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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과 사둔

by 檀童稗說 2023. 12. 22.

    

사돈(査頓)
남녀 두 사람의 혼인으로 발생하는 인척관계(姻戚關係) 또는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상대편의 친척을 일컫는 친족 호칭…우리나라의 부계(父系)친족제도에서도 이런 집단적인 측면이 특히 강조되어 자녀의 혼인은 곧 어느 가문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혼인이 당사자 두 사람의 결합 이상의 것으로, 한 가문과 다른 가문간의 결합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대 국어에서의 ‘사돈’은 16세기부터 나타나서 현재까지 이어진다. ‘사돈’의 어원(語源)은 정확하지 않은데, 19세기에는 한자어로 ‘사돈(査頓)’을 표기한 문헌이 있으나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1. 혼인한 두 집안의 부모들 사이 또는 그 집안의 같은 항렬이 되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상대편을 이르는 말. 2.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 또는 혼인 관계로 척분(戚分)이 있는 사람…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좁은 의미의 사돈은 1번의 의미 중에서도 혼인한 두 집안의 부모들 사이를 가리킨다. - 나무위키


지금은 사돈(査頓)을 사둔(査屯)이라고 하면 틀린 것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학교라는 곳을 들어가서 맞춤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 후 사둔은 사돈으로 읽어야 했으나 그러나 집안 어른들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은 그때 여전히 사둔으로 말하고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생겨 났는지 알아내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둔은 비표준어가 되어 부주와 삼춘으로 흔히 발음되는 부조(扶助)와 삼촌(三寸) 과 똑같은 부류로 묶여져 취급되고 있었다. 게다가 사돈(査頓)은 부조, 삼촌과는 다르게 우리 나라에서만 쓰이는 단순한 한자 취음어(漢字取音語)로 간주되어 버렸다. 너무 오래 걸려 부질없겠으나 사둔이 결코 사돈이 아님을 밝혀본다.

소금은 구하려면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찻잎은 그렇지 못했다. 소금은 사고 파는 물건으로 일치감치 거래(去來)되었으나 찻잎은 그럴 수 없는 귀(貴)한 것이었다. 웨일스(Wales)와 콘월(Cornwall) 그리고 스코트(Scot)와 아일랜드(Ireland)에서 차(茶) 나무가 사라져 차(茶) 나무를 찾아 유랑에 나선 사람들이 동쪽 끝 땅까지 들어왔을 때 그 모습들을 본 동쪽 끝 땅사람들은 차(茶) 나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2011년 부산 가덕도에서 발견된 유럽형 유전자를 가진 고대인(古代人)들의 유골(遺骨)들은 차(茶) 나무를 찾아 동쪽 끝까지 흘러온 그들의 처절한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천금(千金)을 주고라도 찻잎을 대량(大量)으로 구매(購買)해야만 했던 그들에게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렇게 팔지 않았다. 찻잎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 생산된 찻잎을 그저 중개하고 중계해 주는 역할을 통해 부를 축적한 중국인들이었다. 기후변화로 인해 시베리아가 영구동토층(永久凍土層)이 되기 전인 역사 초기엔 초원로(草原路 Steppe Route)를 통해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중개되고 무역되었던 찻잎이었다. 스키타이인들이 찻잎 무역을 담당하던 시절에는 금과 은이 찻잎 거래의 결제(決濟) 수단이었다. 고가(高價)인 금(金)과 은(銀)이 결제 수단이었기에 대량(大量)의 찻잎이 거래(去來)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Poklov에서 발견된 Kurgan 왕의 금장식. 삼단중 가운데단에는 6개와 10개의 꽃잎을 가진 차꽃이 일창이기의 찻잎과 헨지(henge)와 함께 선명히 묘사되어 있다.


기후변화로 초원로가 얼어붙자 무역로(貿易路) 통제권은 스키타이인들에게서 중국인들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에서만 공급되는 찻잎을 무역하는 대상(대상:Caravan)들이 얼어 붙은 초원로를 피해 교역로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 자기 땅 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쉬운 돈벌이에 백분 이용했다. 찻잎 무역을 자신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래하지 못하게 독점했다. 그들이 찻잎 무역을 독점한 방법은 간단했다. 스키타이인(Scythians)들이 찻잎을 대량으로 거래하기 위해 개발한 결제 수단인 금화(金貨)나 은화(銀貨)를 사용하는 화제도(貨制度) 자체를 시행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금화와 은화로 결제하는 화제도(貨制度) 대신 찻잎 거래 결제 수단으로 강권한 것은 비단으로 결제하는 폐제도(幣制度) 였다. 이유는 명료(明瞭)했다. 비단(緋緞)은 당시 중국만이 생산하는 독점(獨占) 상품이었다. 찻잎이 한국과 일본의 독점(獨占) 상품이었다면 비단은 중국인들의 독점상품이었다. 금은(金銀) 대신에 비단으로만 찻잎 거래를 결제하게 했다. 살기 위해 반드시 찻잎을 사야 했던 서역인들은 가져온 금은(金銀)으로 비단을 비싸게 산 후 그 비단으로만 찻잎을 살 수 있었다. 화(貨)에 비단(幣)이 얹어져 화폐(貨幣)라는 말이 생겨난 연유였다.

오직 중국에만 있었던 누에와 뽕나무잎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뭍으로만 무역을 할 수밖에 없던 시절 중국이 자신이 만든 물건이 아니라 일본이 찻잎을 생산하고 한국이 완제품으로 만들어 낸 차(茶)를 가지고 세계를 벗겨 먹었던 역사였다. 재주는 곰이 피우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말이 나온 연유였다. 곰은 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물이고 21일간의 고행을 통해 여인이 되어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은 존재다. 후일 눈덩이처럼 불어난 무역 거래 확대의 압박에 중국인들이 겨우 양보한 것이 대량의 단일 거래가 역시 불가능한 동화(銅貨)만 쓰게 하는 동전(銅錢) 제도였다. 정부의 통제와 관리에서 벗어난 거래를 처음부터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일년 동안 사용할 찻잎을 거래하기 위해 그들은 엄청난 양의 동전을 금과 은을 주고 사야만 했다. 동전 주조와 판매를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은 대동강 물 팔아 동전 챙긴 봉이 김선달이 따라 오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부르는 장벽도 북방의 유목민족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 쌓아 올린 것이 아니었다.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차(茶)로 만들어져 들어오는 찻잎들과 다른 화물들을 잔뜩 실은 낙타와 말은 낮은 높이로 쌓아 올린 흙담조차 뛰어 넘지 못했고 캐러반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장난 같은 흙담에 뚫어놓은 무슨 무슨 관(關)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門)들을 통과하면서 통행세를 납부해야만 했다. 관세(關稅)라는 말이 생겨난 연유였다. 이후 북방에 건설되기 시작한 장성들은 캐러반들이 중국 영토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대상(隊商)들의 중국 국경 바깥으로의 월경(越境)을 막는 장애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장성(長城) 때문에 중국 영토 안으로 침략해 들어오지 못한 북방 유목 민족은 유사 이래 없었다.

진시황이 주조하여 통일중국 전역에 강제로 통용시킨 동전 반량전. 출처: 나무위키


금화(金貨)와 은화(銀貨)의 교환 비율 차이에 따른 환차손(換差損) 때문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가 그리스의 아테네를 침공하는 통화전쟁(通貨戰爭)이 발발한 게 기원전 490년일 정도로 그들은 찻잎 수입을 위해 고액 주화(鑄貨)를 발행하고 기축통화(基軸通貨)를 자기들이 발행하는 금(金)으로 은(銀)으로 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진시황(秦始皇) 이래 중국의 통일 왕조(王朝)들이 금광(金鑛)과 은광(銀鑛)의 개발을 철저히 막고 동전(銅錢) 주조(鑄造)만을 고집한 연유였다. 서역인들이 찻잎을 사기 위해 중국에서 동전을 사려면 형편없는 교환 비율로 금과 은을 주어야 했고 그 동전으로는 예상한 만큼 찻잎을 살 수도 없었다. 터무니없는 약탈이었고 착취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벌 전쟁은 그래서 야기(惹起)된 것이었다. 차(茶)나무가 사라져 대량의 차(茶)거래를 해야만 했던 서역인들은 그런 대량(大量)의 차거래(茶去來)를 가능하게 해주는 고액(高額)의 신용(信用)을 창출해 내는 금은화(金銀貨) 제도를 발달시켜야 했고 그래서 금광(金鑛)과 은광(銀鑛)의 개발은 빨랐고 발전은 심화(深化)된 연유였다. 유럽인들이 땅을 파서 소금을 캐내는 연유였다. 할슈타인의 소금 광산(鑛山)은 금광과 은광을 찾으며 발견한 암염(巖鹽)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금(金)과 은(銀)으로 통화(通貨) 제도를 구축한 것은 비단(緋緞) 때문이 아니라 찻잎(茶葉) 때문이었다. 찻잎(茶葉) 부족으로 인해 그들의 눈빛은 핏빛이 되어 갔다.

알렉산더 대왕이 중국에 의해 저질러진 유라시아 차무역의 불공정성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던 스키타이의 옛 영역 지도. 트라키아는 스키타이의 영토였다. 출처:위키미디어


동일한 선조(先祖)를 가진 가문(家門) 중심의 마을은 처음엔 당연히 촌락(村落)이었고 그래서 씨족(clan) 사회였다. 보통 몰락이 예정되어 있는 근친상간을 피하고자 족외혼(族外婚)을 통해 아들은 남아 있게 했고 딸들은 떠나보냈다. 우리 민족의 선조들이 택한 길이었다. 아들 가진 집안에서 족외혼으로 다른 씨족의 딸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신부집으로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보내야 했는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신랑의 생년월일시라는 사주를 적어 보내는 간지(簡紙)가 아니었다. 정혼(定婚)을 한 뒤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신랑의 사주를 적어서 보내는 간지는 5번 또는 7번을 접어 봉투에 넣는데 이때 이 봉투(封套)는 자체로 밀봉을 하지 않고 나무에 끼워 밀봉을 대신했다. 봉투를 끼운 나무의 양쪽 끝을 청실 홍실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감고 끝매듭은 동심결로 맺은, 사주를 적은 간지를 넣은 봉투를 끼울 수 있게 가운데를 쪼갠 나무는 차(茶)나무 가지였다. 단자(單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오직 그 아들만을 위한 차(茶)나무 가지였다. 신랑이 앞으로 신부와 함께 만들 새로운 가족을 위해 신랑 집안에서 그의 몫으로 할당한 차(茶)나무의 가지에서 잘라 온 일부를 보내는 거였다. 그 가지만 보면 딸을 가진 집안은 항차 자신의 딸이 어떤 수준의 찻잎을 관리하게 될지 가늠할 수 있었다. 기후변화로 차(茶)나무가 사라지고 우리 민족의 차산업(茶産業)을 한사코 죽이려는 실크로드 상방의 획책에 밀려 차산업(茶産業)의 기억마저 모두 사라진 후 사주단자(四柱單子)에 사용된 가지는 수숫대나 싸리대, 대나무였다. 왜 수숫대나 싸리대 같은 걸 쪼개서 사주(四柱)를 적은 간지(簡紙)를 담은 봉투를 끼웠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은 그래서 원통하다.

차나무 가지를 사주를 적은 간지와 함께 보내 사주단자라 일컬어지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2022년 제1회 경남 고성군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 입상작인 사주단자.


동일한 조상을 가진 씨족으로 이루어진 촌락이 여러 씨족들로 이루어진 부락(部落)이 된 건 기후변화에 따른 차(茶)나무의 급감(急減) 때문이었다. 차(茶)나무가 줄어들자 찻잎에 대한 절도와 약탈이 빈번해지고 악랄해져 갔다. 돌탑으로 소유권을 표지(標識)했음에도 자행되는 절도를 막기 위해 대책(對策) 중 하나로 강구된 것이 혼인제도를 통해 인척(姻戚)이 된 사둔(査屯)과의 연합이었다. 이 연합(聯合)은 곧 연맹(聯盟)이 되었고 자기 씨족의 차(茶)나무들을 다른 씨족들의 절도와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해 결국 싸움으로 귀결될 파국에 대비한 진영(陣營) 구축으로 나타났다. 자식들을 결혼시킨 두 집안을 사둔(査屯)이라고 부르는 연유였다. 딸을 시집보낸 가족 입장에서도 그 차(茶)나무 때문만은 아니지만 중요한 물적 토대인 차(茶)나무에서 나오는 찻잎들을 다른 사람들이 약탈해 간다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두 집안은 서로의 차(茶)나무들을 지키기 위해 뭉치게 되었다. 찻잎이 없으면 설사병에 걸려 죽는 시대였다. 그런 찻잎이 모자라 절도와 약탈을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고 순순히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언제나 마지막은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싸우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군대라고 하고 그 군대에는 연대(聯隊), 사단(師團), 군단(軍團)등 여러 이름들이 있지만 총칭으로는 부대(部隊)라고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촌락은 이제 주로 사둔(査屯)들로 이루어진 여러 씨족이 모여 각 집안의 차(茶)나무들을 지키기 위해 전투를 함께 하는 부락(部落)이 되었다.

생명의 나무인 차나무 앞에서 진을 치며 지키고 있는 세 명의 스키타이 전사들. 차나무에 걸어 둔 방패가 뚜렷하다. 출처:위키미디어


  중국인들은 우리가 사둔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친가(亲家)라고 한다. 자식들의 결혼을 통해 인척(姻戚)이 된 관계를 사둔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뿐이다. 그도 그럴것이 중국엔 함께 지킬 차(茶) 나무가 없었다. 차(茶)나무는 부상국(扶桑國)이라 부르는 땅에서만 생장하는 신령스런 나무였다. 진시황의 불로초 소동은 서복을 시켜 부상국에서 몰래 가져온 차나무들의 이식 사업이 실패한 것을 감추려 자행한 역사 왜곡이었다. 사둔과 사돈의 혼선은 모든 발음을 한자로 표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단순한 한자 취음(取音)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적으로 존재했었기에 그 유산으로 남겨진 언어들을 그 역사를 망각한 후손들이 제멋대로 재단(裁斷)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둔이 아니라 사돈이라고 해야 한다지만 우리 민족이 만든 역사는 사돈(査頓)이 아니라 사둔(査屯)이다. 차(茶)나무를 발견하면 그 나무가 누구의 것인지 밝히기 위해 비석처럼 돌탑을 쌓아 사(査)자가 생겼고 그래서 그 이후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 하는 일을 조사(調査)라 하고 수사(搜査)라 했다. 비석(且)으로 차(茶)나무의 소유권을 표지(標識)한 이후로 뭔가를 자세히 생각하고 답을 찾는 것을 고사(考查)라 했다. 1990년대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치뤄야 했던 시험을 연합고사와 학력고사(考查)라고 했던 연유다. 그렇게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차(茶)나무를 지키기 위해 무리를 이루는 것, 진(陣)을 치는 것이 사둔(査屯)이었다. 같은 씨족이 함께 무리를 이루어 차나무를 지키기 위해 군진(軍陣)을 치는 것은 따로 이름 붙일 필요가 없는 당연한 일, 씨족은 다르지만 결혼으로 인척이 된 사람들이 차나무 앞에 소유자를 밝힌 비석(돌탑) 주위로 함께 진(陣)을 치고 싸웠기에 붙여진 이름이 사둔(査屯)이었다. 둔(屯)은 진(陣) 칠 둔자다.

의병장 김면(金沔)이 합천군수 배설(裵楔)에게 부상현(扶桑峴)에 복병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차단 요청했다는 기록에서 증명되는 부상국. 출처:고려대도서관


우리 민족이 겹사둔을 기꺼워 하지 않고 달가워 하지 않은 연유였다. 동맹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대표적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이었다. 그래서 겹사둔은 지양해야 할 공동체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였다. 겹사둔을 집안의 체모가 깍이는 일로서 삼가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는 문화가 깊숙하게 뿌리박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1990년대 한국사 교과서 참고서에 사돈이란 말은 査頓이며 그 뜻은 나무 등거리에 앉아 머리 조아리며 술 마시자 이고, 그 유래는 고려시대 여진정벌과 동북9성 으로 이름난 윤관과 그의 부장인 오연총(1055~1116)의 일화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실렸었다. 그 후 2004년 4월 8일 북한의 주간신문이라는 통일신보에도 “중국에서 친가(親家)라고 하는 사돈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고유한 말“이라고 하면서 ”사돈이라는 말은 고려시기 두 장군이 녀진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 맺어진 우정으로부터 생겨났다.” 며 똑같은 유래를 소개했다. 고려시기 장군인 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이 서로 자기의 자녀를 결혼시켰다. 두 사람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로가 술 생각이 나서 윤관은 술병을 들고 오연총의 집으로 찾아 나섰고 마침 오연총 역시 술병을 들고 윤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밤사이에 시내물이 불어 서로 건너갈 수 없었다. 이때 윤관이 묘안을 내 이렇게 제안했다. “내가 대감께 술을 권하면 대감은 갖고 계신 술을 내 술로 생각하며 한잔 하고 대감이 내게 술을 권하면 내 술을 대감의 술로 생각하며 한잔 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나무 등걸에 앉아 한사람이 술잔을 권하면 다른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고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나무 등걸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술을 마시는 관계라는 의미로 ‘덩걸 사(査)’, ‘조아릴 돈(頓)’을 써서 ‘사돈’(査頓)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통일신보는 한 걸음 더 나서서 등걸은 큰 나무를 벤 밑둥이 인데 ‘덩걸 사’는 등걸이 발음상 변화된 것으로서 ‘사’는 나무 등걸이라는 뜻이고 ‘돈’은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까지 하고 있었다.

의병장 김면(金沔)이 합천군수 배설(裵楔)에게 부상현(扶桑峴)에 복병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차단 요청했다는 기록에서 증명되는 부상국. 출처:고려대도서관

도대체 저러는 이유를 당췌 알 수가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밝힌 사둔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글을 전재한다.

“우리나라의 부계친족제도에서도 이런 집단적인 측면이 특히 강조되어 자녀의 혼인은 곧 어느 가문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혼인이 당사자 두 사람의 결합 이상의 것으로, 한 가문과 다른 가문간의 결합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돈간’이라는 생각이 마치 상대방을 ‘우리 편 또는 내 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쉽게 해주고, 금방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사돈관계를 조심스럽고 불편한 관계로 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쌍방간에 긴밀한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그것이 사돈관계로 연결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돈관계가 맺어지고 나서는 그것이 기존의 관계를 더욱 다지게 함으로써 양자간의 관계가 유지, 존속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인간관계를 더욱 다지고 보장해 주는 안전판 구실을 하게 된다는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현대에서도 쉽게 관찰되고 있다. 특히 재벌들 상호간에, 또는 재벌과 정치인, 고급관료간의 사돈관계는 단순히 자녀들의 혼인으로 발생하는 관계만은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특권계층의 사람들간에 접촉의 빈도가 높은 데서 나온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돈관계 그 자체가 사회계층의 안전장치의 하나라는 점도 분명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과 함께 사돈 관계가 중요시되는 것은 결국 혼인을 당사자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이들이 소속하고 있는 집단의 문제로 간주하는 데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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