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炒靑:볶아주기)과 유념(揉捻:주무르고 비틀기), 그리고 건조(乾燥:말리기)라는 현재와 같은 차잎(茶葉) 가공공정(工程)의 대강(大綱)이 확립된 건 청해진 대사(大使) 장보고(張保沽)가 암살된 841년 이후였다. 그전에는 차잎 채취후 위조(萎凋)라는 차잎을 시들리는 작업을 한 후 시루(甑)에 차잎들을 넣고 찜통을 가열해 생긴 뜨거운 김으로 차잎들을 찌는 증청(蒸靑)을 하고 이렇게 시루에서 쪄진 찻잎을 다시 절구에 넣어 절구공이로 찧어 분쇄해 준 후 여전히 뜨거운 찻잎들을 원형(圓形) 또는 장방형(직사각형)의 틀(주형:鑄型) 안에 넣어 단단하게 압축(긴압:緊壓)하는 성형(成形)을 해 준 후 건조(乾燥)해 주는 가공공정이 수천년동안 행해진 대강(大綱)이었다. 이 공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차잎 속에 들어있는 산화효소를 파괴해 차잎의 산화(酸化)를 중지시켜 차잎의 약효를 유지시켜 주는 시루에서 쪄주는 증청(蒸靑)이었다. 그리고 성형과정에서 동그랗게 원형으로 성형된 차(茶)는 청태전(靑苔錢:푸른 이끼가 낀 돈차)이라 불렸고 네모나게 성형된 차(茶)는 청전차(靑磚茶)라 불렸다. 둘 다 건조를 하는 동안 푸른 이끼가 낀 것처럼 표면이 푸른색을 띠었고 그래서 둘 다 화폐로 쓰였다. 뜨거운 수증기로 처리된 찻잎을 긴압(緊壓))했기에 건조되는 동안 그 속에선 미생물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은 오늘날 실험을 통해 효모균, 흑국균,회녹국균,리조프스 그리고 페니실린(penicillium)으로 밝혀졌다.(중국 호남성 농업대학교)
청전차는 명도전(明刀錢)의 오리지날 디자인이었고 청태전은 반량전(半兩錢)의 그것이었다. 명도전은 칼을 모방한 게 아니라 당시 화폐처럼 통용되던 네모난 청전차를 모방한 것이다. 청전차(靑磚茶)라고 벽돌 전(磚)자를 썼다 해서 벽돌처럼 두껍지 않았다.(사진 참조) 하루를 굶을 순 있어도 하루도 청전차를 안 마실 순 없다는 몽골에서는 청전차 12편에 양머리 하나가 거래되고 양모,모피는 물론 낙타까지도 청전차로 거래된다. 전남 장흥의 청태전은 아예 전차(錢茶)라고 불렸다. 화폐처럼 쓰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반량전, 오수전(五銖錢) 같은 주화(鑄貨)를 엽전(葉錢)이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우리 민족이 증청과 주형긴압(鑄型緊壓)으로 제조한 후 전세계로 수출한 청태전과 청전차때문에 저 멀리 유럽에서는 부드러운 재료를 단단히 다지거나 틀에 넣어 만드는 주조(鑄造)를 할 때 사용하는 주형(鑄型:거푸집:틀) 이라는 뜻의 mo(u)ld라는 단어에 곰팡이라는 뜻이 함께 있는 이유였다. 시루에서 찻잎을 찌고 절구로 빻은 후 주형으로 긴압해 만드는 수천년동안 이어져 온 전통적 차 제조방법이 사라지게 된 것은 당 태종때부터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격화된 실크로드 상방(商幇)과 해양무역상단과의 경쟁 격화때문이었다.
이세민을 지원해 당나라 황제로 만든 실크로드 상방(商幇)은 그런 당 태종을 내세워 현장(玄奘)을 불교계의 황제로 만들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란 칭호는 불교계가 아닌 당 태종이 내려준 것으로 결국 이 권위를 바탕으로 현장의 제자 규기(窺基)는 법상종(法相宗)을 개창해 서안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를 본사로 삼아 천태종단(天台宗團)에 대한 무자비한 제거작업을 682년 죽을 때까지 계속 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法華經)을 교의(敎義)로 삼는 천태종단은 오랜 세월 해양무역상단과 함께 해 온 불교종파였다. 규기의 자은종파(慈恩宗派:법상종의 다른 이름)를 내세운 실크로드 상방(商幇)의 척살(刺殺)을 피해 천태종단은 화엄종(華嚴宗)으로 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 태종의 압력으로 박혁거세때부터 혁혁했던 전통의 신라 차산업(茶産業)을 포기해야 했던 태종무열왕의 한(恨)을 잘 아는 아들 문무왕이 법상종의 신라 진출을 막기 위해 의상대사(義湘大師)에게 화엄종단의 절들을 창건해 줄 것을 부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신 화엄종의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명광전(大光明殿)이 아니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무량수전(無量壽殿)으로 유명한 정토종(淨土宗)의 부석사(浮石寺) 를 개창한 것은 법상종 뒤에 숨은 실크로드 상방의 무자비함을 그도 익히 알고 있어서였다. 결국 의상대사의 희생적인 불사로 법상종의 신라 진출은 경덕왕(景德王)때로 미뤄질 수 있었다.
장보고의 암살을 신호탄으로 시작된 당 무종때 벌어진 5년간(842-846)의 천태종단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후일 연호(年號)였던 회창을 써서 회창폐불(會昌廢佛)로 불리는데 이 탄압으로 5만여곳의 절이 파괴되고 50만명의 관계자들이 차산업(茶産業)에서 일자리를 잃어 실업자가 되었다 (훼불사륵승니환속제(毀佛寺勒僧尼還俗制). 이렇게 한순간에 갈 곳 없이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중 일부가 헌안왕(憲安王)의 적극적인 유입책으로 신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들이 신라 헌안왕의 간청에 따라 시작한 일은 장보고 암살 과 청해진 철폐 이후 지리멸렬해 진 신라 차산업(茶産業)의 복원이었다. 청해진 해체 후 엄청난 경제 침체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야야만 했던 궁예의 아버지 헌안왕은 결단을 내려 당나라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쫒겨난 천태종단의 차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한국 역사에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청태전으로 유명한 전남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가지사(迦智寺)에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나타나면서 본격화되었다. 840년 신라에 귀국했다는 선사(禪師)는 860년 청태전으로 유명한 장흥의 가지사(迦智寺)를 보림사(寶林寺)로 바꿔 중창했는데 이 개명(改名)은 이제 삼한(三韓)이 더이상 시루를 이용한 증청긴압으로 차(茶)를 만들지 않고 무쇠 가마솥을 이용해 초청유념(炒靑揉捻)으로 차(茶)를 제조한다는 걸 뜻했다. 제주 고산리식 토기와 빗살무늬토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루를 이용한 증청(蒸靑), 절구와 주형(鑄型)을 이용한 긴압과 성형으로 만들어지는 고형차(固形茶) 생산을 중지하고 무쇠솥을 이용해 차잎을 볶는 초청(炒靑)과 사람의 손으로 차잎을 주무르고 비트는 유념(揉捻)을 중심으로 차(茶)를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주철(鑄鐵)이라 불리는 무쇠를 제철하고 다루는 기술 수준을 신속하게 보급하기 위해 불상을 주철로 만드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석재와 목재 그리고 청동으로만 만들어져 왔던 불상이 그때까지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주철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유였다. 주철로 만든 불상이 헌안왕때부터 고려초기까지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이유였다. 이렇게 주철불상이 대거 등장한 것은 구리가 부족해서도 철이 양산되어서도 불교가 대중화 되어서도 아니었다. 초청유념(炒靑揉捻)으로 만들어진 차(茶)들은 이제 약효(藥效)보다는 고소한 맛이 더 중요한 기호품(嗜好品)이 되었다. 가지사(迦智寺)가 보림사(寶林寺)로 잊혀졌 듯 청태전은 고소한 녹차(綠茶)로 잊혀졌다. 차(茶)는 이제 더 이상 바그다드 약국에서 갈아서 팔던 약(藥)이 아니었다. 차엔 이제 더이상 페니실린이 들어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증기로 차(茶)를 만들어 내는 법을 잊어 버려 시루를 떡 만들 때나 쓰는 그릇이라고 생각할 때 고려 현종은 차(茶)가 약이었다는 걸 좁고 더운 토굴 속에서 깨달았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민황(悶黃)이라는 과정을 유념(揉捻) 작업 후에 추가함으로써 황차(黃茶)를 만들어냈다. 볶아주는 초청(炒靑)과 주무르고 비트는 유념(揉捻)을 마친 찻잎들을 벽돌크기로 모아 천이나 종이로 싸고 그걸 따뜻한 곳에 일정시간 두면 찻잎들은 황색을 띄는데 이런 찻잎을 물에 타 마시면 녹차와는 달리 떫은 맛이 없고 부드러운 맛이 나왔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이 차(茶)를 마시면 어지간한 병들이 낫는다는데 있었다. 찻잎들을 벽돌크기로 모아 천이나 종이로 싸고 그걸 따뜻한 곳에 두면 찻잎들은 찻잎들 자체가 가진 수분과 주위의 따뜻한 온도가 어우러져 벽돌 모양으로 모아진 찻잎들안에서 미생물들이 자라게 되는데 그중엔 페니실린을 만드는 푸른곰팡이도 있었다. 황차 제조에 필요한 최소한의 민황(悶黃) 과정을 거치게 되면 페니실리움이 효모와 흑국균 다음으로 찻잎에 많이 있는 미생물이 되어 있었다. 황차에 거란인들을 포함해 전세계인들이 열광한 건 바로 그 차에 있는 페니실린 성분 때문이었다. 연개소문과 당나라편에서 자세히 논하겠으나 고구려가 수와 당에 의해 그토록 집요하게 침략 당했던 건 목단강에서 만들어지는 황차때문이었다. 고려사는 현종이 복원한 황차 제조 기술을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으로 기록했다. 차잎들을 벽돌 크기로 모아서(收) 베나 이불 따위로 싼 후(斂) 곳간(倉)에 일정시간을 두어(養) 황차로 만드는 법이었다. 고려는 황차로 인해 문종 12년(1058) 에 이르면 이미 “예악과 문물이 흥한지 오래라 상선왕래가 끊이지 않고 진귀한 보물이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에서 도움 받을 것이 없는” (고려사 기록) 상태가 되었다. 발효차인 황차는 쉽게 변질되는 녹차와 달리 오랫동안 먼 길을 변질 없이 수송 할 수 있는 진귀한 차(茶)였다. 당시 바그다드와 다마스커스에서 황차는 약(藥)으로 판매되었다. 송나라 철종의 대고려 투자결정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정책이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