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년 고구려의 영양왕(嬰陽王)이 말갈병(靺鞨兵)을 동원해 임유관(臨楡關)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70년 전쟁이었다. 진시황(秦始皇)과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전한(前漢) 이후 누구도 다시는 원치 않아 이루지 않았던 중국의 통일을 558년만에 다시 달성한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사들을 조련(操鍊)하고 있다는 첩보(諜報)로 촉발된 전쟁이었다. 40년도 못버티고 나라 자체가 멸망한 수나라가 망하기 전 4번이나 고구려 원정(遠征)을 감행했고 게다가 두 번째인 612년의 원정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단일전쟁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물량전(物量戰)이었던 것은 도대체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느냐는 의문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 수나라가 망하고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들어 선 통일 국가 당(唐)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23년이라는 기간 동안 일으킨 대규모 침략은 645년 황제인 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감행한 첫 원정을 시작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35만 대군의 2차 원정 그리고 끝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이세적(李世勣)이 지휘한 50만대군의 3차 원정까지 3번이나 되었다. 수나라와 달리 당나라는 대규모 원정이 없던 시기에도 끊임없이 중소규모로 침공해 고구려를 언제나 전시상태(戰時狀態)에 놓여 있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란 건 결국 고구려가 만들고 키워 온 무역로(貿易路)인 초원로(草原路 Steppe Route)를 고구려로부터 뺏으려는 진상방(晉商幫)과 소그드상방(Sogdian 商幫)의 지독한 계산(計算)때문이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추워진 기후변화로 찻잎생산이 대폭 줄어든 것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추워진 날씨로 고구려가 개발한 쇄청법(曬靑法)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해져 가고 있었다. 결국 패권(霸權)이란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고구려와 함께 초원로(草原路 Steppe Route)를 육성(育成)하고 운영해 온 월지(月氏) 머천트(Merchant)들이 떠나고 있었다. 대대로(大對盧)라는 고구려의 제1관등(官等)은 월지(月支) 차상인(茶商人 Merchant)을 상대(相對)하는 자리라 하여 이름 자체가 대대로(大對盧)였고 그래서 그 자리는 왕이 임명하지 않고 고구려의 귀족층을 이루고 있는 오부(五部)가 3년마다 선거(選擧)를 통해 뽑았다. 게다가 만약 선출된 새로운 대대로(大對盧)에 승복(承服)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각자 사병(私兵)을 이끌고 나와 싸움을 해서 승리한 자가 대대로가 되게 하는 결선(決選) 규정이 있었다. 이렇듯 월지(月氏) 머천트(Nerchant)들을 상대하는 대대로라는 관직은 오부귀족(五部貴族)들의 선거로 선출되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더 중요한 원칙은 그 자리가 무력(武力)으로 유지(維持)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계루부(桂婁部) 출신의 왕조차도 궁성문(宮城門)을 굳게 닫은 채 개입하지 않았을 정도로 모든 귀족들이 탐(貪)을 내는 자리가 대대로였다. 그런 대대로(大對盧)라는 최고 관등의 이름이 막리지(莫離支)로 바뀌게 된 건 계속 추워지기만 하는 기후 변화로 고구려의 차산업(茶産業)이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고 초원로(Steppe Route)에서 인기 높은 고구려의 청전차(靑磚茶)를 구매하기 위해 늘 도성을 채우던 월지(月支) 머천트(Merchant)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찻잎을 더 이상 온전히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만큼 추워져만 가는 기후 변화에 따라 자체 차산업(茶産業)을 포기(抛棄)하고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하청업자로 편입되자는 주장이 날로 세를 얻어가는 시절이었다. 차산업(茶産業)을 포기할 수 없고 월지(月支) 머천트들과도 분리(分離)될 수 없다는 뜻을 가진 막리지(莫離支)가 대대로(大對盧)를 대신해 고구려의 제1관등이 된 것은 초원로(草原路) 무역패권을 지키겠다는 대외선언에 다름이 아니어서 초원로(草原路) 무역 관리권을 뺏으려는 거대한 실크로드 상방(商幫)과의 험난한 싸움이 고구려의 전도(前途)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테아도라 황후로 기록된, 비잔틴 제국이라 불리던 동로마제국의 황제부부가 비단(緋緞) 산업을 중국으로부터 통째로 훔쳐오는데 성공한 것이 7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을 가져온 나비 날개짓이었다고 하는 건 어이없는 일이 아니다. 화하족(華夏族)의 시조(始祖)라는 황제헌원(皇帝軒轅)의 원비(元妃)인 누조(嫘祖)가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을 지어내는 법을 우연히 알아낸 이후 수천년 동안 철저한 비밀에 붙여졌던 비단 생산의 핵심 물자가 밀반출된 것이 모든 사단(事端)의 시작이었는데 중국에서 누에알과 뽕나무 씨앗이 밀반출되어 동로마제국에 전달된 것이 552년이라 기록되어 있다는 건 역시나 거짓말이다. 당시 선비족(鮮卑族) 탁발씨(拓拔氏)가 북위(北魏) 황제로 통치하고 있던 중국에서 국경 밖으로 반출(搬出)하려다 발각(發覺)되면 관련자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졌던 누에알과 뽕나무 씨앗을 목숨 걸고 반출(搬出)해 낸 건 경교(景敎)라 불리던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사 두 명이었다. 밀반출(密搬出)에 성공한 수도사들이 그 엄청난 물건들을 갖다 바친 건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황후였다. 그런데 그 엄청난 물건들을 받은 황제와 황후는 그런 엄청난 공을 세운 수도사들이 속한 네스토리우스 교단을 다시 한번 이단(異端)으로 몰아 축출(逐出)하려고 삼장서(三章書)를 비판하는 칙서(勅書)를 내리는데 그 일이 벌어진 건 543년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일으킨 안티오키아 신학자 3인에 대한 단죄(斷罪)칙서사건에서 촉발된 삼장논쟁(三章論爭)은 칼케돈 공의회(公議會) 이후 평화롭게 끝난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이단논쟁(異端論爭)을 다시 들쑤셔 전 유럽을 혼란에 빠트린 거였다. 결국 서방 교회 주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황 없이 치뤄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5차 공의회에서 황제의 단죄칙서(斷罪勅書)가 승인된 게 553년이었다. 목숨을 걸고 밀반출해 온 누에알과 뽕나무 씨앗을 자신들이 속한 교파(敎派)를 이단(異端)으로 몰려고 10년 동안을 주구장창 옥죄어 온 황제에게 바친다는 건 정상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이 다 아는 단성론자(單性論者)인 황후 테오도라에게 단성론(單性論)을 인정하지 않는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사들이 갖다 바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진행되었던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누에알과 뽕나무 씨앗이 밀반출 된 건 유스티니아누스가 단죄칙서를 발표하기 훨씬 전인 522년이다.
중국에서 누에알과 뽕나무 씨앗이 밀반출(密搬出)되어 동로마제국에 전달된 것이 552년이 아니라 522년이라고 주장하는 두 번째 근거(根據)는 천민(賤民)으로 취급되었던 여배우(女俳優) 출신의 테오도라와 당시 유스티누스 황제의 조카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귀족(貴族) 유스티니아누스와의 결혼 사건이다. 로마 귀족과 평민이 아닌 천민과의 결혼은 로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524년 이 금지법이 개정되어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525년 결혼했다. 그리고 52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외삼촌 유스티누스 황제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원로원(元老院)의 전폭적인 지원(支援)과 시민대중들의 지지(支持)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지켜져 온 귀족과 천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유스티니아누스는 어떻게 그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전폭적인 신뢰(信賴)와 지원을 얻어 개정할 수 있었을까? 매년 엄청난 돈을 들여 수입하는 비단(緋緞)을 더 이상 수입하지 않고 자체 생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원로원을 흥분시켰다. 누에 알들과 뽕나무 씨앗들을 중국으로부터 밀반출 (密搬出)해 온 것만으로도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비단은 금이었다. 세 번째 근거(根據)는 526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원정이다. 결국 한니발로 유명한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나폴리와 로마, 밀라노와 라벤나까지 점령해 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535년에 성공한 시실리아(Sicilia)섬의 점령이었다. 시실리아의 원래 이름은 트리나크리아(Trinacria)였다. 삼각형 모양의 섬이란 뜻의 그리스 이름이 실(絲)이란 이름으로 바뀐 것이었다. 유럽에서 비단(緋緞) 산업이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였고 더 정확히는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시실리아(Sicilia)다. 삼각형 섬이란 뜻의 트리나크리아가 비단실을 의미했던 신라실의 땅이란 뜻의 시실리아로 그 이름이 바뀐 이유였다. 522년 북위(北魏)의 허술한 국경검문(國境檢問)으로 두 명의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사의 속빈 지팡이 속에 각각 숨겨져 밀반출된 누에알과 뽕나무 씨앗은 여러 유럽 지역에 이식되어 실험되다가 당시 트리나크리아섬에서 성공적으로 재배(栽培)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보고를 받는 즉시 가장 신임하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보내 시실리아섬을 점령하게 했다. 533년부터 벨리사리우스는 보급과 병참선을 고려해 시실리아의 남북에 각각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나폴리를 시실리와 함께 차례로 점령했다. 시실리아에서 뽕나무를 재배해 누에를 키우고 그 누에가 친 고치를 풀어 명주실을 자아 비단(緋緞)을 직조(織造)함으로써 비잔틴은 엄청난 경제적 번영(繁榮)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시실리아(Sicilia)는 그때부터 나폴리(Naple)와 함께 번영의 시대를 계속 이어가 서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동로마가 비단(緋緞)생산의 자체생산에 성공하자 문제는 중국에서만 생산되던 비단을 주력 상품으로 하여 무역이익을 취해 온 실크로드 상방(商幫)에서 터졌다. 누에와 뽕나무를 가졌다고 큰소리치며 비단 가격을 후려치는 로마 상인들의 행태를 사산조 페르시아 상인들로부터 보고받은 실크로드 상방은 즉각 진위를 확인했고 서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關門)으로 6진중 가장 서북쪽에 설치된 옥야진(沃野鎭)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경교(景敎) 수도사들이 빠져 나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옥야진(沃野鎭)을 비롯해 국경에 설치된 북위의 모든 진(鎭)들에 가혹(苛酷)한 검열(檢閱)이 북위 조정(朝庭)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장성(長城) 밖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장성(長城) 안에서 이뤄지는 실크 로드 캐러반(Caravan 隊商)들의 무역활동을 안전하게 방어(防禦)해 왔던 6진(鎭)의 백성들이 북위(北魏) 조정(朝庭)의 가혹한 검열(檢閱)에 반기(叛旗)를 올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동로마제국의 종교(宗敎)를 가장(假裝)한 산업 스파이가 누에알과 뽕나무 씨앗을 밀반출(密搬出) 해 간 지 2년이 지난 524년의 일이었다. 장성(長城) 밖 북녘 거친 들판에 동서(東西)로 펼쳐져 있는 6진(鎭)들의 백성들을 우대하며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평성(平城 지금의 다통 大同)을 수도로 삼아 상무(尙武)정신과 평등(平等)정신을 구현했던 것이 북위였다. 그랬던 황실과 조정(朝廷)이 493년 효문제(孝文帝) 때 남조(南朝)를 정벌한다는 핑계로 남쪽으로 내려가더니 낙양(洛陽)으로 아예 수도를 옮겨버린 거였다. 그 후부터 축적되고 있었던 그들의 불만이었다. 6진의 난(亂)이라고 일컬어진 이 정변(政變)은 동로마제국의 비단(緋緞) 산업 도둑질에 대한 대책을 세워가는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북위(北魏) 조정(朝庭)이 그들의 뒷배인 실크로드 상방의 눈치만 살피다 흉노를 다시 장성안에 들여놓는 등 잘못 대처함으로써 결국 북위는 망했고 이는 끝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가 스스로 차산업(茶産業)을 포기(抛棄)하게 만든 시작이 되었다. 동로마로의 비단(緋緞) 산업 기술 유출이 일으킨 격변이었다.
524년 발발(勃發)한 6진의 난으로 북위(北魏)는 두 나라로 쪼개졌고 실크 로드 교역을 통해 돈을 벌어 오던 일명 실크로드 상방의 손해는 눈덩이처럼 커져버렸다.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주력 상품은 비단(緋緞)이었고 초원로(Steppe Route)와 해양로(Marine Road)의 주력상품은 각각 청전차(靑磚茶)와 청태전(靑苔錢)으로 대표되는 차(茶)였던 까닭에 큰 분쟁(分爭)없이 각자의 시장(市場)과 무역로(貿易路)를 운용해 왔는데 실크로드에서 큰 문제가 야기(惹起)된 것이었다. 시실리(Sicily)에서 자체 생산된 비단(緋緞)을 비잔틴 제국내(帝國內) 시장에 판매함으로써 동로마제국은 나날이 번영해 갔고 5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와 실크로드 상방(商幫)은 극심한 경기 침체(景氣 沈滯)에 빠져 버렸다. 540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가 실크로드 상방의 결사적인 지원(支援)을 받으며 동로마 제국 안으로 군대를 진격(進擊)시켰다. 목표는 로마령 아르메니아였다. 로마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카프카스(Caucasus)를 끼고 있는 아르메니아를 경영한 이유는 그곳으로 들어오는 차(茶)때문이었다. 초원로(Steppe Route)를 통해 사마라(Samara)까지 전해진 고구려의 청전차(靑塼茶)들은 사마라에서 볼가강(Volga River)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볼고그라드(Volgograd)에서 돈강(Don River)을 통해 흑해(黑海)로 들어왔다. 흑해 해상로(海上路)를 통해 배로 운반되는 차(茶)는 실크 로드를 통해 육로(陸路)로 들어오는 차(茶)보다 물량과 가격 모두에서 유리했기에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운항하는 흑해 해상 무역선이 중간에 반드시 기항(寄港)해야 하는 아르메니아는 로마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생명선이었다. 모를 리 없는 실크로드 상방이었고 아르메니아를 놓고 5년간 전쟁이 계속되자 로마 제국내 차(茶) 공급량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결국 반란(叛亂)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노회(老獪)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천 파운드의 금(金)을 배상금(賠償金)으로 지급하면서 5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동로마제국의 영토 즉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대한 보상(補償)이었다.
기원전 66년부터 216년까지 계속된 그 유명한 로마와 파르티아(Parthia)사이의 오랜 전쟁도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유권(領有權) 다툼 때문이었고 그렇게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유권(領有權)이 중요했던 이유는 바로 초원로(草原路)와 흑해(黑海)를 통해 공급되는 차(茶)의 확보 때문이었다. 케사르(시이저)와 폼페이우스가 활약하던 시절에도 아르메니아는 로마제국의 생명선으로 로마의 총력이 기울어져 보호되었던 이유였다. 259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가 샤루프 1세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죽을 때까지 계단 역할을 하는 노예로 살아야 했던 이유였다. 561년, 50년간 아르메니아에서 로마로 공급되는 차(茶) 무역을 사산조 페르시아가 보장(保障)한다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댓가로 로마는 실크로드 상방에게 연간 3만 솔리드의 금화(金貨)를 매년 공납해야 했다. 실크 로드 상방은 로마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바이칼 서쪽에 거주하던 투르크인들을 아나톨리아까지 이동시켰고 로마는 로스토프나도누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흑해 해상무역선의 기항지(寄港地)인 흑해 연안의 카프카스(Caucasus) 서부 지역 라지카(Lazica:오늘날의 조지아)를 로마령으로 인정해 불침(不侵)한다는 조항(條項)을 삽입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유스티누스 2세는 568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실크 로드 상방(商幫) 대표단을 만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휴전 협정을 동맹 조약으로 전환하고 실크로드 상방과 로마 제국간 비단 직거래를 보장해 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실크로드 상방을 대표해 황제를 찾아온 이들은 소그드인들이었다. 서쪽에 있는 로마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매듭지은 소그드 상방이 동쪽으로 눈을 돌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실크 로드 상방의 양대 축이었던 진(晉)상방과 소그드 상방중에서 더 치명적인 손해를 입은 쪽은 소그드 상방이었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 왜 소그드인들이 주역으로 떠오른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소그드가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벌겋게 충혈된 눈을 돌린 그 곳엔 북위와 진(陳)나라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있었다. 비단산업을 로마가 도둑질 해 간 이후 실크로드 상방이 입은 손해는 천문학적 규모였다. 손해를 보전(補塡)하는 것과 복수(復讎)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비단 무역에서 발생한 손해를 메꿀 수 있는 곳은 차(茶) 무역 말고는 없었고 로마에 복수할 수 있는 길은 초원로(Steppe Route)에 공급되는 차(茶) 물량(物量)을 원천 통제(源泉統制)해 로마로 공급되는 차(茶) 물량 자체를 강제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 두 토끼를 잡게 해 줄 수 있는 곳이 고구려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초원의 무역로(貿易路)를 운영(運營) 관리(管理)해 온 누대(累代)의 강대국(强大國)이었다. 누구도 다시는 원치 않았던 중국의 통일이 결정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처럼 한무제(漢武帝)의 한(漢)나라처럼 통일된 중국만이 고구려를 소그드 상방이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쓰라린 진시황과 한고조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계속 추워지고 있는 기후변화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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