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 馬韓在西…辰王治月支國…其人性強勇 魁頭露紒 如炅兵.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번한'이다.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그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고,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창모양:중국 서안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토용병사들의 상투모습)과 같다.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 飲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항상 오월 씨뿌릴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 지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밤낮없이 쉴 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데, 손과 발이 서로 응한다. 마디마다 아뢰는 사람이 있어, 탁무와 비슷함이 있다. 시월 농사가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하는데 귀신을 믿는 것이다. 국읍에는 각각 천신에 제사 지내는 주인을 하나 세우는데, 이름하여 천군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나라엔 각각 특별한 읍이 하나 있는데, 이를 소도(蘇塗)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부린다. 여럿이서 그 가운데로 도망하면 이에 돌아오지 못한다. 도둑이 일어나기에 좋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비슷한테 그 행해진 바의 선악은 달랐다. -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가 사마중달의 서진(西晉)으로 바뀐 시절, 진수(陳壽)가 기원후 190년부터 265년 까지의 시대를 조사해 기록한 삼국지(三國志)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뒤이은 동양 역사상 세번째로 편찬된 역사서였다. 그 사서에는 동아시아에 있었던 여러 나라의 역사와 이모저모를 기록한 글들을 위지(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이란 제목으로 정리해 싣고 있었다.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에 대한 글을 끝내고 書稱東漸於海 西被於流沙. 其九服之制 可得而言也.(서경에서 말하길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항상 변하는 사막에 접한다.'라고 하니, 이는 그 구복의 제도를 얻음을 말한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와 고구려, 동옥저와 읍루, 예(濊)와 한(韓,) 그리고 왜와 서융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그 중 한(韓)은 인용된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을 포함하면 진수(陳壽)로부터 가장 많은 서술(敍述)을 받은 나라인데 그 속에 소도(蘇塗)에 대한 설명이 부도(浮屠)와 함께 기술되어 있었다. 혹여 범죄자들이 숨어들더라도 잡으러 들어갈 수 없었다던, 성역으로 모든 이들에게 보호받았다던 소도였다. 그리고 구복지제(九服之制)가 기술되고 있었다.
도시(都市)와 도읍(都邑)은 찻잎들을 절구로 압착해 찻잎의 액즙(液汁)을 내고 그 액즙들을 수조(水槽)에 담긴 물에 풀어 대량의 희석(稀釋)된 찻물을 만든 후 그 찻물을 수도(水道) 체계로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가능했던 지역을 특정 지어 나타낸 말이었다. 도시(都市)와 도읍(都邑)을 나타낼 때 공통으로 들어가는 도(都) 자에 모이다, 쌓다, 저축하다, 연못(池), 웅덩이 같은 뜻이 있는 이유였다. 도(都) 자는 찻잎의 액즙을 내는 시설들이 언덕(⻏= 阜)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나타낸 글자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그리고 인더스의 모헨조-다로와 유럽의 헨지가 건설된 것은 모두 기원전 4100년부터 기원전 2700년까지 인류를 괴롭힌 소빙하기 때문이었다. 소빙하기 시대에 희소해져만 가는 찻잎들에게서 최대한 찻물을 확보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만들어진 것들이 지구라트와 스투파와 헨지였다. Eartnscience.com에서 만년 동안의 지구 기후변화 역사를 그래프로 묘사한 것을 보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신라 박제상이 쓴 증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誌)에 묘사된, 오미의 사변(五味之變 )으로 실낙원(失樂園) 해야 했던 배달(倍達)도 추워진 기후 변화 때문이란 걸 이 그래프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추워진 기후변화로 차나무들이 점차 사라져 가자 오랫동안 정들었던 땅을 떠나 또다시 차나무를 찾아 유랑의 길에 나서야 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사람들이 부족해지는 찻물을 확보해 살던 땅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힘을 합쳐 벌인 필사적 노력의 결과가 피라미드와 지구라트, 그리고 모헨조-다로였고 도라비라(Dholavira)와 헨지(Henge)였다.
지구라트와 모헨조-다로는 벽돌을 사용해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고 도라비라(Dholavira)와 헨지(Henge)는 돌을 사용해 유랑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 인더스 강의 모헨조-다로는 사람들에게 수도와 우물로 직접 찻물을 제공하는 시(市)였고 가가하크라강(Ghaggar-hakra River)의 도라비라(Dholavira)는 마을 전체를 빙 둘러 17개의 못(池:ditch)을 수조처럼 설치해 찻물을 공급하는 읍(邑)이었다. 시(市)는 원래 펴다, 베풀다의 뜻을 가져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푼다는 보시 보자로 쓰이는 포(布) 자가 변형된 글자였다. 모헨조-다로의 유적을 공중 촬영한 사진을 보면 스투파와 대형 수조가 있는 언덕(citadel) 지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장사하는 지역으로 수도(水道)를 통해 찻물을 공급하는 모습이 베풀 포(布) 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도(水道)와 우물로 찻물을 공급하느냐 아니면 수조(水槽) 역할을 하는 못(ditch:해자)으로 찻물을 공급하느냐가 도시와 도읍을 구별하는 기준이었다. 모헨조-다로같이 수로로 찻물을 공급하는 체계를 가진 도시(都市)를 건설할 때 사용한 벽돌을 다른 벽돌(甓)과 구분하기 위해 㼙자가 따로 만들어진 연유였다.
당나라 시대 다신(茶神)이라 불렸던 육우(陸羽)가 쓴 다경(茶經)에서 茶라는 글자를 사용하면서부터 茶자로 통일된 차를 뜻하는 글자는 그러나 여러가지가 있었다. 모헨조-다로(daro)에서 사용된 다(荼)와 도라비라(Dholavira)에서 사용된 도( 木 + 荼), 그리고 가가하크라(Ghaggar-hakra)강변의 가네리와타(Ganweriwata)에서 사용된 가(檟)가 그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지불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가격(價格)은 어떤 차나무(檟)의 가지(格)에서 나온 찻잎이냐에 따라 그 값이 다르게 셈해지던 고래의 찻잎 거래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다.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인들은 차(茶)를 샤 또는 셔라고 발음해 설(蔎)자가 만들어져 차를 뜻하게 되었다. 찻잎이라고 하는 것이 알콜 분해 효소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관건이었고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 수인성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했던 차나무와 찻잎은 따라서 사람들에게 엄청난 지배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었다.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과 메소포타미아의 수많은 점토 부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차나무와 찻잎 그리고 차꽃은 그걸 증명해 주는 유적들이었다. 크레타섬과 테라섬의 석조 유적은 고대 와인 양조장 모습과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벽돌 유적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찻물 제조 공장이었다.
신라의 토우(土偶)와 그 문화의 궤를 같이 하는 토기 인형들이 발굴되어 관심을 끈 모헨조-다로의 남동쪽, 인더스와 가가하크라 강 사이에 있는 차누다로(Chanhudaro)에서는 차(茶)를 차[cha]라고 발음했다. 스키타이인들은 차를 샤[sha]라고 불렀고 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운 칼데아인(Chaldean)들은 차(茶)를 카[ka]라고 불렀다. 거대한 화산 폭발 전까지 에게해 차(茶) 교역의 중심지였던 테라섬(island of Thera (Santorini)에서는 차를 테[the]라고 불렀다. 이 모든 지역에서 차나무는 생명의 나무였고 그 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는 찻잎은 그래서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결정적 증거였다. 그런 찻잎을 덩굴로 연결해 어깨와 허리춤에 옷처럼 착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찻잎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존경과 복종을 가져왔다. 찻잎을 꽂을 수 있는 띠를 두르는 것도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크노소스(Knossos) 궁전의 백합 왕자(prince of lilies)라는 제목의 벽화를 보면 왕자는 머리띠와 두 개의 목띠, 손목띠 그리고 허리띠를 하고 있다. 같은 궁전에 그려진 미노안 여인들(Three minoan Women )을 보면 머리띠와 목띠, 손목띠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벽화에 그려진 항아리들을 들고 있는 남녀들은 팔뚝띠나 손목띠만 하고 있고 많은 찻잎을 안정적으로 꽂아 휴대할 수 있는 목 띠나 머리띠는 없다. 솔거가 꿈에 본 단군을 그렸다는 단군 영정에는 나뭇잎을 어깨와 허리에 촘촘히 두르고 있는 단군이 있었다. 백합왕자 벽화와 단군 영정에 그려진 건 백합도 나뭇잎도 아닌 찻잎이었다.
주위보다 18m나 높은 언덕에 벽돌(㼙)로 스투파와 대형 수조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인더스강변의 하라파나 모헨조-다로 같은 도시들과 높은 언덕에 돌들로 찻물 제조 시설을 건설했던 테라(Thera) 섬과 크레테섬과는 달리 언덕이 하나도 없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평원에서는 찻물을 공급하려면 인공적인 고층 건물이 필요했다. 지구라트가 메소포타미아에서 건설된 연유였다. 지구라트 역시 돌이 없는 지역 사정상 벽돌(㼙)로 지어졌고 멀리까지 찻물을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운동에너지를 맞추기 위해 큰 위치에너지가 요구되었고 그것에 따라 높고 웅장한 지구라트가 건설되었다. 성경 속 바벨탑은 하느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높게 건설된 것이 아니라 차나무가 계속 죽어가는 소빙하기에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계속 살아보려는 인간들의 애달픈 노력 때문에 높아져 간 것이었다. 더 높은 곳에서 만들어 아래로 흘려보내는 찻물은 더 멀리까지 흘러갈 수 있었고 그 찻물이 흘러가는 곳까지는 그래도 사람들이 유랑에 나서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었다. 찻물을 마실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 유랑하지 않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찻물만 확보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계속 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그 혹독하고도 위험한 지구라트 건설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계단식으로 건설한 건 지금처럼 크레인 같은 대형동력기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노력에도 기후변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차나무를 모두 거두어버렸다. 바빌로니아의 경이(驚異: wonder)로 알려진 공중 정원도 바그다드에 찻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눈물겨운 또 다른 모습의 지구라트였다.
도읍(都邑)과 도시(都市)와 유사한 글자로 경(京)이란 글자가 있는데 이는 링감을 이용해 찻잎을 착즙(搾汁)해 우려낸 물을 큰 수조(口, great bath, 大水槽)에 모은 후 세 갈래로 분출하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다. 경(京)이란 글자의 하단부에 있는 小는 무역을 통해 확보한 찻잎들의 저장고로도 사용한 지구라트(ziggurat)의 기단부(基壇部)에 중앙과 좌우에 설치된 세 갈래 계단으로 되어있는 수로(水路)를 상형한 글자다. 경(京) 자에 곳간, 큰 창고라는 뜻을 가진 연유다. 경(京) 자의 상단부는 바벨탑 같은 경우 기단부(基壇部) 위에 층층이 올라간 8층의, 지구라트의 찻물 제조 시설들을 상형하고 있었다. 결국 수로로 찻물을 공급받는 도시(都市)들 가운데 기단부가 세 갈래 계단 수로를 가진 지구라트(Ziggurat)가 건설된 곳을 경(京)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찻물 제조 시설인 지구라트 건설법을 기억시키기 위한 건축물이었다. 다른 사찰들의 탑들이 쌍탑일 경우 동일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특이하게도 불국사의 두 탑은 완전히 다른 모양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두 탑이 각각 지구라트의 기단부와 그 위에 지어진 건물들 그리고 지구라트 최상층부의 찻물 제조부와 계단 수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석가탑은 네모난 기단부(基壇部)와 그 위에 위치에너지를 얻기 위해 계단식으로 층층이 올라간 사각형 건물들을 보여주기 위해 건축된 탑이었다. 다보탑은 바벨탑에 검은 부분으로 나타나 있는 정상부의 건물들을 묘사하는데 그것은 링감과 요니가 설치되어 찻잎을 찧어 액즙으로 만들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흘려보내는 건축법을 기억시키기 위해서였다. 석가탑에는 없는 다보탑의 동서남북 네 면의 계단들은 찻물을 계단을 통해 아래로 흘러내려주던 지구라트의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 다보탑에 이슈타르 문(Ishtar Gate)에 새겨져 있는 사자가 돌로 만들어져 계단들을 지키고 앉아 있는 연유였다. 탑(塔)이란 글자에 풀 초(艹) 자가 있는 연유였다. 탑이란 글자 자체가 여러 층으로 지은 높이 솟은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기에 탑은 스투파처럼 결국 지구라트(Ziggurat)도 상형한 글자였다. 지구라트의 어원 또한 아카드어로 zaqāru로 높이 세워 올린 탑이라는 의미였다.
이미 지어놓은 지구라트가 너무 낮아 찻물을 더 멀리 공급하지 못할 때 더 크고 더 높은 지구라트를 기존의 지구라트 위에 새로 건설하는 경우가 있었다. 바벨탑이었다. 이 지구라트를 표현하기 위해 생겨난 글자가 높을 고(高) 자였다. 바빌루의 지구라트라는 바벨탑을 뜻하는 경(京) 자에는 소(小) 자 위에 입 구(口) 자가 있는데 이는 기반부 위에 지어진 상층 건물부를 나타내고 있다. 이 입 구(口) 자가 고(高) 자에서는 글자의 맨 밑에 또 하나가 있어 기반(基盤)이란 의미로 쓰였다. 즉 고(高) 자는 기존의 바벨탑을 기반으로 사용해 그 위에 더 크고 더 높이 지어진 지구라트라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궁을 발굴한 독일 고고학자 콜레바르가 당시 확인한 바벨탑이 있던 터전에 대한 이후의 정밀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은 또 다른 더 작은 지구라트 두 개가 차례로 터전 밑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반부에 세 개의 계단 수로(小)를 가진 지구라트를 상형한 글자가 경(京) 자였고 작아진 지구라트를 토대 삼아 그 위에 더 크고 높은 지구라트를 건설한 것을 상형한 글자가 고(高) 자였다. 그런 고(高) 자를 국호에 사용한 나라는 탁리국이라 불렸던 고리와 고구려, 그리고 고려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찻물을 수로로 공급한 큰 마을을 도시(都市)라 했는데 그중 세 개의 계단 수로가 있는 지구라트가 건설된 곳을 경(京)이라 한 것이다. 우리 민족 역사 그 자체인 생명의 나무에서 시작하는 차산업(茶產業)을 실크로드 상방의 사주를 받은 당나라의 협박으로 또다시 포기하기로 결정한 통일신라 경덕왕 시절 찻잎 저장고(茶貯藏庫) 건설 기술이 집약된 석굴암(石窟庵)과 함께 지어진 불국사에 지구라트의 계단과 비슷한 계단들이 건축된 연유였고 지구라트 겉모습과 흡사해 지구라트 본체를 기억하게 해주는 석가탑(釋迦塔)과 찻물 제조 및 공급 방법을 기억하게 하는 다보탑(多寶塔)이 불국사 경내에 세워진 건 그래서였다.
높은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멀리까지 찻물을 공급할 수 있는 운동에너지를 얻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고 건설한 지구라트에서 찻물을 손실 없이 흘려 내려보내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계단이었다. 지구라트에 설치된 계단은 일반 계단과 달리 높이가 아주 낮은 것이 특징이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져 발생하는 엄청난 운동에너지로 수로를 벗어나 낭비되는 찻물이 생기는 것을 원천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낮은 계단들로 이루어진 계단수로였다. 공중정원으로 일본인이 잘못 번역한 hanging gardens가 매달린 정원이라고 기록된 것은 계단으로 찻물을 흘려보내던 방법이 막을 수 없었던 조그마한 찻물 손실도 없애기 위해 찻물을 담쟁이덩굴 같은 덩굴식물들을 타고 흘러 내려가게 했기 때문이었다.
공중정원(hanging gardens)과 바벨탑을 건설한 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드 2 세왕은 차[cha]라고 발음되는 茶를 카[ka]라고 발음해 스스로를 찰디언이라 하지 않고 칼데아인(chaldean)이라 불러 후일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황제를 뜻하게 되는 프랑스어 샤를(Charles)이 영어로는 찰스(Charles)가 되고 독일어로는 카를(Carl)이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Carlos), 라틴어로는 카로루스(Carolus)로 발음되게 한 원인을 만든 왕이었다. 이후로 차[cha]는 카 또는 샤로 발음되어 무려 세 개의 발음이 존재하는 철자가 되어버렸다. 지구라트와 바벨탑과 모헨조다로와 스톤헨지는 네부카드네자드 같은 지배자의 권력을 뽐내기 위해 아니면 제국의 금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하늘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를 신들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것도 아니었다. 지상에 있는 인간들을 어여삐 여기고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선전되는 신이라면 애당초 그런 인간들의 터무니없는 희생을 충성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기 싫은, 님비곰비 정을 나누어 온 혈육 같은 이웃들과 헤어지기 싫어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달라붙어 건설한 건축물들이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경이롭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그저 눈물 나도록 인간적이다. 그런 건축물들을 신도 아닌 죽어버린 지배자의 무덤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그런 인간성에 대한 폄훼(貶毁)다.
낮은 구릉과 산지가 평야와 함께 잘 발달되어 있는 유럽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같은 높은 건축물이 건설될 필요는 없었다. 점토가 많고 돌이 없었던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점토보다 돌이 많았던 유럽은 기후변화로 희귀해진 차나무를 현명하게 활용하여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 유랑하지 않기 위해서 헨지(Henge)를 건설했다. 다른 지역보다 높이 솟은(raised) 구릉에 환호(環濠)라는 동그란 모양의 수로(ditch)를 파고 주변 하천의 물을 끌어들여 수로(ditch)에 물을 채워 그것을 찻잎을 압착해 액즙을 만들어 흘려보내는 찻물 제조를 위한 대형 수조로 사용했다. 환호의 입구 반대쪽에는 물이 빠져나가는 출구를 만들어 주변 지역 사람들이 찻물을 가질 수 있도록 찻물을 흘려보냈다. 환호로 둘러싸인 동그란 모양의 가운데 땅에는 모헨조-다로의 스투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이 돌로 지어졌다. 지금은 열석(列石)으로만 서있는 돌들은 찻잎을 압착해 액즙을 만들어 환호로 흘려보내던 스투파 같은 건물들의 기둥으로 쓰였던 것들 중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돌들이었다.
유명한 영국의 스톤 헨지는 모헨조-다로에서 찻물을 만들어 시가지로 흘려보내고 찻잎을 저장하던 스투파 같은 역할을 하던 시설이었다. 기후변화로 차(茶) 나무가 완전히 사라진 후 그래서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이 그곳을 떠난 후 그 지역에 새로 들어온, 포도주를 마셔도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헨지에 있던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들을 가져다 자신들의 집과 성과 울타리를 짓는데 썼다. 브리스톨(Bristol) 채널(channel)과 잉글리시(English) 채널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차(茶) 나무를 찾아 모두 동쪽으로 떠나고 빈 그 자리에 들어온 알데하이드 탈수소효소(酵素;enzyme)가 충분한 사람들은 그 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마구 갖다 썼다. 어디에 사용해도 손색없는 참으로 멋지게 다듬어진 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셔 항상 취해 있던 그들에게 그 돌들이 어떤 돌들이었는지 가늠해 볼 여유는 애당초 없었다.
辨九服之邦國, 方千里曰王畿, 其外方五百里侯服, 又其外方五百里曰甸服, 又其外方五百里曰男服, 又其外方五百里曰采服, 又其外方五百里曰衛服, 又其外方五百里曰蠻服, 又其外方五百里曰夷服, 又其外方五百里曰鎭服, 又其外方五百里曰藩服. 구복의 방국이란 왕도(王都)의 1,000리(里) 외방을 왕기(王畿)라 하고, 그 주위를 500리씩 구획하여 후복(侯服), 전복(甸服·경기), 남복(男服), 채복(采服), 위복(衛服), 만복(蠻服), 이복(夷服) 진복(鎭服), 번복(藩服)이라 하여 설치한 것을 말한다. - 주례(周禮)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
구복지제(九服之制)란 중국 고대에 왕기(王畿)의 외부를 둘러싸 보호하는 9개의 지역을 설정한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 신단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찻잎을 우려낸 물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최대한의 영역을 산정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였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인식에 의해 아홉 개의 네모들로 묘사된 구복제는 그러나 사실 은 바벨탑 위에서 또는 장군총 같은 계단식 피라미드 꼭대기 상공에서 수직으로 아래를 조망했을 때 나온 모습을 옮겨놓은 것이었다. 신단수의 찻잎을 얻기 위해 달려가야 했던 거리를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단수를 기준으로 네모가 아닌 원형으로 구역이 설정되어야 했다. 게다가 구복제도는 배산임수를 기준으로 마을을 이뤘던 우리나라에서는 가능한 제도가 아니었고 너른 평야지대에서나 시행이 가능했던 제도였다. 결국 구복제도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생명의 나무 잎(찻잎)에 대한 공평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원칙의 공표였고 생명의 나뭇잎의 가공시설이 세워져 분배하는 곳에 대한 기준을 공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차나무를 찾아 대륙을 유랑해 온 사람들 사이에 질서(秩序)를 세우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정(公正)이었다. 기계적인 평등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기여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차등을 서로가 인정하는 차등 있는 평등이었다. 차등 있는 평등에 승복할 수 있는 공정을 획득하고 유지하지 못한 공동체는 가차 없이 해체되었다. 누구도 지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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