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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와 수메르 그리고 중국 - 거석문화의 진실 5

by 檀童稗說 2024. 9. 29.

중국사전사회(中國史前社會)는 일단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들어서면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정통문화(正統文化)는 바로 각종 단원문화(單元文化)로부터 용광로에서 한데 녹여지듯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녹여지는 과정은 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 일관되었고 금석병용시대(金石幷用時代) 혹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이르러 곧장 이미 바탕이 이루어졌다. 중국의 신석기시대는 다음과 같은 8가지 중요한 단위문화, 즉 세석기문화(細石器文化) ·홍도문화(紅陶文化)·채도문화(彩陶文化)·각문도문화(刻紋陶文化)·회도문화(灰陶文化)·대석문화(大石文化)·흑도문화(黑陶文化)·백도문화(白陶文化) 등이다. 이러한 8가지 단위문화는 중국 신석기의 5대 문화체계를 반영하고 있나니 곧 세석기(細石器)와 홍도(紅陶)는 원시 강적문화(羌狄文化)를 대변하고 채도(彩陶)와 대석건설(大石建設)은 원시의 화하문화(華夏文化)를, 핵문도(核紋陶)는 원시 구려(九黎)와 백월(百越)및 광의의 남만문화(南蠻文化)를 대변하고 회도(灰陶)와 흑도(黑陶)는 원시의 동이문화(東夷文化)를 백도(白陶)와 청동기(靑銅器)는 중국의 정통문화를 대변한다… 중국의 신석기시대는… 특히 대서특필한 것은 정치상으로 토템연합이 반영된 부족연맹중앙기구(部族中央聯盟機構)가 성립하게 된 것인데 이는 역사시대에 중국이 구가(謳歌)하던 대일통주의(大一統主義)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 중국은 신석기시대 말기에 정치상으로 이하(夷夏: 오랑캐와 중국)가 일체로 되었고, 문화상으로 동서가 하나로 되어 오늘날의 중국민족을 조성하는 골간(骨幹)이 되었으며, 중국정통문화가 길러지게 되는 원인이 됨과 동시에 동이부족(東夷部族)의 화평하고 활발함과 서하부족(西夏部族)의 관인(寬忍)하고 강의(剛毅) 한 것 그리고 양대 부족의 사전(史前)은 혼합에서 화합으로의 성심성의껏 일치단결하게 되었거니와, 더 나아가 오늘날의 기백이 큰 대국의 풍모(泱泱大國之風)를 갖는 중국국민성(中國國民性)으로 길러내진 기본 소인이 되었다. - 서량지(徐亮之)의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중에서

중국인의 시조라는 여와와 태호복희. 출처:위키미디어


기원전 4000년경 기후 한냉화로 야기된 아일랜드 차나무 멸종사건은 중국에게는 크나 큰 축복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배달의 역사를 기록한 이후 단 한 번도 역사의 무대로 나서본 적 없는 중국이었다. 배달족이 사라진 차나무를 찾아 아프리카의 루왜은조리, 마고할머니가 계시는 달의 산을 떠나 대륙 동쪽 끝 삼위태백에서 차나무를 찾아낼 때까지 개척된 대륙의 동서 교통로는 오늘날의 중국 지역이 아니었다. 몽고 북부와 시베리아 지역이었다. 삼위태백(三危太伯)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궁석산(窮石山)에 신시를 건설해 도읍을 정한 배달족(倍達族)이 생산한 찻잎들을 복본(復本)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건설한 서쪽의 나일강 전초기지들에 보급하기 위해 대륙의 동서를 오고 갈 때 남쪽의 중국 지역은 전혀 이용되지 않았었다. 그런 중국 지역이 오늘날과 같은 유라시아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건 사라진 차나무를 찾아 아얼(阿尔)이라 발음되던 아일랜드에서부터 유랑해 온 수메르인들 덕분이었다. 사실 더 정확히 지적하자면 그런 수메르인들을 나중에 탄압했던 아카드인들 때문이었다. 동서 교통로의 지배자인 배달족(아카드)이 아예 거들떠보지 않은 지역이었기에 복본의 전초기지들이 있는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수메르인들이 훨씬 더 많은 자유를 가지고 터 잡을 수 있었던 땅이 중국지역이었고 그래서 중국 지역은 수메르인들이 마음먹은 대로 개발할 수 있었던 땅이 되었다. 그건 중국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인더스 강변의 인도인들이 아얼(阿尔)이라고 발음하는 에이레(Eire) 고인돌 공장에서 만들어진 찻잎들이 전 유럽에 유통되던 무역로. 바다에 만든 차(cha)들이 다니는 길(널)이 놀랍다.


수메르인들은 이미 대륙 서쪽 끝에서 찻잎 생산을 위해 고인돌(Dolmen)과 고분(Tumulus), 스톤 헨지(henge)로 구성된 찻잎생산기지를 건설해 찬란한 거석(巨石: Megalith) 문화를 일으켰던 사람들이었고 또한 배달족(倍達族)이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배(船)를 이용해 바다로 찻잎을 실어 나르는 채널(channel) 무역까지 실현시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Sumer인들이 Akkad인들이 장악한 동서 교통로의 독점에 균열을 내기 위해 작심하고 개발한 곳이 중국 지역이었다. 중국의 시조(始祖) 문제와 연결되는 삼황오제를 다룬 고대 중국의 사서(史書)들이 사마천의 사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첫손가락에 꼽는 태호 복희 씨(太皞 伏羲氏)가 손에 구부러진 자(曲尺)를 들고 황토로 사람을 빚었다는, 손에 컴퍼스를 쥔 여와(女媧)와 함께 뱀 형상인 하체들을 서로 얽고 있는 그림으로 드러난 연유는 그들이 수메르인들에 의해 발탁되고 교육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우리 민족이 태초의 소리, 율려(律呂)에 의해 창조된 마고 여신을 시작으로 형성되었다는 창조신화를 가진 것과 사뭇 다른 연유였다. 인더스에서 아얼이라고 발음되는 에이레(Eire)에서 차나무들이 기후변화로 모두 죽어버려 벌어진 기원전 4000년경의 사건이 지금까지 인류사를 피로 물들이게 한 장구한 역사의 시초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피의 역사를 일으킨 원인에 대한 진실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철저히 은폐될 수 있었으리란 것 또한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중국의 역할이 컸다. 황제(黃帝) 헌원(軒轅)은 배달(背達)의 역사를 알지 못했다.

아나톨리아 반도 중북부에 위치한 하투사(Hattusa)의 King’s Gate. 출처:위키미디어


수메르는 하루라도 빨리 온전한 터전을 갖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그런 그들의 간절한 노력은 문명이라는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문명은 복본(復本)이 신앙인 배달족(倍達族:아카드)에게는 재앙과 같은 것이었다. 문명의 안락함이 복본을 위해 떠나야 하는 사람들을 주저앉힐 거라는 아카드인(배달족)들의 염려는 강박관념이 되어가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가꾸어 온 터전을 하루아침에 기후 변화로 잃어버린 경험은 수메르인들에게 그 어떤 기후 변화에도 삶의 터전을 지켜 낼 수 있는 강력한 생활 기반 시설 구축에 대한 열망을 가속화시켰고 그런 수메르인들의 목숨 건 갈망은 당연히 빠른 가시적인 성과들로 이어졌다. 문명(文明:Civilisation)이었다. 이렇게 수메르인들에 의한 문명 건설이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배달족(Akkad)의 의심과 불안도 함께 빠르게 커져만 갔다. 농경(農耕:culture)과 목축(牧畜:farming), 도르래(轤:pulley)와 바큇살(輻)로 이루어진 수레바퀴 같은 획기적인 개발과 발명품들을 통한 초고속 건설로 이어진 조선인(Sumerian)들의 안락하고 안정된 도시 건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떠나 온 본향(本鄕), 달의 산에 대한 그리움을 사라지게 하고 있었다. 본성을 회복해 사람들을 이끌고 루왜은조리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복본의 맹세를 지키려는 배달족에겐 수메르(朝鮮)가 만들어 내는 안정되고 안락한 도시들은 자신들의 맹세를 지킬 수 없게 하는 커다란 위협이 되어가고 있었다. 돌들만으로도 문명 된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수메르의 역작이 하투사(Hattusa)였다. 하투사는 수메르의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우르(Ur)의 벽돌 유적들. 출처: world History Encyclopedia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와 아나톨리아 접경지역에 수용된 아얼(阿尔)이라고 불렸던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온 난민(難民)들은 그 지역에 풍부한 석재(石材)를 이용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무역기지와 도시들을 건설했고 이들은 어떤 기후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는 안정되고 안락한 삶의 터전을 제공해 주는 안전장치가 되었다. 이미 정통해 있는 석재(石材) 들을 이용해 안정된 생활 시설들과 창고 같은 찻잎 교역 시설들을 어느 정도 구축해 놓자 더욱 많은 난민들이 도시들로 몰려들었다. 결국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이 추가로 난민들에게 정착지로 제공되었다. 수메르 문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좁은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그곳은 그래서 늘 과다하고 불규칙한 범람으로 개발이 어려운 땅이었다. 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버려진 땅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버려진 땅에 인류 최초의 계획 도시인 에리두(Eridu)를 건설했다.  수호신인 엔키(En-ki:물의 신)에게 바쳐진 수메르 문명 최초의 계획도시가 우르(Ur) 서쪽 외곽에 치우친 땅에 건설된 연유였다. 에리두를 건설할 때 수메르인들이 사용한 건 그 지역에 거의 없는 암석(巖石)이 아니라 그 지역에 흔한 점토(粘土)를 다져 말린 벽돌이었다.

아일랜드의 찻잎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바다를 통해 스페인의 Bilbao 항구에 도착하면 알타미라의 주사(cinnabar)를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주사는 안료로 쓰였다. 출처:위키미디어


페르시아 만에 연한 항구도시, 에리두(Eridu)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이 농경(農耕)과 더불어 주력한 일은 경면주사(鏡面朱砂:cinnebar) 같은 습기흡수제를 찾는 일이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선박을 이용한 유럽 대륙으로의 채널(channel) 교역로(交易路) 건설이 가능했던 것은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에서 찾아낸 경면주사 때문이었다. 알타미라에서 캐낸 경면주사(cinnebar) 때문에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 카르낙(Carnac)과 스페인의 알타미라를 연결하는 뱃길을 통한 채널 교역로가 운용될 수 있었다. 쉘부르항 서쪽의 채널 제도(諸島)와 연결된 프랑스 브르타뉴의 생브리외(Saint Brieuc)와 카르낙이 육로로 연결되었듯 대서양 연안의 알타미라와 육로로 연결된 지중해 연안의 바르셀로나를 통해 아일랜드에서 떠난 찻잎들은 지중해로 보내져 전 유럽에 유통될 수 있었다. 알타미라의 동굴벽화는 찬란한 유럽의 해상운송을 가능하게 해 준 경면주사의 존재를 과시하는 증거였다. 수메르(朝鮮)인들의 놀라운 문명 건설 속도에 놀란 배달족(倍達族:Akkadian)들이 과도한 규제를 가하자 수메르인들의 해상 진출에 대한 결심은 더욱 확고해져 갔고 그럴수록 경면주사(辰砂) 같은 탁월한 습기흡수제를 찾아내는 탐사는 가열차져만 갔다. 아스타나(Astana)와 카라치(Karachi)를 인더스강을 통해 연결하는 과정에서 개척된 아프가니스탄 교역로(交易路)에서 수메르인들은 알타미라의 경면주사를 능가하는 습기흡수제를 발견해 냈다. 청금석(靑金石)이었다.

투탄카멘 황금가면에 쓰인 청금석. 중국 무덤에서 비취가 부장된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복잡한 구성성분이지만 핵심은 그 돌이 알루미늄(Al) 성분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이산화규소(SiO2), 즉 장석(長石 AlSio2)이라는 것이었다. 청금석(靑金石) 덕분에 카라치와 에리두를 연결하는 아라비아해 바닷길은 쉬이 열렸고 그 바닷길은 무역풍으로 인해 축복받은 교역로가 되었다. 배달족들이 개발하지 않았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에리두를 능가하는 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건설되었고 결국 그들로 인해 이 지역은 근동(近東) 최고의 번영 지역이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땅을 깊게 파서 수로(水路)를 내봤자 범람지역이기에 쉽게 매몰(埋沒)되는 지역의 한계를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간파했다. 대부분의 땅이 점토로 이루어진 지역의 특성을 이용, 점토를 다지고 다진 후 햇볕에 충분히 말려 돌처럼 단단한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磚)들로 바닥을 깔아 도로처럼 길을 내고 그 위에 벽돌(塼)로 벽(甓)을 쌓아 올려 땅을 파지 않고도 수로(水路)를 만드는 공법을 창안해 냈다. 이렇게 만든 수로로 농사를 짓는 땅에 물을 대는 인류사 최초의 관개(灌漑) 농업을 수메르인들은 선보였다. 도르래로 돛(sail)을 조작해 무역풍을 이용해 아라비아해를 항해하는 배들이 인더스 강을 통해 전달된 삼위태백의 찻잎들을 카라치에서 싣고 우르(Ur)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문명의 혜택으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수메르(朝鮮)인들이 아카드(Akkad)인이라고 부른 배달족만 빼고.

알타이비스크 박물관 소장 동복(銅鍑). 출처:국제산문


배달족(倍達族)이 대륙의 동쪽 끝 삼위태백(三危太伯)에서 차나무를 찾아내 정착한 후 복본(復本)의 맹세를 잊지 않으려 루왜은조리(Ruwenzori)가 가까이 있는 나일강까지 오고 가기 위해 개발해 놓은 빗살무늬토기는 수메르(朝鮮)인들에게는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처음 자신들의 문명 건설을 한사코 탐탁지 않아 하는 배달족(아카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선인(Sumerer)들이 개발해 배달족에게 바친 건 쉽게 깨지지 않는 빗살무늬토기인 청동으로 만든 동복(銅鍑)이었다. 동서 교역로를 오가는 카라반(caravan)에게는 필수품인 토기는 찻잎을 물에 담가 우려내어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쓰는 용기(容器)였는데 그 이름을 복(复:fu)이라 한 건 복본(復本)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라는 걸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카라반 중에 입는 특수한 두꺼운 겉옷도 그래서 이름이 복(複:fu)이었다. 잘 깨져 골칫거리였던 복(复)을 청동(鍑)으로 만드니 거의 깨지는 일이 없었다. 동복(銅鍑)에 대한 카라반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배달족은 사람들의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구하게 해 줄 가능성이 높은 농사와 목축의 발전을 저지하는 교묘한 규제책을 계속 만들어 냈다. 언제든 복본을 위해 살던 곳을 떠날 수 있도록 키우는 작물을 쌀이 아닌 밀과 보리로 한정했고 많은 고기를 손쉽게 확보해 주는 돼지는 아예 키우지도 못하게 했다. 카인(Cain)이 바친 곡식이 야훼()에게 거부되고 동생 아벨이 바친 양만 제물로 가납되었다고 구약성서에 기록된 연유였다.

파란글자가 수메르 건설 도시였고 북쪽 분홍 글자가 아수르(아시리아) 건설 도시 남쪽 분홍글자는 아모리(바빌론) 건설 도시, 출처: 위키미디어


인류 최초의 살인으로 연결된 카인의 동생 아벨(Abel) 에 대한 시기심은 야훼(Yahweh)가 제물로 곡식은 거부하고 양은 받아들인 사건 때문에 싹튼 것이었고 이건 수메르(朝鮮)인들의 애타는 정착 노력을 어찌하든 훼방 놓으려는 배달족의 각종 규제에 대한 수메르인들의 원망이 높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기록이었다. 밀과 보리는 메소포타미아가 아닌 아카드인들이 장악한 코카서스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씨앗들이었다.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인들에게 판매하는 씨앗 공급량을 통제해 경작 면적을 인위적으로 제한했고 게다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건설된 수메르인들의 도시들을 동서로 분리시키기 위해 두 강 사이에 이신과 라르사 같은 배달족의 도시를 남북으로 건설해 수메르 도시들 간의 연합과 협력을 막았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본격화된 수메르인들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같은 인더스강 유역의 대대적인 도시 건설은 아카드인들에게는 재앙과 같은 일이었다.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인들이 정착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서 시작된 신석기 혁명이라 불리는 농업 혁명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수메르인들의 문명 건설을 한사코 막아서는 배달족(倍達族)을 수메르인들은 아카드(Akkad)라고 불렀다. 산스크리트어로 경직(stiff)되고 완고하다(stubbone)는 뜻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거석문화라고 불린 찻잎 생산과 생활 편의 시설들을 각종 각양의 돌들로 건설하는 데 있어 성공적인 경험을 갖고 있던 수메르(朝鮮)인들이 동천(東遷)해 오자 차나무가 자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읍(邑)과 촌락(村落)들이 취락(聚落)을 이뤄 수렵과 채취로 생활 경제 체제를 구축했던 배달족의 문화는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남부에 분리되어 수용된 조선인들은 각각의 지역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정되고 안락한 삶의 터전을 구축하기 위해 매진(邁進)했다. 이미 정통해 있는 돌들을 이용해 처음 정착한 아나톨리아 중부 지역에서 안정된 생활 시설들을 구축해 놓은 후 그들이 주력한 것은 새로 할당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흔한 흙에 대한 연구였다. 찻잎 가공 공장 겸 보관 창고인 투무리(tumuli: 古墳)를 만들 때 적석층(積石層) 위에 온도 조절과 습기 제거를 위해 단순 사용했던 흙을 배달족은 빗살무늬토기라는 용기를 만드는데 재료로 쓰고 있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여러 장석들과 석영 같은 규산암들이 만 갈래로 조합되어 있는 점토(粘土)는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게다가 점토 덩어리가 불과 함께 할 때 만들어 내는 천변만화는 수메르에겐 경이로운 것이었다. 배달족이 개발해 놓은 빗살무늬토기는 조선인들에게는 흙의 마술이었다. 히타이트들에게 보존되어 남아있는 대형 옹관들은 하티라고 불리던 푸르니(Puruni)라는 단오 축제를 만든 수메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토기였다. 찻잎 보관용및 찻물 우려낼 때 사용하는 대형 토기였다. 경직되고 완고한 사람들이라 하여 조선인들이 아카드라고 이름 붙인 배달족은 스스로를 웅상기가(검은 머리 사람)라고 한 조선인들을 수메르라고 불렀다.

Tauroctony. 뱀과 개, 전갈이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를 돕는다. 4두2륜 마차를 모는 태양신 헬리오스(로마는 솔)와 까마귀, 2두2륜 마차의 달의여신은 살인을 보고 있다. 출처:위키미다어


삼위태백에서 원정군(遠征軍)을 이끌고 와서 조선인들이 문명화시킨 땅을 무자비하게 정복한 후 자신들을 아카드라고 부른 사람들의 땅을 아카드 사람들은 수메르라고 불렀다. 그러나 수메르(Sumer)는 아카드가 지어 준 이름이 아니었다. 수메르의 도시들을 무력으로 정복한 아카드의 사르곤이 우르의 왕 루갈자게시의 목에 밧줄을 매어 니푸르에 있는 폭풍우의 신 엔릴(Enlil) 신전 앞까지 끌고 가 무릎 꿇려 죽여 버리자 그때까지 자신들을 웅상기가라고 부르던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수메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거였다. 산스크리트어로 수(Su)는 좋은(good) 우수한(better)이라는 뜻이었고 메르(mer)는 mehr로 미트라(Mitra)란 뜻이었다. 후일 미트라교(Mithraism)의 상징물(Iconography)들로 그 의미를 나타낸 이후에야 밝혀진 수메르란 말의 뜻은 아카드(배달족)를 죽이는 걸 잘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기원전 1400년경 이루어진 미탄니(Mittani)와 히타이트(Hittite) 사이의 평화조약 체결 때 증인으로 기원(祈願)된 다섯 신(神)중 하나로 처음 역사에 등장한 미트라(Mitra:Mithra)는 사르곤 캠페인 이후 사라진 수메르족 하티(Hatti)의 후손들인 히타이트가 비밀리에 믿었던 밀교의 주신인 태양신이었다. 고대 이란어인 아베스타어(Avestan)에서 서약(誓約)이라는 뜻의 단어인 미트라(mitra)는 자라투스트라로 잘 알려진 조로아스터(Zoroaster) 교에서는 계약을 담당하는 태양신이었다. 수메르인인 하티(Hatti)의 후손들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히타이트(Hittite)는 동쪽 카부르(Khabur)에 정착한 사르곤 원정군(遠征軍)의 주신(主神)을 그대로 자신들의 주신으로 모셨다. 폭풍우(storm)의 신 태섭(Teshub)이었다. 후일 미탄니를 건국하는 눌러앉은 사르곤 원정군 사람들은 히타이트인들에게 말을 사육하는 기술까지 전수해 주었다.


미트라(Mithra) 밀교(mystery religion)의 도상학(圖像學 :Iconography)을 연구한 학자들이 정리한 미트라교의 특징은 세 가지인데 첫째가 미트라가 바위에서 태어나는 아이콘(Icon) 둘째가 프리기아 캡(고깔모자)을 쓰고 아나톨리아식 옷을 입은 미트라가 칼로 황소를 죽이는 아이콘 셋째가 죽은 황소를 두고 미트라가 태양신 솔(Sol:그리스 신화에서는 헬리오스 Hellios)과 만찬을 함께 하는 아이콘이었다. 이 아이콘들이 가리키는 곳은 한 곳이었다. 수메르. 돌멘(dolmen)과 투무리(tumuli), 헨지(henge)와 하투사를 보더라도 바위들로 문명을 이뤄낸 사람들이었다. 바위의 아들이라 할 만했다. 배달족(아카드)들의 최고신은 폭풍우(storm)의 신 환웅, 엔릴(Enlil)이었고 삼위태백에서 원정군(遠征軍)으로 온 사람들은 마르둑(Marduk)이라 부른 엔릴의 아이콘은 황소였다. 미탄니(Mittani)를 건국한 후르리인(Hurrian)들의 최고신도 폭풍우의 신(神)이었고 그 아이콘 역시 황소였다. 황소를 칼로 찔러 죽이는 아이콘(Icon)은 배달족(아카드)들을 죽인다는 뜻이었다. 이 두 번째 아이콘은 그래서 토록토니(Tauroctony)라 해서 별도의 도상학으로 특별히 중하게 다루어졌다. 이 뜻을 글자로 나타낸 것이 해(解) 자였다. 해모수(解慕漱)와 해부루(解夫婁) 그리고 해 씨(解氏)들로 이뤄진 추모왕(皺牟王)을 제외한 고구려 초기의 왕(王)들은 모두 황소를 칼로 죽이는 물고기(鱼= 角)들 즉 수메르(조선족)였다. Tauroctony에서 눈여겨볼 세 번째는 태양의 신이 수메르의 편이라는 것이다. 태양신(헬리오스, 솔)의 품에 안겨 있는 건 까마귀다. 삼족오(三足烏)를 고구려(高句麗)의 상징으로 내세운 건 주몽(朱蒙)이 아니라 해 씨(解氏)들이었다. 고구려 시조 추모(鄒牟)는 해 씨(解氏)가 아니라 고씨(高氏)였고 이름에도 소 우(牛) 자가 들어간 이유는 그가 조선인(수메르)이 아니라 고려인(아카드:배달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죽어 시신도 없이 아들이라 위조된 유리왕에 의해 장사(葬事) 치러진 연유였다. 밝사상으로 편들어지는 쪽은 배달족이 아니라 수메르다. 원래 달(月)을 품었던 수메르였기에 해(日)까지 품은 수메르는 이제 명(明)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가 모두 동명왕(東明王)이 된 연유였다. 철천지 원수인 아카드(Akkad)와 수메르가 고려와 조선으로 함께 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다.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가 어지러운 맥락으로 어려워진 진 건 그래서였다.

홍산문화의 용모양 비취(Jade). 출처:위키미디어


아카드인들이 수메르가 아얼(阿尔:Eire)에서 오기 전 대륙의 동서 교통로를 장악하고 찻잎을 유통 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비취(翡翠:Jade)에 있었다. 수메르인들이 경면주사(鏡面朱砂:cinnabar)를 습기흡수제로 개발해 사용할 때 배달족(아카드)들은 비취(玉)를 찾아내어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강원 춘천 중도에 엄청난 규모의 신석기 유적이 존재했던 연유도 이 비취에 있었다. 춘천에는 이 귀하고 귀한 비취(翡翠)가 산업적으로 채굴되는 광산이 있었다. 춘천에서 캐내어진 비취는 가공되어 찻잎 생산 공장이 있는 홍산(紅山)으로 수출되었다. 홍산(紅山)에 거대한 찻잎 가공 산업 단지가 조성된 것은 4백 년을 주기로 변화하는 기후 때문이었다. 기후가 추워지는 한랭기에는 삼위태백과 직접 동서로 연결된 초원로는 얼어붙어 사용할 수 없었다. 태양력으로 6월 중순 전에 반드시 가공을 마치고 서쪽으로 가는 카라반의 말등에 실려 있어야 하는 찻잎들이 단오가 되도록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초원로 때문에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발생했다. 또다시 기후가 추워지는 한랭기에 들어서자 따뜻한 남쪽에 알카니(Alchani:신시)가 있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의 궁석산(窮石山)처럼 찻잎 생산을 총괄할 곳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개발된 곳이 홍산 지역이었다.

홍산문화 대표격인 능원(凌源) 우하량의 환구단 유적. 삼단으로 구성된 원형의 제단 구조가 선명하다. 출처:위키미디어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 격인 능원(凌源) 우하량(牛河粱) 유적에 다른 중국 내 신석기 문화 유적에는 없는 여신묘(女神廟)와 환구단(圜丘壇)이 존재한 연유였다. 홍산(紅山) 문화라 불리는 유적들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은 복본(復本)에 지장을 가져올까 하여 배달족이 극도로 건설을 꺼렸던 남쪽 지역의 유일한 아카드인의 찻잎 가공 무역 기지였다. 마고(麻姑) 할머니를 기리는 여신묘와 복본의 맹세를 일깨우는 환구단은 배달족(倍達族:Akkad:고려)의 상징이었다. 땅에 제사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은 방형(方形)으로 짓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壇)은 원형(圓形)으로 짓는다 하여 환구단을 원구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성(本性)을 되찾아 본향(本鄕)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복본(復本)의 서약(誓約) 역사가 엄연한 우리 민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복본(復本)이 사실상 실현 불가능해진 오늘날에도 그 복본의 서약 정신은 살아 있다. 복본의 서약을 그 실현 가능성 여부에 상관없이 우리 민족이 그토록 굳게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 서약이 품고 있는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본성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민족의식의 견지(堅持)때문이었다. 배달과 복본의 서약 역사를 모르는 서구인들이 보이지 않는 복본의 대상을 찾기 위해 존재론과 인식론에 그토록 집착한 데 반해 그 역사를 그대로 간직해 실체(Idea)를 알고 있는 우리는 복본의 실현에 힘쓸 뿐 형상으로는 이미 사라진 복본의 대상과 의의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런 우리가 이제 그 맹세를 잊어 환구단을 배달과 복본 서약의 역사를 모르는 서구인들과 중국인들처럼 원구단이라 부른다면 배달족 후손들로서 선조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제는 돌아갈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홍익인간 제세이화라는 본성까지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진대는 돌아갈 환을 둥글 원으로 새겨서는 안 될 일이다. 굶주릴지 언정 풀은 먹지 않는다는 배달 맥족의 후손들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다.

출처:위키미디어


초원로라고 불렸던 배달족이 개척한 대륙의 동서교통로를 처음 달린 건 말(馬)이 아니었다. 말(馬) 같은 큰 동물을 타고 다닐 만큼 되려면 수메르인들이 이룩한 농사혁명이 완성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말(馬)을 키우고 제대로 관리한다는 건 엄청난 비용과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되는 분야였다. 따라서 말(馬)을 유지할 정도의 경제규모를 갖기 전까지 찻잎을 싣고 초원로를 달린 건 순록(馴鹿:reindeer)이었다. 웬만한 추위에는 아랑곳 않는 순록(馴鹿)이었기에 어떤 경우에도 삼위태백을 떠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으려 한 배달족에게는 안성맞춤인 짝이었다. 오랜 세월 배달족과 함께 한 순록(馴鹿)은 어느덧 배달족의 상징처럼 되었고 그래서 순록을 뜻하는 려(麗) 자가 들어간 고구려(高句麗)란 국호가 자연스레 생겨났다. 배달족은 그 나라 이름을 사랑했다. 고구려는 또한 후일 장수왕이 이름을 바꾼 고려(高麗)와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구(句) 자를 삽입한 것이 아니었다. 구(句) 자를 국호에 넣은 이유는 고구려가 이두(二頭) 또는 사두(四頭) 마차(馬車)를 한 사람의 마부가 운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권총형(拳銃形) 동기(銅器)를 발명한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평양에서만 발견된 이두및 사두마차에 사용되는 마차운전용 부품인 권총형 동기. 조선 고대의 마차라는 논문에서 권총형 동기의 쓰임새를 자세히 분석해 놓았다. 출처:KBS 역사스페셜


권총형(拳銃形) 동기(銅器)란 일본 와세다대 고고학과 오카우치 미추진(岡內 三眞) 교수가 조선 고대(古代)의 마차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두(二頭) 또는 사두(四頭) 마차(馬車)를 한 명의 마부(馬夫)가 몰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인데 생긴 모양이 권총 방아쇠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지금까지도 중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오직 우리나라 평양에서만 발굴된 이두 또는 사두마차에 쓰이는 부속품이었다. 글귀라고만 뜻을 새기는 구(句) 자에는 장식, 병기의 이름, 당기다, 잡아당기다는 글귀라는 뜻과는 전혀 맥을 달리하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구(句) 자의 갑골문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구(句) 자는 말뚝에 끈을 묶어놓은 모양을 즉 끈으로 말뚝을 휘감은 모습을 상형한 글자였다. 즉 마부(馬夫)가 말들을 조종할 때 쓰는 고삐 줄을 권총형 동기에 휘감은 모습을 표현한 글자가 구(句) 자였다.

오카우치 미추진 와세다 고고학과 교수가 직접 권총형 동기의 쓰임새에 대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 주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차용 부품이 고구려에서 발명된 것은 사실 순록 때문이었다. 여러 마리의 말들이 끄는 마차를 한 명의 마부가 조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권총형(拳銃形) 동기(銅器) 같은 마차 부품이 발명된 것은 배달족이 말을 사용하기 전 순록을 사용해 수레를 끌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말보다 힘이 부족한 순록이었기에 일정한 무게가 나가는 짐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마리의 순록에게 동일한 수레를 끌게 해야 했는데 이럴 경우 여러 마리의 순록들을 한 방향으로 달리도록 조종할 수 있는 여러 고삐(縻)를 통합해 주는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여러 순록들에게 제각기 물린 재갈(蘄)과 등에 올려놓은 굴레(羈)에 연결된 고삐들을 한 고삐처럼 마부가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권총용 동기였다. 등자(鐙子)와 더불어 배달족이 자랑하는 찬란한 마상 문화를 꽃피운 발명품이었다. 지금도 북상(北上) 해야 할 동포들을 기다리며 드넓은 땅을 지키고 있는 예벤키(Evenk)족과 에벤(Evens)족은 궁석산(窮石山)과 아얼산(阿尔山)에 여전히 터 잡아 순록을 타고 다닌다. 언제든 복본 할 준비를 하며 초원로를 주름잡았던 배달족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초원로에는 더 이상 순록이 달릴 수 없게 되었다. 초원로를 통해 교역되는 물자와 물량이 순록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말들과 낙타 그리고 나귀들이 초원로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었다. 후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메디아(Media:Medes)가 삼위태백 지역에서는 마한(馬韓)이 각각 말 사육과 관리에 특장을 지닌 전문 부족으로 부각되어 말(馬)을 책임진 나라로 나서게 된 연유였다.

출처:KBS 역사스페샬


기후가 4백 년 주기로 추워졌다 따뜻해지기를 반복하자 기원전 4천 년에 기후변화에 따른 홀로코스트를 아얼에서 겪은 조선(수메르)인들은 필사적으로 기후 자료를 축적해 분석했다. 기후 변화로 추워지면 삼위태백에서 나일강까지 찻잎들을 수송하는 대륙의 동서 교통로는 얼지 않은 남쪽으로 이동해야만 했고 그렇게 되면 일부 구간에서 눈 덮인 산맥들을 지나다녀야 했다. 눈 덮인 산맥을 횡단하는 것보다 얼지 않는 강과 바다로 다니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빠르고 비용이 덜 들어간다는 걸 조선(수메르)인들은 분석해 냈다. 기후가 다시 따뜻해지면 대륙의 동서교통로는 역시나 배달(아카드)인들이 오랜 세월 개척해 놓은 초원로로 돌아가면 되었다. 강과 바다를 통한 해상교역로는 배달족의 통제를 받지 않는 온전히 조선족이 지배하는 그들이 개척한 무역로였다. 배달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동서 교통로로 계속 유지하려면 습한 바람과 염분이 많은 바다에서 쉬이 산화하는 찻잎을 보호해 줄 그 무엇이 절실히 필요했다. 훨씬 더 정교하고 강력한 습기제거와 온도 통제가 이루어져야 했다. 점토(粘土)로만 토기를 빚고 그 토기를 구워 강도와 습기제거를 강화한 도기(陶器)를 만들어 내기 위해 가마를 개발하고 끝내 고령토를 발견해 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자기(瓷器)로 계속 혁신을 이어간 이유였다. 비취와 청금석과 경면주사의 광산을 개발해 다중 습기제거제로 사용한 까닭이었다. 염분과 습기로 가득 찬 바다에서 더 빨리 벗어나기 위해 돛과 도르래가 개발되었고 바다 파도를 견디는 능파성(凌波性)을 높이고 속도를 올릴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구조를 가진 첨저선(尖底船)과 침몰을 피할 수 있는 수밀격벽 (水密隔璧) 구조가 개발되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다에서 방향을 잡기 위해 나침반이 개발되었다. 수메르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황제(黃帝)가 배달족 치우와의 전쟁에서 지남거(指南車)가 등장한 이유였다. 중국의 과학 문명 발전은 조선(수메르)인들이 배달족의 탄압을 벗어나 살기 위해 이런 혁신들을 중국에서 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셉 니덤이 물었을 때 루궤이전(鲁桂珍)은 배달과 복본의 역사를 몰랐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니덤의 질문은 그래서 퍼즐(puzzle)이 되었다. 마땅치 못한 일이다.


청금석(Lapis lazuli) 개발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산맥들을 두루 탐험하게 된 조선인(수메르)들은 결국 지금의 중국 서부지역인 청해성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황하와 장강의 원두(源頭)를 모두 만나게 되었다. 태호복희로 시작된 아얼(阿尔:수메르)인들의 중국 진출은 지금의 쓰촨 성 아안 천태산에서 천수에서 태어난 신농이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는 일대 쾌거로 이어졌다. 신농이란 이름으로 중국 사서에 기록된 수메르인들이 차나무를 발견해 냄으로써 배달족이 독점 지배하던 차시장(茶市場)의 일극 체제가 드디어 깨지게 되었다. 그토록 소원했던 찻잎을 조선(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재량으로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배달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중국 사서에 신농(神農) 혼자 한 일로 기록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완성은 사실 당시 중국에 진출한 모든 조선(수메르)인들의 희생적 실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단 지성이 발휘되는 유일한 집단이 조선(수메르)인들이었다. 신농(神農) 한 사람이 모든 풀들과 모든 열매들을 빠짐없이 다 먹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몇 번의 중독은 견뎌 살아날 수 있겠으나 사서에 기록된 그 많은 중독을 이겨내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자세하고 세밀한 정보들을 한치의 착오 없이 집단적으로 공유해 차원을 계속 높여 가는 발전들을 누적시킬 수 있었던 건 문자 때문이었다. 획득된 정보를 오류 없이 공유하려고 만든 게 문자였다. 신농(神農) 세대의 희생적인 활약으로 수메르인들은 삼성퇴(三星堆) 문명을 시작으로 찬란한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삼성퇴 유적에서 발굴된 청동으로 만든 생명의 나무. 출처:위키미디어


수메르인들이 설형(楔形) 문자를 개발해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기록하는 것을 확인한 배달족은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다. 수메르인들은 복본의 맹세를 지키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고 배달족은 생각했다. 복본을 위해 떠나자고 할 때 안된다고 반대할 집단을 더 크고 강력하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수메르를 제어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고구려의 전 부대가 사르곤의 지휘로 메소포타미아로 원정길에 나섰다. 아카드 제국이 메소포타미아에 세워진 연유였다. 사르곤 대왕을 내세운 고구려군은 수메르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번성했던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을 짓밟은 사르곤 대왕이 출발했다던 그들의 도시, 아카드가 아직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지 않은 건 아카드라는 도시 자체가 원래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르곤이 이끄는 군대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군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수메르를 정복한 사람들은 아카드 제국의 군인들로 남아 메소포타미아 북부 카부르 지역에 정주했다. 후일 미탄니가 건국하게 되는 연유였다. 정복된 수메르 지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탈출해 카라치와 인더스강 유역을 따라 이동했다. 탈출한 수많은 수메르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차나무를 찾아 동쪽 끝 아사달까지 이르렀다. 단군 조선의 개국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아 있던 배달족은 궁석산을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미탄니로 간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복본을 위한 전초기지로 끝까지 지원했던 나일강의 이집트인들에게 찻잎들을 보내려 거쳐가는 통과지대로 배달족들이 발전시킨 곳은 중국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오늘날처럼 발전한 지역이 된 곳이 중국이었다. 중국은 중국 사람들이 창의적이어서 문명이 꽃피운 곳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이 배달족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곳이었기에 그렇게 된 곳이었다. 그것 또한 차나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악스럽게 덤벼드는 수메르인들에게 밀려 계속 쫓겨나고 있던 배달족이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패권 경쟁에 나설 수 있게 된 건 경면주사를 습기제거제로 뿐만 아니라 온도 측정용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행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수메르인들에게 밀리고 밀려 고사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궁벽한 처지를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이었다. 획기적인 일이었다. 소금 광산에서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독가스 누출을 알려주는 카나리아 새처럼 경면주사에서 수비를 통해 진사와 분리된 수은이 찻잎들이 가공되고 보관되는 곳의 온도가 오르는 것을 정확히 알게 해 주었다. 온도가 오르면 부피가 커지는 수은의 특성 때문이었다. 고구려에 그 비싼 주사를 안료로 사용하는 벽화가 여기저기에 그토록 많이 남아있는 건 모두 이때 경면주사 광산을 찾아내 수비법으로 수은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수은은 부르는 게 값인 국가 전략 물자였고 미래 세대들이 두고두고 곶감 빼먹듯 빼먹으며 살아갈 수 있는 먹거리 산업이었다.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남다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기원전 1285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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