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巢氏之族 支巢氏與者人 往飮乳泉 人多泉少 讓於諸人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 乃歸而登巢 遂發飢惑而眩倒 耳嗚迷聲 呑嘗五味 卽巢欄之蔓籬萄實. 起而偸躍 此被其毒力故也. 乃降巢闊步而歌曰浩蕩兮天地 我氣兮凌駕. 是何道兮 萄實之力. 衆皆疑之支巢氏曰眞佳 諸人 奇而食之 果若其言. 於是 諸族之食萄實者多. …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포도의 힘이로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많이 먹었다,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제족이 포도를 많이 먹었다. - 박제상 부도지(符都誌) 第五章
우리 민족이 루왜은조리를 떠나 배달(倍達)의 민족이 되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더스를 거쳐 황하와 홍산에 이르는 기나긴 유랑을 하며 지금의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루왜은조리에서 자라던 차(茶) 나무들이 점차 사라져버리자 그 차나무를 통해 만들어져 공급되던 찻물(茶水)이 부족해져 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질이나 콜레라, 장티푸스같은 수인성 전염병(水因性傳染病: water-borne infection)은 한번 발생했다 하면 공동체 전체가 파괴되었기에 식수가 부족하다 해서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 발견된 것이 포도(葡萄)나무였다. 포도나무는 차(茶) 나무와 달리 잎이 아닌 열매에서 즙(汁)이 나왔고 그것으로 갈증을 해결한 사람들을 통해 오미(五味)라고 불려지며 찻물(茶水)을 대신할 수 있는 식수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포도즙(葡萄汁)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탈을 일으키지 않는 차즙(茶汁)과 달리 일부 사람들에게 심각한 질병을 야기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신약성서 요한복음 15장 1,2,5절
모든 건 기후변화에 의해 루왜은조리에서 생명의 나무(tree of life)인 차(茶) 나무들이 사라져서 생긴 일이었다. 차나무가 사라져 가자 찻잎을 우린 물이 솟아나는 샘물이 사라져 갔고 그 샘물로 생활하던 사람들은 물부족으로 고통받게 되었다. 찻잎을 우려낸 물이 아닌 다른 물을 마시면 앓다가 죽는다는 건 이미 공지의 사실이었다. 세균(germ)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마실 수 있는 샘물에 돌들을 쌓아 올려 담처럼 둘러친 후 우물이라 불렀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찻잎을 우린 물이라는 뜻이었다. 계속해서 찻물이 줄어들자 결국 마셔도 죽지는 않았던 포도즙(nectar)을 마시게 되었다. 포도나무 열매가 쌓인 곳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포도즙(葡萄汁)을 우연히 마신 사람들이 이제 포도를 으깨어 인공적으로 포도즙을 만들어 마시게 되었고 결국 찻잎이 우려진 샘물에서 길은 물처럼 그릇에 담아 보관했다가 마시게 되었다. 그중 일부 포도즙이 밀폐되어 자연 발효(醱酵)되었고 그래서 그 포도즙은 포도주(葡萄酒)가 되는 일이 발생했다. 포도주(wine)가 되어버린 포도즙(葡萄汁)을 여전히 넥타(nectar)로 알고 마신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포도주는 포도 열매를 으깨 나온 즙(汁)을 산소 없이 진행되는 자연발효가 일어나도록 밀폐해 저장하면 생기는, 에탄올(alcohol)이 최대 13%까지 포함되는 음료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이 마셨다는 음료를 넥타(nectar)라고 부른 연유였다.
포도(葡萄;grape)에 있는 탄수화물(carbohydrate)인 당(糖)이 밀폐된 상태에서 산소 없이 효모(酵母;leaven)에 의해 자연발효될 때 생기는 부산물인 에탄올(Ethanol, ethyl alcohol)은 유기산(organic acid)이기에 에탄올이 들어있는 물에는 세균(germ)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포도즙의 발효로 만들어진 물에는 세균은 없었지만 최대 13%의 에탄올이 들어 있어서 사람이 마시면 몸속에서 그 에탄올을 분해하려는 대사(代謝)가 다시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이 에탄올 분해를 위해서는 뇌에서 만들어지는 ADH(Antidiuretic hormone:항이뇨 호르몬:오줌양을 줄여주는 호르몬)가 필요했는데 이 ADH(Antidiuretic hormone)가 에탄올(알코올)을 만나 알코올을 분해하면 그 과정에서 신경독성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Acetaldehyde)가 새로 만들어졌다. 이 신경독성물질 아세트알데히드를 대사(代謝)해서 무해한 식초성분의 아세트산(Acetic acid)으로 바꿔주는 일을 하기 위해 사람 간(肝)에서 분비되는 게 알데하이드 탈수소효소(酵素;enzyme)였다. 문제는 에탄올을 섭취하면 몸에서 만들어지는 이러한 신경독성물질을 평범한 식초로 만들어주는 알데하이드 탈수소효소(aldehyde dehydrogenase, ALDH)를 간(肝)에서 분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알데하이드 탈수소효소를 간에서 분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은 포도주가 되어버린 포도즙(葡萄汁)에서 만들어진 물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졌고 많이 마시면 온몸이 빨개지면서 호흡이 가빠졌고 급기야 급성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들은 사람 몸속에 들어온 알코올을 분해해 주는 항이뇨호르몬(ADH; Antidiuretic hormone; 抗利尿)의 분비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의 발전에 따라 밝혀진 이러한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었던 Rwenzori의 마고성(麻姑城)과 실달성(實達城), 허달성(虛達城)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자 이를 오미의 변(五味之變)이라 불렀고 포도즙에서 만들어진 물(葡萄酒)을 마시면 탈이 나는 사람들은 결국 차(茶) 나무를 찾아 실달성(實達城)과 허달성(虛達城)을 떠나야 하는 배달(背達)을 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은 스스로를 배달(倍達)의 민족이라 불러 루왜은조리의 마고성과 실달성, 허달성을 돌아가야 할, 복본(復本) 해야 할 산(山)으로 잊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우리 민족 대다수가 술에 약하고 술을 마시면 얼굴이 뻘게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연유다.
차(茶) 나무를 찾아 떠난 유랑의 길이었기에 차(茶) 나무를 발견하면 정착하고 차(茶) 나무가 모자라 또다시 찻물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대다수는 다시 유랑해야 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리고 쓰린 석별(惜別)의 정(情)을 노래한 것이 아리랑이었다. 차(茶) 나무가 점점 사라져 갔기에 사람들은 차나무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희귀해져 가는 차(茶) 나무가 자라는 곳에 단(壇)을 쌓아 신단수(神壇樹)라 불렀고 그 신단수의 찻잎들에서 우려진 물을 수로를 따라 흘려보내 마을을 형성할 수 있게 해 살아 나갔다. 신단수(神壇樹)에서 채취한 찻잎을 우려낼(鬯) 물이 필요했기에 큰 개울을 끼고 있는 곳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최적의 장소로 손꼽았다. 차(茶) 나무가 더욱 희귀해지면서부터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채엽(採葉)하던 것을 금지시키고 모든 찻잎을 공동 소유로 한 뒤 각 지역의 찻잎들을 모두 한 곳으로 모았다. 한 곳으로 모인 찻잎(茶葉)들로부터 최대의 찻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안된 시설이 인도에서 링감(Lingam)이라 불린 차즙을 만드는 기구(절구)였고 그렇게 나온 찻잎의 액즙(液汁)을 많은 물에 섞일 수 있게 하는 수조(水槽)였다. 희소해진 차나무 때문에 한 곳에 모여진 찻잎은 사람들도 모이게 했고 결국 사람들은 몰려 살게 되었다. 이것이 도시와 도읍이었다. 모헨조-다로는 차즙을 만들어 내는 링감과 요니가 내부에 설치된 스투파와 대형 목욕탕(great bath)으로 잘못 알려진 수조 시설이 있는 높은 언덕 지역(都)과 사람들이 거주하고 생업을 하는 지역(市)이 함께 그러나 분리되어 존재하는 도시를 보여주고 있다.
도읍(都邑)과 도시(都市)에 쓰이는 도(都) 자는 놈 자(者) 자와 언덕을 뜻하는 우부방(⻏= 阜)으로 이루어져 있다. 놈 자(者) 자는 그러나 사람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었다. 갑골문을 보면 이파리가 뻗은 나무줄기 아래로 입구자가 그려진 이 글자는 사탕수수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즙을 받아먹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사탕수수를 뜻했었다고 네이버 한자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자는 사탕수수가 아니라 찻잎에서 우려낸 찻물을 담아내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였다.
놈자(者) 자와 언덕을 뜻하는 우부방으로 이뤄진 도(都) 자가 도읍이란 뜻 외에 웅덩이, 못(池), 모두 다, 모이다, 쌓다의 뜻을 가진 이유였다. 모든 찻잎을 다 모아 쌓아놓고 찻잎을 압착해 액즙을 만들어 큰 수조로 보내 물과 섞이게 하여 결국 압착된 찻잎에 우려진(鬯) 물을 수로를 통해 분배하는 것을 상형한 글자가 시(市)였다. 읍(邑)이란 글자는 입 구(口) 자와 꼬리 파(巴) 자로 이뤄진 글자인데 큰 수조(口, great bath, 大水槽)에 링감을 사용해 얻은 찻잎 즙과 압착된 찻잎을 우려낸(鬯) 물을 만들어 낸 후 이를 꼬리(巴) 모양처럼 마을을 빙 둘러 감싸는 여러개의 수조(水槽)를 통해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공급하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였다. 자연 경사를 이용한 구릉(丘陵) 지대를 이용해 두 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건설된 모헨조-다로는 도시(都市)라는 말을 만들어 낸 최초의 촌락이었다.
링가(Linga), 시바링가(Shiva Linga)라고도 불리는 링감(Lingam)은 남근상(phallus)이 아니었다. 링감과 함께 있는 요니(yoni) 또한 샥티(Shakti) 여신의 상징이 아니었다. 농업박물관에 한국의 유물로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옛날 돌로 만들어진 맷돌을 보면 맷돌에서 갈린 즙(汁)을 그릇에 떨어져 모이게 하도록 골이 파여 있는, 인도에서 요니(yoni)라고 불리는 것과 똑같은 홈통(漕) 장치가 선명한데 요니는 절구 역할을 하는 링감에 의해 생산된 찻잎의 액즙(液汁)을 수조(水槽)로 인도하는 홈통 역할을 하는 장치였다. 절구공이의 두께를 요니에 나있는 구멍에 쏙 들어갔다 나왔다 할 정도로만 만들면 그건 그대로 링감의 모습이었다. 결국 링감은 액즙을 만들기 위한 확(舂)이었고 절구(臼)였다. 생산된 액즙을 제대로 흐르게 하기 위해 링감에는 끊임없이 물이 부어졌었다. 지금도 인도인들이 링감에 물을 부으면서 기도하는 연유다.
차(茶) 나무가 없어져 찻잎이 모자라게 되자 차나무에서 생산되는 찻잎을 한 곳에 모아 최대한 많은 찻물을 만드는 방법이 필사적으로 탐구되었고 그중 찾아낸 한 방법이 그냥 찻잎을 물에 담가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 만들 듯 찻잎들을 압착(壓搾)해 액즙을 낸 후, 압착된 찻잎과 차즙(茶汁)을 대수조(大水槽)에 담긴 물과 섞이게 하여 더 많은 찻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여러 개의 수조를 차례로 거치게 하는 공정이 추가되었다. 링감과 요니 앞에는 항상 미로(labyrinth) 같은 수로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원심력을 높여 찻물의 흐름 속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였다.
액즙으로 흘러내려 흐름이 완만할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절구질되는 링감에는 계속적으로 그 위로 물이 부어졌고 미로로 들어선 찻잎 액즙은 미로를 돌아 나가면서 점점 흐름 속도가 빨라졌다.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산토리니와 크레테섬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는 몰타제도에는 그래서 동서로 교역되는 찻잎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결국 유럽 차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교역되는 찻잎을 보관 저장하고 갈변이 심해 더 이상 저장할 수 없는 찻잎을 압착해 찻물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일이었다. 신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석조물들은 찻잎 액즙을 내어 찻물을 만들어 내는 수조 시설들이었고 동서로 교역될 찻잎들의 보관 창고였다. 온도와 습도를 통제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지어진 신전엔 그래서 창문이 없었고 경면주사가 석벽에 칠해져 있었다. 석조물에 새겨진 소용돌이 문양은 찻잎 액즙을 수조에 보낼 때 반드시 소용돌이 모양으로 수로를 만들라는 안내였다.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들로 가득 찬 포도 확에서 포도들을 발로 으깨 즙을 내듯이 찻잎의 즙을 내는 확(절구)의 역할을 하는 링감과 링감을 통해 찧어져 압착되어 나온 차즙(茶汁)을 수조(水槽)로 연결된 소용돌이 모양의 수로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요니(yoni)를 각종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 착즙(搾汁)을 위해 여러 마을로부터 운반되어 집중보관되는 찻잎들을 도적들과 습기, 고온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벽돌로 벽을 두르고 지붕을 친, 대형 저장고(granary: 大舍)로 지은 건축물이 스투파(Stupa: 塔)였다. 스투파가 원기둥의 벽에 돔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찻잎에 가장 안 좋은 내부의 습도와 온도를 낮추는데 원형이 최고라는 기하학적 지혜 때문이었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은 찻잎을 절구질해 액즙을 만들어 수로로 내보내는 돌로 만드는 스투파 건설 기술을 보존하기 위한 건축물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짓던 당시 통일신라는 당나라의 압력으로 또다시 차(茶) 산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영국과 독일등에서 발견되는 헨지(Henge)들은 기후변화로 부족해진 찻잎들을 한 곳에 모아 압착해 찻물을 내고 이를 물이 가득 차 흐르는, 수조(水槽)와 수로역할을 함께 하는 도랑(확, ditch)으로 보내 대량의 찻물을 만들어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역에 공급하던 시설이 있었던 곳이었다. 다른 곳보다 높은 구릉에 자리한 원형의 Henge 위에 지금은 몇 개의 바위들만 열석(列石)으로 남아 서있지만 원래는 석굴암처럼 찻잎을 압착해 액즙을 내기 위해 지어진 스투파 모양의 원형 건물들이 온도와 습도를 낮추기 위해 실리카(Sio2) 암석들로 만들어져 두세개씩 서 있었다. 차나무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찻물을 만들지 못하게 되고 알콜분해효소가 없는 사람들 또한 차나무를 찾아 동쪽으로 떠나자 그 돌건물들은 허물어져 갔다. 술을 잘 마실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과 성(城)과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잘 다듬어진 스투파 건물의 돌들을 빼내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둥 역할을 하던 일부 깨진 돌들만 남아 환상열석(環狀列石)이란 이름으로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들의 원래 모습은 찻잎의 액즙을 만들어 수조와 수로 역할을 하던 디치(ditch)로 흘려 보내던 돔천장을 가진 원형의 스투파였다. 잉글랜드 솔즈베리에 있는 스톤헨지(Salisbury Plain in Wiltshire)는 헨지(Henge) 위에 건설되었던 스투파(Stupa)의 전형이었다.
돌이 많지 않았던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강변 지역에서 건축을 위해 개발된 것은 벽돌(adobe)이었다. 점토와 짚을 섞어 네모나게 압축한 후 뜨거운 태양에 말린 벽돌은 물을 가둬두는 저수지의 바닥과 벽에도 방수용인 역청과 함께 사용되었다. 벽돌을 뜻하는 한자가 지금은 벽돌 전(塼, 磚) 자를 많이 쓰지만 원래는 찻잎을 뜻하는 점 주(丶)가 들어 있는 기와 와(瓦) 자가 부수로 사용된 벽돌 벽(甓) 자를 쓴 연유였다. 포도주를 담았던 대표적 용기인 암포라처럼 차를 담는 대표적 용기인 자기(瓷器)를 기와 와(瓦) 자가 들어간 자(瓷) 자를 쓰는 연유였다. 벽돌을 의미했던 기와 다음에 발명된 것이 자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자기는 차(茶)를 담기 위해 개발된 첨단과학기술이었고 결국 이것은 벽돌이 차(茶) 때문에 발명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물과 스투파의 벽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벽돌(甓)과 달리 후일 찻물 공급 수로 건설용으로 개발된 벽돌은 세개의 수로로 펼쳐진 모습을 상형해 㼙자가 사용되었고 또한 햇볕에 말리지 않고 노천 가마의 불에 구워 더 단단하게 만들어진 벽돌은 甃자로 구별해 사용했다.
지금은 사라져 리그베다에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인더스 강 동쪽에서 같은 방향으로 흘렀던 가가하크라(Ghaggar-Hakra) 강의 하류에 없어진 강과는 달리 지금도 있는 도라비라(Dholavira)는 모헨조다로와 달리 모든 건축물을 돌로만 건설한 도시였다. 우리 민족이 암석을 돌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도시를 빙 둘러 17개나 건설한 찻물 제조를 위한 대형 수조는 물론 강을 막아 만든 댐까지도 돌로 만든 도시였다. Citadel이라고 불린 주변보다 높은 지역에 스투파를 건설하고 찻잎을 압착해 액즙을 만들어 이를 다시 거주지역을 빙 둘러 조성된 대형 수조들로 차례로 흘려 보내 대량의 찻물을 만들어 공급한 도라비라(Dholavira)는 찻물을 세개의 지역에 직접 연결된 세개의 수로로 공급한 도시 모헨조다로와는 다른 찻물 공급 방식을 구현한 마을이었다. 도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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