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양제(煬帝)가 일으킨 대운하(大運河) 공사는 황제의 향리향락(享利享樂)을 위해서라든가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라든가 하는 이유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차공급망(茶供給網)만으로 세계제국(世界帝國)을 건설한 월지(月氏,月支)가 개척하고 지배해 온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 Marine Road)를 통해 인도, 페르시아, 레반트(시리아와 이라크)등에 공급되고 있는 차(茶)들을 실크로드 물동량(物動量)으로 뺏어 오기 위한 소그드(Sogd) 상방(商幫)의 생존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의 산물(産物)이었다. 장안(長安)의 만성적인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건설한다는 대운하의 명분(名分)은 착공(着工) 당시부터 납득(納得)되기는 커녕 조롱(嘲弄)당하고 배척(排斥)당하고 있었다. 수(隋)나라를 건국하고 오랜 혼란을 수습한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북위(北魏)의 균전제(均田制) 정신을 이어받는 조세재정제도(租稅財政制度)인 조용조(租庸調)를 확립하고 과거제(科擧制)로 연결되는 선거제(選擧制)를 확립해 개황의 치(開皇之治)라고 불리는 장엄(莊嚴)한 혁명(革命)을 이룩하고도 아들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소그드(Sogdian) 상방(商幫)의 건곤일척(乾坤一擲) 승부수(勝負手)인 대운하(大運河) 공사를 중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낙양(洛陽)에 도읍(都邑)해야 할 것을 소그드 상방을 위해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수도(首都)를 정할 만큼 소그드 상방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적으로 민감(敏感)하게 대응했던 수 문제(隋文帝)도 대운하 공사만큼은 계속할 수 없었다.
광통거(廣通渠)라고 기록된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과 낙양(洛陽)를 연결하는 운하(運河) 공사는 지금 남아있는 기록들이 강권(強勸)하듯 동관(潼關)과 장안(長安)을 연결하는, 즉 황하(黃河)와 장안을 연결하는 운하(運河)가 아니었다. 동관(潼關)과 장안(長安)은 이미 강태공이 주문왕(周文王)을 만났던 위수(渭水)에 의해 수로(水路)로 연결되어 있었다. 진짜 광통거(廣通渠) 공사는 왕순산(王順山)과 화산(華山 Huashan)으로 이어진 진령산맥(秦嶺山脈)에 도랑(溝)을 파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운하(運河)로 연결하는,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어렵고 힘든 공사(工事)였다. 장안(長安)의 동쪽 끝 지역에 황하로 흘러가는 위수(渭水)의 큰 물줄기를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는 운하(運河)를 남북으로 파서 낙양(洛陽)으로 흘러가는 낙하(洛河 Luohe) 상류와 연결하는 공사였다. 서안 동쪽 지역에 위수(渭水)의 본류(本流)보다도 더 크고 반듯한, 수직(垂直)으로 파 낸 도랑(溝)으로 위수(渭水) 물줄기를 남쪽으로 돌려 진령산맥(秦嶺山脈) 깊숙이 있는 옥산진(玉山鎭)과 파원진(灞源鎭)을 거쳐 두림구(杜林溝)에서 낙하(洛河)의 발원지와 합류(合流)하도록 계획한 운하(運河)였다. 이 운하(運河)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토목공사였다. 결국 수 문제(隋文帝)가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준 소그드 상방(商幫)과 현실적 타협을 거쳐 건설한 운하(運河)는 대미산(黛眉山) 골짜기로 황하를 끌어들여 후일 앙소문화(仰韶文化)로 유명하게 되는 민지현(澠池县)을 통해 낙양과 섬주(陜州)를 연결하는 운하였다. 대미산 골짜기를 따라 흐르도록 팠기에 간구(澗溝 Jiankou)라고 이름 붙여진 도랑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 민지현에 이른 황하(黃河)는 골짜기를 따라 흘렀기에 간하(澗河)가 되어 낙양과 섬주를 연결했다. 간하(澗河)는 그래서 곡수(谷水)라고도 불렸다.(周나라에선 穀水라 기록했다)
기원전(紀元前) 53년, 사천(泗川) 아안(雅安)의 몽정산(蒙頂山)에서 오리진(吳理眞) 감로보혜선사(甘露普慧禪師)가 차(茶)를 인공적(人工的)으로 재배(栽培)하는데 성공했다. 한무제(漢武帝)의 증손자(曾孫子)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한순간에 모두 잃어 버리고 반역자(叛逆者)의 자손(子孫)이 되어 신분을 숨긴 채 고아(孤兒)로 성장해야 했던 당시 황제 선제(宣帝)는 친위군을 보내 몽정산을 폐쇄(閉鎖) 했다. 한(漢) 선제(宣帝)는 자신을 고아(孤兒)로 만든 차(茶) 인공재배(人工栽培) 기술을 황실독점으로 밀봉(密封)하고 인공재배를 통해 수확된 차(茶) 전량을 실크로드 상방(商幫)만 거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조치는 결국 수수께끼같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와 엉망진창인 장제(章帝) 이후의 후한(後漢)의 역사를 초래(招來)했다. 장제(章帝)가 죽은 기원후 89년까지 사천(四川)에서 생산되는 차(茶) 전량을 독점(獨占)하고 더 이상 독점할 수 없었던 그 후에도 오랫동안 사천(四川)의 차산업(茶産業)을 지배(支配)했던 실크로드 상방(商幫)은 비단(緋緞)이라는 또 하나의 독점(獨占) 상품을 차(茶)와 함께 실크 로드를 통해 팔면서 전성기(全盛期)를 누려 왔었다. 그런데 북위(北魏) 옥야진(沃野鎭)의 허술한 국경검문(國境檢問)으로 인해 누에알들과 뽕나무 씨앗들이 경교(景敎) 수도사들의 도둑질로 비잔틴(Byzantine)에 유출되는 바람에 비단(緋緞)의 독점(獨占)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비단(Silk) 무역(貿易)에서 나오던 독점이윤(利潤)이 사라지자 몽정산(蒙頂山)에서 생산되는 차(茶) 물량만으로는 대상(隊商 Caravan) 하나도 온전히 조직해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수지(收支)가 악화되어 버렸다. 대상(隊商 Caravan) 들을 운용해 상방(商幫)을 유지하기 위해 남은 길은 유일하게 독점으로 남아 있는 차(茶) 물량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확보하는 길 뿐이었다. 소그드 상방은 차(茶) 물량 확보에 상방(商幫)의 존폐(存廢)를 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몽정산(蒙頂山)과 동쪽 연안(沿岸) 지역에서만 공급되던 차(茶)는 크게 세 갈래의 중국내 수송로(輸送路)를 따라 서쪽으로 유통(流通)되어졌는데 그 이유는 온전히 황하(黃河) 때문이었다. 황하(黃河)가 오르도스를 돌아 황토고원(黃土高原)을 지나면 황하는 이미 물이 아니라 진흙이 흘러가는 강(江)이 되었다. 수레 또는 말과 낙타 등에 차(茶)를 싣고 그 진흙의 황하를 건넌다는 건 너무나도 위험했다. 황하(黃河)의 이런 특성(特性)때문에 발해만(渤海灣)으로 빠져 나가는 하류의 강줄기를 기준(基準)으로 황하 이북(以北)의 수송로(輸送路)와 황하 이남(以南)의 수송로(輸送路)가 완전히 별개(別個)로 운용되고 있었다. 황하 이북의 수송로는 다시 태행산맥(太行山脈)을 경계선으로 하여 산서성(山西省) 지역과 하북성(河北省) 지역으로 나누어 졌는데 산서성(山西省 Shanxi)지역은 오르도스를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는 황하(黃河)를 서쪽 경계선으로 하고 역시 남북으로 전개되어 있는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동쪽 경계로 하는 지역이었다. 발해만(渤海灣)에 하역(荷役)된 차(茶)들은 내륙(內陸) 수운용(水運用) 배들로 옮겨 실어져 해하(海河)로 안내된 후 대정강(大箐江 Daqing River)과 이수(易水 Yishui River)강등 강줄기들을 바꿔가며 이현(易縣)까지 운반(運搬)되었다. 이현(易縣)이란 지명(地名)은 배(船)로 실려 온 차(茶)를 말과 나귀등으로 옮겨 싣는 곳이라 하여 또한 차(茶)의 주인(主人)이 바뀌는 교역(交易)이 이뤄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엄청난 토사때문에 건널 수 없는 황하 하류로 인해 황하 이북과 이남이 완전히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용해 철저히 경제적 이득을 취한 건 제(齊)나라 관중(管仲)이 처음이었다. 오르도스지역과 그 이북 지방 그리고 서역으로 차(茶)를 팔기 위해 건널 수 있는 황하로 몰려드는 차상인(茶商人 Merchant)들에게서 관중(管仲)으로부터 배운 통행세를 두번째로 받아내기 시작한 건 진(晉)나라 헌공(獻公)이었다. 그들이 얕으막한 흙담을 쌓고 그 중 한군데에 문(門)을 만들어 통행을 시키고 그 댓가로 차(茶)를 받으면서 그것은 관세(關稅)라 불리게 되었다. 이현(易縣)에서 낙타와 말로 옮겨진 차(茶)들은 태행산맥에 설치된 자형관(紫荊關)에서 관세를 납부하고 항산산맥(恒山山脈)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진(晉)나라는 이후 내분으로 세나라로 각각 분할되었는데 그 중 위(魏)나라와 조(趙)나라는 자형관(紫荊關)에서 관세(關稅)를 내고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은 차(茶)상인들이 오르도스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항산산맥(恒山山脈)에 또다시 관문(關門)을 쌓고는 관세(關稅)를 이중으로 징수(徵收)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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