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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담판은 실패한 외교다

by 檀童稗說 2023. 3. 2.

993년 10월, 요나라 성종(聖宗)은 소손녕(蕭遜寧)에게 80만의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략하게 했다. 서희의 담판으로 유명해진 거란의 1차 고려 침입이었다.  그 해 4월, 주요 무역로의 지배권을 놓고 요나라와 패권을 다투고 있던 송나라에 큰 반란이 일어났는데 장소는 송나라 국부의 원천인 차(茶)가 재배되는 사천(四川)지역이었다. 사천(쓰촨)지역에서의 반란은 언제나 그렇듯이 차(茶) 공물량(貢物量)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도 팽산현령 제원진이라는 지방관리의 과도한 수탈로 촉발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일본에서 들어오던 차(茶)의 수입량이 오랫동안 급감되어 야기된 일이었다. 일본 차(茶)를 들여와 가공한 후 전 세계로 수출해 재정의 상당부분을 충당하고 있던 송나라가 충분한 물량의 일본 차(茶)를 오랫동안 수입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재정수입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차(茶)는 그래서 전략물자였고 그 차(茶)를 경작하는 사천지역의 백성들은 언제나 과도한 공물을 할당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3년간이나 계속된 내전같은 것이 그동안 없었던 이유는 일본에서 공급되는 차들 때문에 사천지역에 할당되는 공물량이 인내할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한 건 후당의 석경당이 거란에게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헌납하면서부터였다.

일본에서 차(茶)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양 무역로를 이용해야 했는데 차(茶)를 해양으로 수송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자기(porcelain)들을 확보해야 했다. 습기로부터 차(茶)를 완벽히 분리하고 일정한 경도(硬度)를 가져 흔들림이 많은 해양수송중에도 쉽게 깨지지 않는 자기(porcelain) 확보가 선결 과제였다. 자기(瓷器)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태토와 유약은 고령토(高嶺石)로 만들어져야 했는데 고령토는 거란에 할양된 연운십육주중 연경(북경) 북쪽 고북구진(古北口鎭) 서남단에 있는 고령진(高嶺鎭)에 묻혀 있었다. 경도와 생산비에서 청자보다 월등한 백자(white porcelain)를 구워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고령토(kaoline)는 차(茶) 무역때문에 차(茶)만큼이나 중요한 전략물자가 되었다. 송나라가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 수복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린 이유였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차(茶)들이 바다를 통해 운반되는 중에 담았던 자기(瓷器)들이 깨지고 습기에 노출되어 버려지는 양들이 많아지게 되고 동해를 통해 일본차(茶)를 가공무역(加工貿易)하던 송화강(松花江),목단강(牧丹江)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마저 986년에 거란에게 멸망당하자 사천(쓰촨)지역에 할당되는 공물량은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에서 송나라로 수출되는 차(茶)는 국제무역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송나라와 요나라 모두에게 승패의 관건(關鍵)이 되는 절대반지였다. 요나라 성종(聖宗)은 동해 바닷길을 통해 고려로 수입되는 일본 차(茶)를 주목했다. 당시 고려는 울릉도(鬱陵島)를 기항(寄港)해 동해 연안 포구들로 들어오는 일본 ()들을 서경(평양)과 개경(개성)으로 운반해와 가공(加工)한 후 산동 반도와 주산 군도로 수출하고 서경을 통해 북방으로도 수출하는 차()산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소손녕(蕭遜寧)의 80만 대군은 고려에게 송나라로의 차() 수출을 하지 말라고 군사적 침략까지 감행한 것이었다. 고려에 성종(成宗)이 즉위하기 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고려의 일본 차() 가공무역이 거란에게 심각한 현안(懸案)으로 등장하게 된 건 983년 지방 행정조직으로 설치된 12목(牧) 때문이었다. 일본 차()들이 수입되어 운송되는 주요 집산지에만 설치된 12목(牧)에는 조정(중앙정부)에서 파견되어 조정(朝廷)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관원들이 불교 종파(宗派)별로 행해져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이루어지던 일본 차() 무역을 일거에 체계화시켰다. 12목(牧)에 설치된 지방 관아에 의해 일본 차()를 수입가공한 후 수출하는 산업은 고려 조정이 직접 관장하는 국가산업이 되어 그 양과 질이 대폭 증강되었다. 고려가 수출하는 일본 차()의 양은 점점 증가해 갔고 993년에 이르러서는 거란이 묵과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한중일 국제해상무역로 출처: 윤명철 교수의 우리역사지도

결국 서희의 담판으로 일본 차()를 들여와 가공한 후 산동 반도와 주산 군도로 수출하고 동시에 서경을 거쳐 여진족에게도 수출하던 고려의 차() 국책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993년 거란에게 받은 강동6주 영토확장은 결국 산동 반도와 주산 군도로의 차()수출로 경제를 유지하던 서경과 개경의 경제 붕괴와 맞바꾼 꼴이 되었다.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 조정은 송나라와 여진족에로의 차() 수출을 금지했고 이 금수조치는 해를 거듭하면서 고려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서경은 경제기반이 붕괴되었고 파주와 연천지역으로 이뤄진 당시 적성현(積城縣)의 경제는 파멸되어 버렸다. 산동 반도와 주산군도로 수출되는 일본의 차()들이 동해 포구들로부터 집산되어 가공되어졌던 적성현은 그런 경제적 번영 때문에 치열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었고 그래서 각 세력이 축조한 성(城)들이 너무 많아 겹겹이 쌓일 정도다 해서 이름도 적성현(積城縣) 이라 붙여진 곳이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의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 현종이 개성을 버리고 몽진에 나섰을 때 적성현의 백성들이 고려 왕 현종에게 화살을 쏜 이유였다.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말은 지금도 힘차다. 王者以民爲天而民以食爲天.

울릉도를 기항, 동해 포구들을 통해 들어온 일본 차(茶)가 적성현에 집산되는 경로(지도: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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