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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발의 진실

by 檀童稗說 2023. 12. 7.

변발(辮髮)이란 두발(頭髮)을 길게 땋아 늘인 머리 모양이다. 유목민족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도록 가늘게 비비거나 꼬아서 만드는 승(繩)처럼 땋음으로써 얻은 명칭으로 주로 북방 민족의 풍속이다. 편발(編髮), 승발(繩髮) 색두(索頭)라고도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흉노족, 탕구트족, 돌궐족, 몽골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 등 북방 기마민족들이 하던 유서 깊은 헤어 스타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동슬라브계 유목민족인 카자크 또한 성인이 되면 우크라이나어로 '추프(чуб)' 또는 '오셀레데츠(оселедець)'라는 변발을 했는데 이는 카자크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잘리게 되면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겼다. 튀르키예인의 복식에서 유독 모자가 발달한 이유 역시 변발 때문이다. 거란족은 양옆 조금만 남기고 다 밀어버렸으며, 몽골족과 튀르크인은 앞머리와 좌우 양쪽의 머리를 조금 남긴 후 귀 뒤 2갈래로 길어 늘어놓았다. 여진족, 만주족은 뒷머리의 일부만 남기고 죄다 깎아버린 후 남은 뒷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놓았다. 위구르 같은 경우 모든 남자들이 아예 스킨헤드를 기본 스타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위구르인들도 전통적으로 변발을 해서이다. (출처:나무위키)

거란인의 변발. 출처: 위키미디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펼쳐져 있는 스텝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이런 변발을 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지금까지 나온 이유를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인데 그 하나가 물 부족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물이 귀해 머리 감기가 어렵고 떡지기 쉬운 데다가 머리카락이 길면 말을 타고 달리는데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므로 변발을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전투할 때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과거 냉병기(冷兵器) 시절 전투는 두꺼운 옷 위에 쇠로 된 갑옷을 입고 역시 쇠로 된 투구까지 쓰고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이때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어 열을 빨리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었다는 것이다. 쇠로 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해야 했기에 그들이 변발을 시작했다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전형(典型)이다. 그래야 했다면 변발의 대명사인 거란족과 여진족보다 훨씬 전에 갑주(甲冑)를 갖추어 입었던 중국인들은 왜 머리카락을 그들처럼 자르지 않았는지 설명이 궁색해진다. 물이 부족했다던 그곳은 추운 날이 따뜻한 날보다 훨씬 많은 지역이었다. 그렇게 추운 곳에서 체온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머리카락을 승마(乘馬)에 거추장스럽다고 밀어버린 거라면 온갖 종류의 모자를 말을 타지 않을 때에도 한사코 쓰고 다니는 문화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진다.

제대로 된 설명이 불가능한 채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는 사건들의 대부분은 월지(月支)와 차(茶)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누구누구의 혹은 무슨 무슨 퍼즐이라고 명명된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이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 또한 월지(月支)와 차(荼)의 역사를 끝까지 덮으려는 사람들의 집요함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차나무()에서 떨어진 찻잎들이 땅에 스며들고 스며든 땅속에서 찻잎들로부터 우려진 물들이 다시 샘물로 올라와 누구나 할 것 없이 찻잎이 우려진 물들을 마실 수 있었던 그곳을 우리 선조들은 수미산(須彌山)이라고 기록했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수미산 곳곳에 있었던 차나무(木+荼)들이 대부분 죽어버리고 더 이상 찻잎이 우려진 샘물을 사람들이 모두 마시기에는 그 양이 부족해지자 수인성 전염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수미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달(月)의 산이란 뜻의 루왜은조리(Ruwenzori)라고 불려지는, 생명의 나무인 차나무(木+荼)가 있는 그 산을 떠날 때 북쪽으로 향한 사람들은 그래서 자신들을 스스로 배달족(倍達族)이라고 불렀다. 등지고 떠나다는 뜻의 배(背) 자(字)가 북녘 북(北) 자와 달 월(月) 자로 이루어진 연유였다.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다는 통달 하다, 구비하다의 뜻으로만 쓰이는 줄 알았던 달(達) 자가 실은 결단하다는 뜻이 먼저였던 글자인 연유다. 달(達) 자의 발음이 초본(草本)으로 성장한 차를 가리키는 차(茶, cha)가 아닌 목본(木本)으로 성장했을 때의 차를 일컫는 다( 木+荼, da)인 연유이기도 했다. 차(荼, cha, tu)를 다( da)라고 발음해 풀처럼 자라는 차(荼)와 나무처럼 자라는 차(木+荼)를 구별해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우리 민족밖엔 없다. 우리 스스로를 달의 산을 등지고 떠날 결단을 하고 차나무를 등지고 북쪽으로 떠났다는 뜻을 가진 배달의 민족이라고 부르는 연유다. 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차와 나무의 모습으로 있는 차가 함께 있는 땅을 라(羅, la, ra)라고 했는데 라(羅) 자에 망라하다, 포괄하다, 총괄하다의 뜻이 생긴 연유였다.


미토콘드리아 DNA와 Y 염색체 아담 같은 인류유전학의 발전에 힘입어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생겨난 근원으로 지목된 곳은 루왜은조리 산맥이 있는 아프리카 중북부였다. 인류가 지금의 인종과는 상관없이 모두 흑인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과학적 발견이었다. 물론 달의 산(月山 , Ruwenzori)에서 배달(倍達) 하기 전 이미 황궁과 청궁(靑穹), 백소(白巢)와 흑소(黑巢)로 사람들 사이에 이미 피부색의 분화가 시작되고 있었음도 우리 선조(先祖)는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흑인이 다른 인종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검은 피부색과 함께 심하게 꼬불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이었다. 흑인은 특히나 심한 곱슬머리가 많아서 머리카락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 이유는 곱슬곱슬한 머리가 말려서 자라며 두피를 찔러 쉽게 염증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고통스러운 통증을 유발하는, 악성 곱슬로 불리는 정도(程度)가 아주 심한 곱슬머리가 피부를 파고들어 염증과 통증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이 개발해 낸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가 머리카락을 물에 감고 말리면서 엄청난 빗질로 소위 뽕을 살려주는 방법, 두 번째가 아예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버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가 머리카락을 땋아 내리는 방법이었다.


흑인들이 다른 인위적인 추가 조치 없이 그대로 머리를 기를 경우 아프로 헤어(Afro Hair)라고 불리는 머리 모양이 나타나게 된다. 1970년, 28살의 나이로 죽은 20세기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되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헤어 스타일이 아프로 헤어(Afro Hair)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면 어렸을 적 TV에 나와 노래 부르던 마이클 잭슨은 아프로 헤어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미용업계에서 악성 곱슬이라고 진단하는 모질(毛質) 때문에 자르지 않고 계속 머리카락을 기를 경우 저절로 형성되는 헤어 스타일이 아프로 헤어였다. 그러나 이런 아프로 헤어는 곱슬곱슬한 머리가 말려서 자라며 두피를 찔러 염증이 유발되지 않도록 머리를 감고 말릴 때마다 엄청난 빗질로 머리의 뽕을 살려 주어야 하는 세심하고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강요하는 헤어 스타일이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인종차별 철폐 투쟁에서 아프리카라는 자신들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미국 흑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아프로 헤어는 그러나 이런 제약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현재 미국 흑인 남성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까까머리라고 하는,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깎은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거나 우리가 빡빡머리라고 부르는, 머리카락을 아예 밀어버린 스킨헤드 스타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흑인 여성들은 1980년대 미국의 유명한 배우였던 우피 골드버거가 보여 주었듯 아프로 헤어 아니면 가모(假毛)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땋는 드레드록스(dreadlocks) 헤어 스타일로 머리 모양을 관리하고 있는데 물론 일부 흑인 남자들도 가모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땋는 드레드록스로 머리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레게 가수들이 주로 하고 다녀 우리가 레게 머리라고 부르는 바로 그 헤어 스타일이다.


거란인(契丹人)과 만주 여진인이 그리고 몽골인이 보여주는 변발(辮髮)의 문화는 말을 타는데 거추장스럽고 전투하는데 불편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카락이 흑인들의 그것처럼 악성 곱슬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악성 곱슬인 머리카락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의 조상이 지금의 아프리카 우간다 서쪽 국경에 있는 달의 산(月山)이란 뜻을 가진 루왜은조리산(Mt. Ruwenzori)에서 배달(倍達)한 황궁씨(黃穹氏)의 유전자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달 월(月) 자는 중국어로 루(lu)라고 발음되고 황궁씨의 궁(穹) 자는 치옹(qiong)이라고 발음되는데 이것은 삼한(三韓)을 다스린 진왕(辰王)이 통치한 월지(月支 Lu qi) 국이 달의 산(月山)을 등지고 북쪽으로 떠난 황궁씨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란 증거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배신(背信)으로 그들의 청부용병(請負傭兵)이 된 흉노에게 쫓겨 한(漢)이란 이름마저 뺏긴 채 차(茶 cha, 다(木+荼, da)를 상품으로 만들어 가(檟 gha)라고 이름 지어 판매하기 시작한 그들 때문에 생겨난 지명(地名)인 간다라(Gandhara) 지역에 쿠샨 제국(Kushan Empire)을 세운 월지족(Tocharian, Tochara)은 삼한에 월지국으로 존재한 바로 그 사람들과 같은 민족이었다. 아프리카에 있는 달의 산을 배달할 때 이미 사람들의 피부색은 황색과 청색(靑色), 흑색과 백색으로 분화하기 시작했기에 황궁씨는 북쪽으로 청궁(靑穹)씨는 동쪽으로, 백소(白巢)씨는 서쪽, 흑소(黑巢)씨는 남쪽으로 각기 떠났던 그 사람들의 후예였다.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로 건국하기 이전 우리 민족을 가리켰던 예맥(濊貃)이라는 이름도 예(濊) 자로 대변되는 검은색에 가까운 갈인(葛人)과 맥(貃) 자로 대변되는 백인(白人)이 혼혈(混血)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흑인에서 피부색이 변하기 시작한 황인(黃人)이 어두운 갈색의 피부색을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이라는 이름도 달의 산에서 배달한 사람들이 차나무를 관리, 통제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조(朝) 자와 맥국(貃國)에서만 나는 물고기를 가리키는 선(鮮) 자를 사용함으로써 백색 피부의 맥족(貃族)이 검은색이 남아 있는 어두운 피부색(褐色)의 월지(月支)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에서 각각 검은색과 흰색이 한 몸에 함께 있는 반달곰과 황색과 검은색이 한 몸에 있는 호랑이를 환웅(桓雄)과 함께 등장시킨 연유였다. 우리 민족의 창세 신화인 부도지(符都志), 중국의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 그리고 삼국지 위서에 이미 나와 있는 사실들이다.
선(鮮)이란 물고기 이름인데 맥(貉) 국에서 나온다. 어(魚)와 전(羴)은 모두 의미 부분이며 발음 부분은 생략되었다. - 설문해자(說文解字)
진왕이 다스리는 월지국이 마한에 있다(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辰王治月支國) -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전.


삭발(削髮)과 반삭(半削) 그리고 땋는 머리로 악성 곱슬머리 문제에 대처한 거란과 여진, 몽골 사람들과는 다르게 우리 민족이 상투라는 비교적 간편한 헤어 스타일로 악성 곱슬 문제를 해결한 데에는 우리 땅이 부상국(扶桑國)이라 불렸던 차(茶)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땅과 함께 차(茶)의 땅이었던 아일랜드(Ireland)와 왜일즈(Wales)에서 기후 한랭화(寒冷化)로 기원전 2400년경부터 차(茶) 나무가 급속히 사라져 가기 시작하자 그곳에 살던 백소씨(白巢氏) 후예들이 차(茶) 나무를 찾아 동쪽 끝 부상국까지 건너오게 되었다. 차(茶) 나무가 살아 있는 곳은 이제 오직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지역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한 곱슬머리로 곤란을 겪던 거란과 여진, 몽고족들과 달리 우리 민족이 상투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머리카락 곱슬을 완화시켜 준 일등 공신들이었다. Ireland와 Wales를 차(茶)의 땅이라고 하는 이유는 수많은 Dolmen과 Stonehenge를 차치(且置)하더라도 도버 해협이나 지브로울터 해협처럼 Strait라고 표기되는 해협(海峽)을 물의 길(水道)이라는 뜻의 channel로 표기하는 아주 희귀한  곳을 세 군데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천 년 동안 차(茶)의 종주국(宗主國)이라 자처하는 중국도 차(茶) 수출항으로 사용하던 명주(明州, 지금의 寧波) 동쪽 매산도(梅山岛)와 횡도(橫島) 사이의 불도(佛渡, Fodu)채널, 국청사가 있던 태주시(台州市) 천태현(天台縣) 앞바다의 만산(滿山) 채널과 온주(溫州) 앞바다의 남수도(南水道, South channel) 그리고 복주(福州)와 천주(泉州) 사이에 있는 보전(莆田) 앞바다의 남일(南日, nanri) 채널등 오직 절강성과 복건성 단 두 지역의 해안에 네 군데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채널이었다. 아일랜드와 왜일즈(Wales) 사이의 St. George Channel, 왜일즈와 지금도 켈트어를 사용하는 콘월(Cornwall)과 데본(Devon) 사이의 Bristol Channel,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English Channel의 존재는 이곳이 범상치 않은 우리 민족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차도(茶道)라고 해야 할 Channel을 수도(水道)라고 한 것은 그 길이 차(茶)를 배로 옮기는 바닷길(항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차(茶)와 관련된 뜻을 가진 수도(水道)를 오늘날 사람들이 마시는 식수를 보급하는 체계의 명칭으로 사용한 연유는 지구라트(Ziggurat)와 모헨조다로(Mohenzo Daro)에서 사람들이 마셨던 찻물처럼 깨끗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부족해진 찻잎을 거대한 벽돌 건물 안에 설치한 확에 모두 모은 후 포도주 만드는 방법처럼 제일 높은 확에서 즙을 내 깨끗한 물이 저장된 조금 낮은 곳에 있는 확에 보내 차즙을 물과 섞이게 한 후 이 물을 널(nel 路)을 통해 건물밖으로 내보내 높이가 차등지게 설계된 구역별 우물로 중력과 위치에너지만을 이용해 차례대로 흘러 가게 해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살았던 도시를 보건 위생상 큰 문제없이 운영하게 했던 역사 때문이었다. 지구라트와 모헨조다로의 건설에 쓰인 이 창의(創意 idea)는 후일 카나트(Qanat), 카레즈(Karez), 레타라(Lettara)란 이름의 관개수로시설로 투르판과 이란, 모로코에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채널(Channel)의 cha는 차(茶)를 말하고 nel은 널, 즉 길을 말하는 것이었다. 단오절에 차(茶) 만드는 노동이 끝난 후 즐겼던 널뛰기의 그 널리 바로 이 널을 말하는 것이었다. 판판하고 몸집이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여인들이 걸어 다닐 만한 정도의 좁은 폭만을 가진 단단한 나무로 만든 이 널은 안악 3호분 같은 구조를 가진, 차(茶)를 가공하고 저장하는 시설로 진입하는 길을 일컫는 것이었고 또한 안악 3호분과 같은 구조의 공간안에서 가공한 차(茶)를 옆에 있는 저장고로 쓰이는 다른 방으로 옮길 때 사용하는 좁은 길이었다. 그 좁은 길에서 가공된 찻잎을 사고 없이 신속하게 옮기려면 예리한 균형감을 익히는 게 중요했고 따라서 널뛰기 같은 놀이는 중요한 훈련법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인류 유전학 연구 덕분에  아일랜드(Ireland)와 왜일즈(Wales)에 살면서 돌멘(Dolmen)과  스톤 헨지(Stonehenge) 같은 거석문화를 만든 사람들이 기원전 2400년경 완전히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는 연구 결과는 예맥과 조선, 우리의 고인돌 같은 돌문명 형성 역사에 결정적인 해석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혼혈에 의해 한결 곱슬이 완화된 머리카락을 갖게 된 우리 민족이 간다라 불상에 나타난 머리모양과 똑같은 상투로 모발문제를 해결한 것은 이 역시 간다라의 쿠샨제국과 마한의 월지국 그리고 가라(伽羅, 迦羅, 加羅 )라고도 불린 가야(伽倻, 伽耶, 加耶 ) 국과의 상관관계를 어렵지 않게 연결해 생각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부하게 온 머리카락이 풍선처럼 일어선 아프로 헤어(Afro hair)가 나뭇가지들에 걸리는 바람에 찻잎(茶葉)을 따기 위해 초목이 우거진 산속을 다닐 때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우리 선조들이 마련한 대책은 불교 사찰에 지금도 전해지는 고깔모자였다. 유럽인들이 프리기아 모자(Phrysian Cap)라고 부르는 것과 개념을 같이하는 고깔모자는 신라 금령총에서 출토된 말잔등에 올린 동복(銅鍑)으로 유명한 기마인물토기상(騎馬人物土器像)에서 보이는 모자와 비슷하고 그리고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Yohannes Vermeer)가 남긴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라는 그림에 나온 전통 네덜란드 모자(Dutch Cap)와 흡사한 모양이다.


묵돌(冒頓) 선우(單于)가 지도하는 흉노에 짓밟힌 동호(東胡)는 원래 지금의 섬서성 천수 시(天水市)를 한양(漢陽)으로 부르며 동서무역을 독점했던 월지국의 영역이었다. 호(胡)란 글자는 옛날(古) 월(月) 지라는 뜻이고 동(東)이란 글자는 흉노에 의해 영토 중앙부를 뺏겨 동서(東西)로 분리된 월지(月支) 국 중 동쪽에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그리스(Greece)라는 나라를 한자로는 희랍(希臘)이라고 쓴다. Greece의 음역어(音譯語)라고 세상이 이미 모두 다 아는 希臘을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희랍이라고 읽지 않는다. 실라(Xila)라고 읽는다. 한자(漢字)는 중국인들이 처음 만든 글이 아니었다. 漢이라는 글자를 월지(月支)로부터 가져온 것은 이미 설명한 터. 그래서 그들은 그 글들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그 글들을 만들며 처음에 했던 발음들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다. 그 후 한자(漢字)를 자신들의 글로 만들 정도로 익숙해진 후 중국인들은 월지인들이 만든 글자보다 더 많은 글자들을 만들어 냈고 그래서 그들이 만든 글자들에 대해서는 발음도 자신들이 모두 정했지만 그러나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글자들에 대해서는 처음 있던 소리 그대로 발음했다. 실라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신라(新羅)다.


고막해(庫莫奚)라고 기록된 해(奚)족이 있었다. 당나라가 건재하던 시절 키타이(Khitai)라고 불리던 거란(契丹)의 서남부 국경에 해(奚)족의 나라가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찻잎과 삼한의 찻잎이 한반도에서 가공되어 초원로(草原路)로 올라가는 지금의 조양(朝陽) 지역에 거란이 있었다면 실크로드로 올려지기 위해 장가구(張家口)로 가는 길목에 있는 열하(熱河)라 불렸던 지금의 승덕(承德)지역에 해족이 있었다. 그 해(奚)족의 머리카락은 심한 곱슬이 아니기에 상투를 틀 수 있었고 그래서 멀리서도 금방 식별할 수 있었다. 해족의 해(奚) 자의 갑골문은 머리카락을 땋아 상투처럼 머리 위에 올린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삼한(三韓)에 상투를 튼 그런 해(奚)족이 들어왔을 때 월지국 왕인 진왕(辰王)에 의해 다스려지던 삼한 사람들은 번예(樊穢) 군장(君長) 바로 밑에 살해(殺奚)라는 군장을 설치해 대처했다. 번예(樊穢)가 글자 그대로 예(濊, 穢)족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군장인 것처럼 살해(殺奚)는 해족을 죽이는 일을 맡은 군장(君長)이었다. 그런 역사 후 살아남아 백색 피부의 해족이 검은 피부의 월지족과 함께 살게 된 곳이 바로 사로(斯盧)였다. 사로(斯盧)의 사(斯) 자는 희다. 하얗다는 뜻이었고 노(盧)는 월(月) 자와 같은 루(lu) 발음으로 검다는 뜻이었다. 사로(斯盧)는 백인인 해족이 검은 피부의 예족과 함께 6부를 이루며 살던 곳이었다.

출처: 네이버 한자사전


삼국유사에서 밝혔듯 박혁거세는 백마가 낳은 알에서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로 나왔다. 사로국(斯盧國)에서 거서간이 되어 성곽을 완성한 후 금성(金城)이라 칭한 것도 오행의 하나인 금(金)이 오방색 중 백색을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월성(月城)과 대비(對比)된 금성(金城)은 자신들이 백인이라는 것을 남긴 기록이었다. 그러나 석탈해(昔脫解)는 깜깜한 밤과 거무스름한 저녁을 뜻하는 석(昔)이라는 성씨(姓氏)가 알려주듯, 그의 등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숯(炭)이 상징하듯, 심한 곱슬머리를 가진 검은 계열의 피부색을 가진 갈인(葛人)이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반반인 까치는 석탈해가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었다. 석탈해가 박혁거세의 손녀인 남해 차차웅의 딸과 결혼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석탈해는 금성이 아닌 후에 월성이 되는 왜(Yue)인 호공의 집을 차지했다. 박혁거세와 알영 왕비의 불가사의한 최후는 그의 아들 남해 차차웅의 탈해에 대한 두려움을 극도에 달하게 했다. 수수께끼 같았던 신라 왕족의 성골과 진골, 그리고 갈문왕(葛文王)의 존재는 어두운 피부색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흑백 혼혈 왕가의 어쩔 수 없는 정체성 보존의 고육지책이었다.

승무로 지켜진 고깔모자 출처: 중앙일보


백색 피부를 가진 왕족을 성골(聖骨), 갈색 피부를 가진 왕족을 진골(眞骨)로 삼은 내물왕 이후의 신라 왕가는 그러나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라 하더라도 피부색이 다른 경우가 많이 있었다. 신라의 왕위는 백색 피부를 가진 왕족만이 계승할 수 있었다. 아들이 아닌 동생과 육촌 조카에게 큰 저항 없이 왕위가 인계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백회의(和白會議)는 백색 피부의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당시 동아시아는 백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혼재해 살아가고 있었다. 요사(遼史) 세표(世表)에는 선비족(鮮卑族)이 오호십육국 시절 모용황(慕容皝)의 공격으로 거란과 고막해 그리고 우문 씨(宇文氏)로 갈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갈라져 나온 우문 씨(宇文氏)는 후일 서위(西魏)와 북주(北周)를 건국하는 중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런 서위와 북주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周書)에는 우문선비의 선조가 갈오토(葛烏菟)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우문 선비족이 갈색, 흑색 그리고 백색 피부를 가진 세 피부색의 사람들이 함께 혼재되어 만든 세력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갈오토(葛烏菟)의 오(烏)는 까마귀로 흑색 피부의 사람들을 토(菟)는 토끼로 백색피부의 사람들을 그리고 갈(葛)은 칡으로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나타낸 것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초상화에서 갈인(葛人)의 피부색을 확인할 수 있고 명나라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의 초상화에서 오인(烏人)의 피부색을 확인할 수 있는 소이가 여기에 있었다.

정화에게 마지막 7번째 항해를 명령한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 출처:위키미디어


팔십만 대군을 비수(淝水)에서 동진(東晉)의 사안(謝安)에게 제물로 바치며 스러진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符堅)이 석 씨(昔氏) 왕조를 마감하고 김 씨 왕조를 연 신라 내물왕이 파견한 사신 위두(衛頭)와 나눈 대화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부견이 계림(鷄林)을 어찌하여 신라(新羅)라 하는가 물었다. 계(鷄)의 상서로움이 있기에 계림이라 한다. 라(蘿)를 새롭게 하기에 신라라 한다 했다. 부견이 듣자 하니 너희 나라 왕의 성씨가 변했다는데 어찌 된 일이냐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인을 택하여 서로 전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어 온 일이라 결코 변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계림과 신라는 비록 글자는 다르지만 실은 말이 서로 같다 했다(五年 金蛇 七月 衛頭等自奏回獻金人玉馬等宝器 初帝命衛頭七人送苻良等七人于秦 秦主苻堅問 鷄林何爲新羅 答曰 有鷄之瑞故曰鷄林 有蘿之新故曰新羅 苻堅曰 聞爾國君變何如 答曰 我國擇賢相傳 自古然也 非變也 故鷄林新羅字雖不同 而語實相同) - 신라사초 <내물대성신제기>  

P.S. 해(奚)족이 데리고 온 새를 계(鷄)라 했다. 닭이다. 해(奚)족이 가져온 찰현악기(擦絃樂器)를 해금(奚琴)이라 했다. 백마(白馬)의 울음이 울려퍼진 우물 계정(蘿井, 雞井)에서 박혁거세가 나타났고 부인 알영(閼英)은 계룡(鷄龍)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했다. 석탈해가 이사금으로 있던 시절,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는 흰닭(白鷄)의 울음이 울려퍼진 계림(鷄林)에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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