 깊어서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태조께서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을 꺽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태조대왕의 조치(措置)에는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묵묵히 생각하시고 힘써 행하셔서 태조대왕의 숨은 뜻을 알아내셔야 합니다.…그것이 임금이 할 일이며 어리석은 저는 잘 모릅니다. - 고려사(高麗史) 기록(記錄)중 만부교(萬夫橋) 사건에 대한 충선왕(忠宣王)과 이제현(李齊賢)의 문답(問答)중 일부
낙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를 리 없는 충선왕이었고 이제현이었다. 징기즈칸의 손자로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낙타가 실크로드라 불리던 무역로에서 가장 중요시 되던 운송수단이라는 걸 모를리 없었다. 게다가 낙타는 사막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 말고는 딱히 소용되는 것도 없는 동물이라는 걸 모를 충선왕이 아니었다. 충선왕의 질문은 고려를 향해 실크로드 동맹에 들어 오라는 거란의 제안을 그토록 모질게 거부할 것 까지는 없었지 않았느냐는 의문의 표시였고 실크로드 동맹에 참여했다가 만약 국익에 좋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 그때 안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충선왕이 5년동안의 재위를 끝으로 미련없이 아들 충숙왕(공민왕의 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대도(북경)로 건너와 만권당을 짓고 염복(閻復)과 요수((姚燧)같은 원나라 조정의 고위관리와 대학자를 초빙해 연구할 때 그들 곁에서 공부하도록 발탁해 불러 온 이가 당시 26세로 성균악정(成均樂正)으로 있던 이제현이었다. 그런 이제현이 올린 답은 실크로드 동맹과 마린로드 동맹 사이의 경쟁이 어떤 피의 역사였는지 되돌아 살펴야 하고 그 속에서 실크로드 동맹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가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이 문답은 그들이 고려의 또다른 백년지대계를 세우고 있었음을 가늠케 해준다.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으로부터 낙타 50마리를 받은 건 그가 죽기 전 해인 942년 고려 왕이 된 지 25년 되던 해였다. 왕건은 송악(개성)을 기반으로 오랜동안 차(茶) 해상무역을 통해 가세를 키워 온 해상호족집안 출신이었다. 일본에서 수입되어 신라에서 가공수출되던 차(茶)들이 세계시장에 뿌려지던 경로는 당시엔 오직 동쪽으로만 흘러가던 쿠로시오 해류에 의해 결정되어졌는데 청해진(완도) 앞바다를 거쳐 강화도까지 연안항해한 후 백령도 앞에서 산동반도로 황해를 횡단하는 항로였다.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의 바다로 흘러가는 예성강을 무대로 차(茶) 수출을 해 온 왕건은 자신이 태어나던 즈음 터진 황소의 난으로 자신의 집안이 어떤 참화를 겪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왕륭이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꾸눈 궁예에게 항복해 송악을 갖다 바치고 아들인 자신을 부탁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도 모두 황소의 난때문이었다. 당나라에 저항해 일어났다던 황소군대가 서쪽에 있는 장안을 향하지 않고 해상무역의 메카인 복주 천주 그리고 광저우로 쳐들어 간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0만명에 가까운 대식국(아랍) 과 파사인(페르시아) 무역 도매상들이 학살되었고 이들에 의해 중개되던 전세계 해상 무역망이 일거에 파괴되었다. 황해와 중국해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마린로드(Marine Route of Trade) 상방(商幇)은 괴멸적 피해를 입은 데 반해 동해를 통해 일본 차를 거래하는 초원로와 실크로드 상방들은 공급부족으로 야기된 차(茶) 가격 폭등에 파안대소(破顔大笑)하고 있었다. 왕건은 황소(黃巢) 반란군(叛亂軍)이 광저우(廣州)를 기습해 학살을 자행한 것은 실크로드와 초원로(草原路) 상방(商幇)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라 판단했다. 초원로(Grass Route of Trade)에서 대상(Caravan)을 꾸려 직접 행상(行商)했던 거란인들은 실크로드에서 대상(Caravan)을 꾸려 행상(行商)했던 소그드인(Sogdian)들 처럼 이 사태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언제나 가장 큰 이득을 본 자가 범인이라고 왕건은 생각했다.
일본에서 떠난 차(茶) 무역선이 울릉도를 거쳐 두만강의 나진과 연결되는 발해로(渤海路)는 926년 발해(渤海) 멸망으로 거란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과 발해를 잇는 동해의 바닷길 발해로(渤海路)는 일명 비파로(琵琶路)라고도 불렸는데 그 이유는 일본 시즈오카지역등에서 채엽된 차(茶)들이 일본내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파호(琵琶湖) 북쪽에 있는 스루가(敦賀) 에 집산되어 항구를 떠나 울릉도를 거쳐 나진과 훈춘(琿春)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으로 들어오고 두만강에 있는 비파도(琵琶島)라는 섬에서 하역(荷役)되어 훈춘(琿春)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닷길을 거쳐오는 동안 향기가 떨어진 찻잎들에 향기를 입히는 훈제(燻製,薰製:香草,香) 공정에 특화된 이 지역을 찻잎을 훈제하는 곳이라 하여 훈춘(薰春)이라 불렀다. 오늘날 탄배(炭焙), 복배(復焙)라고 부르는 홍배(烘焙) 공정이었다. 춘(春)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지금은 봄만을 의미하는 글자가 되었지만 갑골문 원래의 형태는 청명과 곡우 기간에 새순으로 잎이 달리는 생명의 나뭇잎을 상형한 것이었다. 이렇게 훈제(薰製)되어 향기를 되찾은 일본 차(茶)들은 장춘(長春)으로 운송되었고 장춘에서 사방으로 유통되어졌다. 하얼빈을 거쳐 대흥안령을 넘어 바이칼 호수 남단의 알타이 산맥 북쪽 초원에 전달된 일본 차들은 이르크추크부터 시작되는 초원로를 따라 대륙을 가로질렀다. 옴스크(Omsk)에서 다시 카잔(Kazan)과 사마르(Samar) 로 갈라져 카파시안(Carpatian) 산맥 넘어 헝가리까지 유통되어졌고 일부는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Astana)로도 유통되었다. 차((茶:Cha)가 카(Ka,Kha)로도 발음되고 사 또는 샤(Sa,Sha)로도 그리고 다 또는 타(Ta, Tha)로도 발음되는 연유였다. 이런 무역로(Route of Trade)를 건설한 고구려와 발해를 거란이 낼름 집어 삼킨 거라고 왕건은 생각했다. 그 무역로는 마땅히 그들의 후손인 고려가 관리하는 것이 정의라고 고려 태조 왕건은 믿었다.
후당(後唐)을 건국한 투르크계 사타족 이존욱의 사위로 명성을 날리던 석경당이 후진(後晉)을 건국하면서 군사적 도움을 받은 댓가로 거란에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갖다 바치면서 균형은 거란에게 급속도로 기울어져 갔다. 원래 고구려와 발해가 장악하고 있던 초원로 지배권을 황소의 난으로 축적된 자본과 소그드 실크로드 상방과의 결탁으로 거머쥔 거란에게 연운십육주의 확보는 실크로드 상방의 목줄까지 움켜쥐게 해 준 행운이었다. 중국인들이 그 모진 시련에도 만리장성이라 불리우는 장성을 쌓은 건 북방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결정적 빌미를 준 모든 동양인의 적인 명나라 주원장과 주태에 의해 규모와 본말(本末)이 왜곡된 장성 수축(修築)의 목적은 사실 무역로 폐쇄를 통해 차(茶)를 강탈하기 위한 장치였다. 한마디로 관세라는 명목으로 무역상들을 갈취할 목적으로 지어진 성벽이었다. 일본에서 황해를 거쳐 중국에 전달되는 차(茶)들은 쿠로시오 해류로 인해 산동반도 아니면 발해만의 천진쪽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는데 전 세계로 팔려 나가기 위해 들어오는 일본 차(茶)들에 관세 명목으로 차(茶)를 강탈해 국부를 늘린 건 제나라의 관중이 처음이었다. 황하 하류는 건널 수 있는 강이 아니었다. 진흙이 반이상인 거대한 흙더미였기에 황하는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강이 아니었다. 산동성 동평호(东平湖)와 강소성(江蘇省) 홍택호(紅澤湖) 사이에 낙마호(駱馬湖:Luoma Lake: 宿遷市)가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은 산동반도로 들어온 일본 차들을 실은 낙타와 말들이 장안으로 가는 무역로의 요충지였다. 태산과 황하로 막힌 산동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임기시(临沂市 Línyí Shì) 북쪽의 거현(莒縣)에 동서로 높이가 한자도 안되는 나지막한 토성을 쌓아 차(茶)들을 가득 짊어진 낙타와 말들을 가로막고 차(茶)를 공짜로 내놓으라 한 것이었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설치된 자형관(紫荆關:易縣), 낭자관(娘子關: 阳泉市), 오대산과 항산산맥(恒山山脈)을 따라 설치된 평리관(平里關)과 안문관(雁門關) 그리고 여량산맥(呂梁山脈)의 편관(偏關:偏關縣) 등이 그런 관문(關門)들이었다. 그러나 거용관과 안문관은 그러나 차만을 빼앗기 위한 관문들이 아니었다. 발해만의 여러 항구들에 부려진 일본 차(茶)들이 연산 산맥(燕山山脈) 넘어 초원로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발해만으로 들어온 일본차(茶)들을 진(晉)나라 사람들이 소그드인들과 함께 장악해 운영하고 있는 하서회랑(河西回廊)과 연결된 실크 로드를 통해서만 서역으로 유통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晉人: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 진 문공의 나라. 전국시대에 위(魏),한(韓), 조(趙)로 삼분된 지역의 사람들)
산동반도와 발해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역도, 초원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역도 결국 따져보면 고려에게는 모두 이익이 나지 않는 속빈 강정이라고 생각하는 왕건이었다. 고려에게 진정 이익이 되는 무역은 항주와 명주를 갖고 있는 오월국(吳越國)과 복주와 천주를 갖고 있는 민국(閩國), 그리고 광동을 갖고 있는 남한(南漢)으로 직접 이어지는 해상무역로라고 고려 태조 왕건은 확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항로를 개척할 수 있느냐며 말도 안되는 허황한 계획에 국력을 낭비할 수 없다며 끝내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하고 결국 거란인과 진인(晉人)들, 소그드인들만 배 불려주는 기존의 무역 방식을 고집하던 궁예를 제거하던 그 때를 생각하며 고려 태조 왕건은 결단코 거란의 손을 잡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조선업과 항해술을 발전시켜 해상무역입국을 이룩하는 것만이 고려를 위한 고려사람들을 위한 만년지계라고 되뇌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 연운 십육주를 차지하여 고려를 거쳐 발해만의 여러 항구들로 들어오는 일본 차(茶)들마저 마음대로 초원로로 실크로드로 분배하며 이익을 독차지하는 거란국의 태종이 못내 역겨운 태조였다. 만부교의 교각에 거란국 태종이 보낸 50마리의 낙타를 매어 놓고 굶겨 죽임으로써 이 일을 사람들이 두고두고 회자되게 하여 고려를 위해 자신이 세운 만년대계를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 고려 태조 왕건이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목적이었다. 독자적 해상 무역로를 가진 해상무역입국. 그것이 왕건이 고려인에게 제시한 비젼이었다. 충선왕과 이제현이 왕건의 비젼을 실현하기 위해 암행한 역사는 신돈편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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