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홍색·자색·백색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오자 왕이 그림에 등장하는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면서 씨를 정원에 심도록 명했거니와 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初唐太校勘 宗送畫牧丹三色紅·紫·白以其實三升. 王見畫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待其開落果如其言.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에게 어떻게 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 여쭈니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내가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라고 했다.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畫花而無蝶知其無香斯, 乃唐帝欺寡人之無耦也.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편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백성이 왕의 딸 덕만(德曼)을 세우니, 그가 선덕 여왕(善德女王)이다. 처음에 당(唐)나라 황제가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보내와서 진평왕(眞平王)이 덕만에게 보여 주었더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꽃이 매우 예쁘지만 그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향기가 없는 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더니 과연 그러하였고, 우리나라[東國]의 모란꽃이 이때부터 많아지기 시작했다. -동국역사 권 1(삼국기(三國記)
박제상(朴堤上) 선생이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아들 백결선생(百結先生)에게 구술(口述)해 남긴 역사서 증심록(證心錄)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만년(萬年)에 가까운데 그런 만년(萬年)의 우리 민족 역사상 여왕(女王)이 나라를 다스린 건 신라(新羅)가 유일했다. 그것도 세분이나 여왕이 나와 다스렸으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세 분 중 진덕여왕(眞德女王)과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사실 여러 면에서 최초(最初)의 여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에 비해 그 중요도와 지명도(指名度)에서 현격(懸隔)한 차이를 보인다. 그건 아마 우리 민족이 선덕여왕과 함께 극복(克服)하려고 모든 애를 썼던 민족사적 위기(危機)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졌다 하더라도 함께 피 흘리며 버틴 싸움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불멸(不滅)의 역사(歷史)가 된다.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이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수(隨) 양제(煬帝)를 암살하고 당(唐)나라를 건국한 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연(李淵)은 수(隨) 양제(煬帝)의 이종사촌 형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깬 건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이 자신의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마저 협박해 황제가 된 일이었다.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으로 기록된 이 정변(政變)을 모든 사람들이 경악(驚愕)으로 받아들일 때 앞서 있었던 여러 사건들과 당 태종의 집권(執權)이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들인지를 꿰뚫는 사람이 있었다. 17살에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왕(王)으로 산 지 50년이 넘은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이었다.
632년 당나라 황제 태종이 신라왕 진평왕에게 홍(紅) 자(紫) 백(白) 세 가지 색(色)의 모란꽃 그림과 함께 그 모란 씨들을 보내왔다. 먼 훗날 고려의 대신(大臣) 김부식(金富軾) 은 그렇게만 썼다. 그러나 고려의 승려(僧侶) 일연(一然)은 기이(奇異) 한 일이라며 중언부언 썼다. 630년 당 태종은 동돌궐(東突厥)을 멸망시키고 초원로(草原路)라 불리던 무역로(貿易路)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실크 로드라 불리던 무역로 (貿易路)의 지배권은 이미 당 태종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칸과 황제를 한 몸에 가진 역사는 그가 처음이었다. 땅 위에 세워져 있던 모든 무역로(貿易路)를 한꺼번에 장악한 그가 이제 바다를 누비는 신라왕에게 그림을 보내온 것이었다. 그림이 당도한 건 이찬(伊湌) 칠숙(柒宿)이 아찬(阿飡) 석품(石品)과 함께 일으키려 한 반란(叛亂) 모의(謀議)에 대해 조정의 이인자였던 칠숙(柒宿)을 동시(東市) 저잣거리에서 참수(斬首)하고 그의 구족(九族)을 연좌제(連坐制)로 절멸(絶滅)시킨 일명 칠숙 석품의 반란사건을 진압(鎭壓)한 직후였다.
진평왕(眞平王)은 할아버지 진흥왕(眞興王)이 죽고 작은 아버지 진지왕(眞智王)이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얼마 안가 쫓겨나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은 그때처럼 또다시 지독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고 있었다. 578년 진지왕(眞智王)은 남조(南朝)의 진(陳)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 신라에서 가공 처리한 일본 차(茶)를 바치며 일본 차(茶) 중계무역을 확대할 것을 요청했었다.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실크 로드 무역 상방(貿易商坊)들에게 난도질 당한 이후 폐쇄되었던 일본 차(茶) 중계무역(中繼貿易)을 재개(再開)하려는 신라의 시도였다. 그런 제안(提案)을 한 지 일 년이 못돼 진지왕은 왕위에서 쫓겨났고 신라의 왕위(王位)는 18살이 채 안된 동륜태자(銅輪太子)의 아들인 진평왕에게로 넘겨졌었다. 남조의 진(陳)나라가 실크 로드 무역상방(貿易商坊)들의 지원을 받은 수(隨) 양제(煬帝)에게 짓밟히고 수양제(隨煬帝)가 대운하(大運河) 건설 이후 해상무역 진흥에 나서는 배신(背信)으로 실크 로드 무역상방(貿易商坊)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도(目睹)한 진평왕이었다.
진평왕(眞平王)은 올게 왔다고 생각했다. 당 태종이 세 점의 모란도(牧丹圖)를 보내오기 직전, 일본 차(茶)를 수입해 가공한 후 수출하는 차(茶) 중계무역(中繼貿易)을 중단해야 한다는 상소(上疏)가 올라왔다. 그럴 수 없다는 진평왕에게 이찬(伊湌) 칠숙(柒宿)과 아찬(阿飡) 석품(石品)이 반란 모의로 진평왕의 부상국(扶桑國:일본)과의 동맹 고수(固守) 정책에 대한 귀족(貴族)들의 반대를 표면화했다. 신라 17 관등(官等) 중 두 번째 서열(序列)인 이찬(伊湌)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이루어진 신라 귀족들의 여론을 전달하는 자리였고 여섯 번째 서열인 아찬(阿飡)은 지방관(地方官) 이상의 고위 관료(高位 官僚)들의 여론(與論)을 대표(代表)하는 관직(官職)이었다. 신라 지배층(支配層)을 이루고 있는 성골(聖骨) 진골(眞骨)과 6두품(六頭品)들이 일본(日本)과의 동맹(同盟)을 파기(破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진평왕은 객부(客府)가 있는 동시(東市)에서 칠숙(柒宿)과 그의 구족(九族)을 목 베어버림으로써 일본 차(茶)의 안정적 공급을 전 세계 상인들에게 특히 민감하게 주시하는 파사국(婆娑國) 상인들에게 행동으로 약속했다. 객부(客府)에 머무르는 상인들의 유일한 목적은 신라가 만든 차(茶)를 원하는 만큼 사가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본에서 차(茶)가 충분히 수입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코흘리개 밖에 없었다. 백제로 도망갔던 석품(石品)이 잡혔다는 보고가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당 태종의 그림이 바다를 건너온 거였다.
당 태종이 보내온 세 점의 모란도(牡丹圖)는 태종의 의도(意圖)를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목단(牧丹)이라고 한자로 쓰여지는 모란(牡丹)은 차(茶) 나무와 찻잎을 뜻하는 오래된 암호였다. 목(牧)이라는 글자는 소 우(牛)와 칠 복(攵)이 결합된 글자인데 인간과 처음부터 함께였다는 소(牛)를 강조하는 글자였다. 소(牛)의 제일 가는 장점은 차(茶)나무를 잘 찾는다는 것이었다. 찻잎을 제일 좋아해서 찻잎 냄새(香)를 기억해 어디서든 차(茶)나무를 찾아내는 소(牛)는 그래서 인간에게 특별한 존중을 받게 되었다. 이름에 찻잎을 뜻하는 점 주(丶)가 있는 개(犬)나 돼지(猪)도 차(茶)나무를 잘 찾았으나 그러나 그들은 찾아낸 차(茶)나무에 달려들어 나무 밑 땅을 파헤쳐 차나무의 뿌리를 손상시키는 저주(咀呪)받을 짓을 저지르는 짐승(獸)들이었다. 인도(India) 사람들이 소를 숭상(崇尙)하는 건 그들이 그들에게 차(茶)나무 있는 곳을 알려주어 생명을 이어가게 해 준 은공(恩功)때문이었다. 단(丹)이란 삼면이 돌로 둘러싸인 고인돌(dolmen) 안에서 찻잎(茶葉)을 가공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였다. 해가 지면 찻잎들은 고인돌 안에 두고 출입문으로 쓰는 돌을 닫아 보호했다. 결국 모란도(牧丹圖)는 차(茶)나무와 찻잎 가공을 의미하는 그림이었다.
홍(紅) 자(紫) 백(白) 세 가지 색깔의 모란(牧丹)은 일본에서 나는 찻잎을 수입 가공해 수출하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상징했다. 그중 자(紫) 색의 모란(牡丹)이 백제를 의미했다. 백(白) 색의 모란(牧丹)은 고구려를, 홍(紅) 색의 모란(牡丹)은 신라를 의미했다. 진평왕(眞平王)의 큰 딸 덕만(德曼)은 무슨 의미인가를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정확히 답했다. 당 태종은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가 차(茶) 무역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茶)를 의미하는 모란꽃에 상인(商人)들을 뜻하는 벌과 나비가 꼬이지 않는 건 무역로(貿易路)를 막아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찻잎(茶葉)을 가공 생산해도 팔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진평왕(眞平王)이 다시 물었다. 어찌하겠느냐?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내겠습니다. 덕만(德曼)은 얼마 안 있어 죽은 아버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왕이 되었다. 최초의 여왕(女王)이었다. 여왕의 곁에는 동생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 김춘추(金春秋)가 있었다. 춘추가 곁에 두고 있는 김유신(金庾信)이 있었다.
첨성대(瞻星臺)를 지어 동짓날(冬至)을 정확히 가려내도록 했다. 동짓날을 정확히 가려내야 동짓날 이후 140번째 해돋이가 청명(4월 5일)이 되고 그 후 20번째 해돋이가 곡우(4월 20일)라는 걸 틀림없이 계산해 언제 찻잎을 따야 하는지 일본에 가있는 사신(使臣)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진평왕이 이미 583년부터 설치해 운영해 온 선부서(船府署)에 명령해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기간 동안 채엽(菜葉)되는 많은 차(茶)를 한꺼번에 실을 수 있는 튼튼한 선박들을 더 많이 조선(造船)토록 해 일본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에 만전을 기하게 했다. 선부서(船府署)에서 개발한 평저선(平底船)은 조수(潮水) 간만(干滿)이 커서 뻘(갯벌)이 많은 신라의 해안(海岸)을 모두 천혜(天惠)의 항구(港口)들로 만든 걸작(傑作)이었다.
부왕(父王)인 진평왕이 584년 선부서(船府署)에 이어 설치한 승부(乘府)에 명령해 가공이 끝난 일본 차(茶)를 신속히 실직주(悉直州:동해 삼척)와 하슬라주(何瑟羅州=명주溟州:강릉)로 수송할 수 있도록 수레(車)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지금의 동해항(東海港)과 강릉항(江陵港)을 떠난 배들이 울릉도(鬱陵島)를 거쳐 연해주의 혼춘(琿春:Hunchun)으로 입항해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하(Buerha: 포미합통하)를 통해 목단강(牡丹江:Mudanjiang)으로 연결되었다. 목단강(牡丹江)은 송하강(松花江) 하류와 합해져 흑수(黑水)로 흘러갔다. 흑수(黑水:Amur Riber) 이북으로 차(茶)를 수출하는 해상 무역로(海上貿易路)가 개척되었던 것이다. 계절풍(季節風)과 해류(海流)때문에 봄에만 출항(出航)할 수 있는 차(茶) 수출선(輸出船)들은 일본에서의 차(茶) 채엽(菜葉) 시기와 겹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제때에 떠날 수 있었다.
어려운 항해를 마치고 북서풍 부는 겨울에 돌아오는 배들을 위해 황룡사(皇龍寺)에 목탑(木塔)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645년 당 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눈알이 뽑힐 때 완공된 85미터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은 개운포(開雲浦) 같은 동해안의 항구들에 훌륭한 등대(燈臺)의 역할을 해냈다. 신속한 차(茶) 가공을 위해 그리고 여왕의 차(茶) 산업을 유지하겠다는 강건한 의지를 선포하기 위해 당 태종이 향기(香氣) 없는 모란(牧丹) 그림을 보낸 2년 후인 634년에 분황사(芬皇寺)가 창건되었다. 이세민이 없다던 향기(香氣)가 여기 있다며 분황사(芬皇寺)는 그렇게 당 태종을 조롱(嘲弄)하듯 세워졌다.
632년에 즉위한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唐) 태종이 죽기 2년 전인 647년에 죽었다. 당(唐)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해 죽어가는 와중에도 신라에서 차(茶)의 향기를 없애기 위해 비담(毗曇)을 646년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였다. 상대등(上大等)으로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이끌던 비담(毗曇)은 당나라에 신라 사신으로 가서 당(唐) 태종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해야 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본 차(茶) 중계무역을 파괴시키겠다는. 그 약속을 이루는 것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당(唐) 태종(太宗)은 아홉째 아들 위진왕(魏晉王) 이치(李治)에게 진상(晉商)과 소그드 상방(商坊) 대표들 앞에서 의식(儀式)까지 올리게 한다. 그런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 626년부터 황태자였던 이승건(李承乾)과 넷째 아들 복왕(濮王) 이태(李邰)가 희생(犧牲)되었다. 신라로 돌아온 비담(毗曇)은 칠숙(柒宿) 이후 또다시 강력하게 일본 차(茶) 중계무역(中繼貿易)의 폐지를 주장했다. 심상치 않은 신라의 움직임에 일본 또한 그해 가을(646년 9월), 사신(使臣) 타카무코도 쿠로마로(高向玄理)를 신라에 보내 정확한 신라의 입장을 확인(確認)하고자 했다. 일본 차(茶) 수입을 흔들림 없이 계속하겠다는 선덕여왕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국서(國書)를 들고 일본 사신(使臣)은 귀국했다. 결국 비담(毗曇)은 일본 사신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된 선덕여왕의 중계무역 고수(固守) 결정을 듣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결국 반란의 와중(渦中)에 선덕여왕은 죽었고 반란이 가까스로 진압(鎭壓)되자 김춘추는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 선덕여왕의 중계무역 고수(固守) 정책이 철회(撤回)되었음을 통보했다. 통보받은 일본은 김춘추를 억류(抑留)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일본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우토쿠 천황편엔 김춘추의 솔직한 차(茶) 수입중지(輸入中止) 통보에 대한 일본인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었다. ‘김춘추는 용모(容貌)와 얼굴이 아름답고 이야기를 잘했다’ 그때가 647년이었다. 다음 해인 648년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데리고 함께 당나라 장안(長安)을 방문해 일본 차(茶) 중계무역을 중지(中止)했음을 알리고 당 태종에게서 군사동맹(軍事同盟)을 이끌어 냈다. 643년에 장안(長安)을 방문해 군사동맹(軍事同盟)을 제의(提議)하는 김춘추에게 당(唐) 태종은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어 남들이 우습게 본다는 모욕(侮辱)을 주며 거절(拒絶)했었다. 일본 차(茶)를 수입 가공해 해상 무역으로 전 세계에 판매(販賣)하는 정책을 그만두지 않으면 당나라 황실 종친을 보내 신라왕을 시키겠다는 협박(脅迫)마저 서슴지 않았던 당(唐) 태종이었다. 일본 차(茶) 수입 중지 조치는 자신의 아들 대(代)에도 지속(持續)될 것이라는 것을 김춘추가 약속해도 믿지 않았던 당(唐) 태종은 함께 간 김춘추의 아들 김문왕이 면전에서 조아리며 약속하자 믿어 주었다. 그 증표(證票)로 두 사람이 진덕여왕(眞德女王) 이후 순차적(順次的)으로 신라왕(新羅王)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자신의 일생을 걸고 지켰던 신라의 차(茶) 산업은 여왕이 죽고 일 년이 채 안되어 사라졌다. 일본 차(茶)의 신라(新羅)로의 수입(輸入)은 중지되었고 일본 차(茶)를 가공 처리해 전 세계에 수출하던 신라의 차(茶) 산업은 역사 기록 속에서마저 철저히 사라졌다. 차(茶)를 실크 로드 무역로(貿易路)로만 유통(流通)시키려는 진상(晉商)과 소그드 상방(商坊)의 계획은 성공을 향해 질주(疾走)하고 있었고 신라를 사로(斯盧)로 부르게 한 시루(斯盧 Si Lu) 또한 그저 떡이나 찌는 기구(器具)로 전락(轉落)하고 있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