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阿逹羅王即位四年丁酉 東海濵有延烏郎細烏女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 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 (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邉邑小王, 而非真王也). 細烏恠夫不來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献於王 夫婦相㑹 立爲貴妃.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仐何歸乎, 雖然, 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寳,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째인 정유(丁酉)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郎),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아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이는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그 전후로 신라인으로 왕이 된 자는 없으니, 이는 다만 변경에 있는 마을의 작은 왕이고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그를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는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갔는데, 바위가 또한 전과 같이 세오를 태워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의아하게 여겨 왕에게 나아가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日官)이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왔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았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니, 이제 어찌 돌아가겠소? 그렇지만 짐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오라고 하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어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고 불렀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이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卷) 1, 기이(紀異) 2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로만 알려진 이 사건은 그러나 설화가 아니었다. 전 세계에 찻잎을 제공해 급변하는 기후변화에도 세계 질서를 그래도 유지시켜 주던 부상국에 일어난 상상불허의 지각(地殼)변동이었다. 부상국(扶桑國)을 구성하고 있던 두 축인 근역(槿域)과 제잠(蹄岑)이 바다를 건너야만 오갈 수 있는 나라로 완전히 둘로 쪼개진 사건이었다. 양산 단층 지역인 포항 호미반도에 붙어있던 지금 아오모리현의 쓰가루(Tsugaru: 津軽) 반도(半島) 서변(西邊)의 쓰가루 국정공원(国定公園)이 있는 돌출 반도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근역과 제잠은 바다를 사이에 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버린 사건이었다. 호미반도와 쓰가루 돌출반도가 붙어있는 지리적 특징으로 근역(槿域: 槿華鄕)은 부상국에서 찻잎을 생산하는 지역이라기보다는 주로 제잠(蹄岑) 지역에서 생산된 찻잎을 넘겨받아 차(茶)로 만들어 대륙으로 수출하거나 이들을 압착해 찻물을 만들어 지역에 공급(堇)하는 나라였고 실제로 찻잎을 생산해 전 세계에 공급하던 지역은 제잠(蹄岑)이었는데 이런 제잠 지역이 근역과 완전히 떨어져 큰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 되어 버린 지각이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기존에도 바다를 통해 찻잎을 제잠으로부터 수입해 왔기에 배(舟)를 가지고 육안으로 보이는 가까운 섬과 섬 사이를 항해하는 데는 익숙한 중국 동해안 연안지역 사람들에게조차도 이제 제잠은 찾을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그들 입장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제잠(蹄岑)에서 수입되는 찻잎들을 무역하며 살던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에 생계를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제잠에서 생산되는 찻잎을 기반으로 한고조 유방의 농간으로 흉노에게 빼앗긴 실크 로드 대신 마린 로드를 개척해 쿠샨 제국을 일으킨 월지(月支)에게 제잠의 지각이동은 흉노와 같은 재앙이었다. 제잠에 건설해 놓은 투무리(Tumuli), 스투파(Stupa) 같은 찻잎 가공 시설들은 지각이동의 여파로 모두 붕괴되어 못쓰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손상되지 않은 근역(槿域: 槿華鄕)에 있는 기존 찻잎 가공 시설도 제잠이 바다 건너 섬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역시 마찬가지로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제잠(蹄岑)에서 채엽된 찻잎들을 기존에 아무 문제 없이 가공하던 근역(槿域)의 차(茶)가공시설들은 몇 배나 길어진 수송거리로 인해 산화(酸化)되어 버린 찻잎들을 가공해 제대로 된 차(茶)들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 먼바다를 배(舟)로 운반해 왔기에 해풍(海風)에 노출된 찻잎들의 산화(酸化)는 예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고 따라서 근역의 기존 가공공장에서는 처리할 수 없었다. 심하게 산화(酸化)된 찻잎을 차(茶)로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시설이 근역(槿域: 槿華鄕)엔 없었다. 찻잎의 산화를 막기 위해 찻잎을 담아 운반하는 토기(土器)에 소위 옷을 입히는 기술인 유약(釉藥)이 개발된 것도 이때였다. 낙양에서 장석(長石)이나 규석(硅石) 또는 석회석(石灰石)을 갈아 물에 녹인 것에 납(鉛)을 섞어 토기 표면에 바르는 유약(釉藥)인 연유(鉛釉)를 개발하고 여기에 구리와 철을 섞어 토기에 발라 가마(窯)에 구워냄으로써 녹유도기(綠釉陶器)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후일 자기(磁器)의 입구인 청자(靑瓷)를 만들어 내는 유약은 이렇듯 연오랑 사태로 발생한 찻잎의 과도한 산화(酸化)를 막기 위해 고안된 발명이었다.
결국 동한(東漢)과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왜는 모두 극심한 경제적 격변에 터 잡은 정치적 혼란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제잠(蹄岑)과 근역(槿域: 槿華鄕)이 붙어 있었을 때 지금의 경남 동부 해안지역으로 대거 들어온 제잠의 찻잎이 차(茶)로 가공되어 대륙으로 수출되던 집산항은 아산만과 평택만을 두루 통제할 수 있었던 직산(稷山)이었다. 직산은 당시 삼한(三韓) 전체를 통괄하는 월지국(月支國)의 왕이 도읍한 곳이었고 월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으로 불렸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한(韓)조에는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古之辰國也. 辰王治月支國.이라고 기록하여 제잠이 붙어있던 지역의 나라인 진한(辰韓)이 옛날 진국(辰國)임을 밝혀놓았다. 진한은 제잠의 찻잎이 육지를 통해 대량으로 근역(槿域)에 들어오는 요충지였기에 월지가 그곳을 직접 통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와 정약용 이전의 조선 때까지를 통틀어 백제의 도읍, 위례성은 직산(稷山)에 있었다고 알려졌던 연유였다. 정유재란 때 차(茶) 수출항을 기억한 일본이 직산을 탐했던 이유였다. 직산이 종묘사직(社稷)의 직(稷) 자를 썼던 연유고 충남 천원군(天原郡)에 있었던 이유다.
그 모든 무역망을 계획하고 건설한 월지 쿠샨(Kushan) 제국의 지도층도 더 이상 탁실라(Taxila)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연오랑과 세오녀 사건을 서기 166년에 일어난 일로 기록했으나 여러 정황상 서기 155년경 일어난 이 사건으로 부상국으로부터의 찻잎 공급이 끊기자 세계는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로마제국은 이 충격으로 서기 180년 팍스(Pax) 로마나 시대를 끝내고 코모두스(Commodus)와 군인황제시대라는 극도의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파르티아(Parthia)도 결국 서기 224년에 견디지 못하고 사산제국에게 레반트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지역의 지배권을 넘겨야 했다. 기후가 따뜻해지고 있어 모든 인류가 낙관에 넘쳐 있을 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 세계적 혼란을 초래한 사건이 연오랑과 세오녀 사건이었다. 동한(東漢)의 낙양과 간다라(Gandara)의 쿠샨제국에서 직접 건너온 과학자와 기술자들에 의해 근역(槿域)과 제잠(蹄岑: 이후 야마토)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서기 165년 고구려에서는 이런 엄청난 사변에도 불구하고 토목공사를 강행하던 차대왕(次大王)이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이끄는 반란군에 목숨을 잃고 신대왕(新大王)이 추대되어 즉위했다. 서기 166년 직산의 백제에서는 멀리 떨어진 간다라의 쿠샨제국이 아닌 낙양의 동한 왕실에서 급파된 초고왕(肖古王)이 급하게 즉위했다. 초고왕은 표류해 온 야마토 차(茶) 무역선을 나포해 찻잎을 뺏는 신라로 쳐들어가 찻잎을 회수해 오는 등 혼란을 수습해 나갔고 제잠에서는 야마타이국(邪馬臺國:야마토)이 세워져 친위왜왕(親魏倭王) 히미코(卑彌呼) 여왕이 즉위해 173년 신라의 아사달 이사금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야마토에서 떠난 차(茶) 무역선들의 엄청난 숫자가 쿠로시오 해류 때문에 원래 가기로 했던 지금의 남해안에 있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아닌 신라의 영토인 지금의 울산과 경주 심지어 영덕으로까지 흘러가 백제와 변진, 신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분쟁이 발생하고 있어서였다. 이렇게 쌓인 불만은 남해안에 퍼져 있던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로 축적되었고 결국 209년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이 발발하게 되었다.
한고조 유방에게 배신당해 흉노왕 묵돌에게 큰 화를 입은 것도 모자라 그의 아들 노상선우에게는 왕까지 잡혀 죽는 사변을 겪은 월지(月支)는 결국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 끝에서마저 쫓기게 되자 파미르 고원을 지나 힌두쿠시 산맥마저 넘어버렸다. 차(茶) 나무를 찾아 대륙의 동쪽 끝까지 갔고 거기에서 결국 사람들을 살릴 차나무를 찾아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찻잎을 공급하며 지낸 세월이 수천 년이었다. 사람들은 중국이 세상의 한 중심이어서 중국이라 하는 줄 알지만 그러나 중국은 그래서 중국이 아니었다. 동쪽 끝 부상국(扶桑國)이라 불린, 근역(槿域)과 제잠(蹄岑)에서만 자라는 차(茶) 나무에서 딴 찻잎을 대륙의 서쪽 끝까지 보내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고 그 일을 담당할 과학과 기술을 갖춘 세력은 월지 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茶) 나무가 자라는 유일한 지역인 부상국(근역과 제잠)에 나라를 세워 다스리던 월지였다. 초원로(草原路)가 점점 추워져 찻잎 수송에 문제가 생기자 새로 개척된 차(茶) 수송로가 황하 이남이었다. 차(茶) 수송에 관계된 업무들을 총괄하기 위해 황하를 경계로 남북으로 영역을 정해 각각 터 잡은 곳이 지금의 카라코룸과 천수(天水) 지역이었다.
황하 이남 지역의 차(茶) 수송을 총괄하던 한양(漢陽)이라고도 불린 그 지역을 천수(天水)라 한 것은 그 지역이 부이르(Buir) 호수 근처 아사달 조선의 연원인 천지(天池)가 있던 지역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서안(西安)이 아닌 천수(天水)가 황하 이남의 카룸(Karum:차(茶) 거래소)이 된 것은 회계(會稽:지금의 항주)를 통해 들어오는 제잠(蹄岑)의 찻잎이 장강과 한수(漢水)의 수로(水路)를 이용해 서쪽으로 보내질 수 있어서였다. 산동반도로 들어온 근역(槿域)의 찻잎이 낙양에 모였다 서안을 거쳐 서역으로 수출되었다면 절강성 회계를 통해 들어온 제잠(蹄岑)의 찻잎은 장강과 한수를 거슬러 한중(漢中)까지 들어온 후 한양(지금의 천수)으로 모여져 서역으로 수출되었다. 주(周)나라 4대 왕인 소왕(昭王)이 뜬금없이 한수(漢水)에 빠져 죽은 이유와 그 아들 목왕(穆王)이 형양(滎陽)에 호뢰관(虎牢關)을 설치한 이유는 바로 이 장강과 한수(漢水)를 이용해 한중(漢中)과 천수(天水)로 이어진 차(茶) 무역로에 대한 일부 통제권을 얻기 위함이었다. 낙양을 통제한 주공(周公)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주(周)나라의 끝없는 차(茶) 무역로에 대한 통제권 야욕은 결국 주(周) 유왕(幽王)의 포사도(褒斜道) 건설을 통한 한중(漢中)으로의 침공이라는 무리수를 두게 했고 이 정벌에서 얻은 미인 포사 褒姒)때문에 유왕은 비명횡사했고 이후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은 모두가 아는 역사다. 이렇게 중국은 부상국의 찻잎이 대륙 서쪽으로 수송되어 가는 중에 지나가는 곳이어서, 또 도중에 있는 곳이어서 게다가 그토록 집요하게 중심적 역할을 하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중국은 당시 찻잎이 생산되는 지역도 아니었고 초원로(Stppe Road)가 얼어붙기 전까지는 찻잎 무역로로도 이용되지 않았던 땅이었다.
계속적으로 따뜻해진 기후변화로 인해 불규칙한 범람(氾濫)을 하는 황하 때문에 고생하던 중국 사람들이 인산(陰山) 산맥 멀리 동북쪽으로 대흥안령 산맥으로 흘러가던 황하의 물줄기를 아예 남쪽으로 돌려버리는 어머어마한 역사를 성공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토 고원을 휘감고 돌지 않아 황토가 없는 일반 강이었던 황하가 계속해 따뜻해진 기후로 상류 산악 지역의 만년설이 녹아 생긴 엄청난 수량에 음산 산맥의 동쪽 가장자리의 낮은 골짜기들에서 범람(氾濫)을 일삼자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던 황하강변의 사람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하(夏)왕조 시조인 우(禹)를 중심으로 산을 허물고 바위를 깨고 땅을 파 황하의 물길을 범람할 수 없는 계곡 쪽인 토그토흐(togtoh: 托克托)현(縣)의 남쪽 방향으로 돌려놓아 버린 것이었다. 남쪽으로 흐르던 황하가 진령산맥에 부딪쳐 동쪽으로 흘러 발해로 빠져나가자 새로이 황하가 흐르게 된 중원 지역은 축복의 땅이 되어갔다. 게다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후가 다시 바뀌어 급속히 추워지자 매년 청명(淸明)부터 채엽하기 시작해 오월 단오(端午) 전에 모든 가공을 끝마치고 단오 이후엔 대륙 서쪽으로 수송되는 찻잎들이 초원로(草原路)로 수송중에 얼어버리는 일들이 발생했다. 결국 추위를 피해 그동안 차(茶) 무역로로 부동의 지위를 누려왔던 초원로(Steppe Road) 대신에 따뜻한 남쪽 지역에서 운반하는 방안이 착수되었다. 그때부터 중국은 거의 모든 부상국의 수출용 찻잎들이 지나가는 곳이 되어 갔고 그래서 결국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지역이 되었다. 황하의 새 수로를 뚫었다(뚫을 곤 丨) 해서 또 수송 중인 찻잎이 지나가는 도중(途中)인 지역이라 해서 중국이라 불렸다. 그런 중국이 서한(西漢) 선제(宣帝)시절 사천 천태산 몽정산에서 인공적으로 차(茶) 나무를 재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찻잎 생산국이 되었고 급기야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찻잎 생산 종주국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차(茶) 산업을 강박으로 포기시킴으로써 부상국이 가지고 있던 차(茶) 종주국의 지위까지 빼앗아 버렸다. 동아시아 역사의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황하를 토그토흐(togtoh: 托克托) 현(縣)에서 정남향으로 흐르게 변류시킨 우(夏禹)는 그 공으로 중국 역사 최초의 세습(世襲)왕조 국가인 하(夏)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그 후 급작스럽게 추워진 기후는 중국에게 얼어붙은 초원로 대신 더 많은 찻잎 수송을 맡을 수 있게 해 주었고 그에 따라 중국은 찻잎 수송 산업과 관련된 여러 과학 기술들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중국 지역에서 배와 수레, 도자기와 종이, 나침반과 화약들을 발명해 낸 것은 모두 이 찻잎 수송 사업을 독점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노력들은 결국 중국을 찻잎 수송의 경유지 중의 하나가 아닌 반드시 경유(經由) 해야 할 필수 국가가 되게 했다. 낙양의 탄배(炭焙)와 녹유도기(綠釉陶器)는 당시 그런 중국의 상징과도 같은 과학기술이었다.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자신들을 화하족(華夏族)이라고 하여 차(茶) 산업 종주국인 근화향(槿華鄕: 근역(槿域)의 다른 말)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는데 하 왕조의 시조인 우와 마지막 왕인 걸왕은 그런 노력의 시조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夏) 나라 시조인 우(禹)가 말년에 장강 하류 지역과 가까운 전당강 하구인 회계(會稽:지금의 항주 杭州)에서 죽어 그곳에 무덤(大禹陵)이 있는 연유는 장강의 치수 때문이 아니라 부상국인 제잠(蹄岑)에서 생산된 찻잎이 바닷길로 들어오는 곳이 회계(會稽)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영파(寧波)인 명주(明州) 지역 해안에 수도(水道 :waterway)가 아닌 채널(茶道 :channel)로서 라두(螺頭:Loutou) 채널(channel), 불도(佛渡:Fodu) 채널, 우비산(牛鼻山:Nubi Mt.) 채널이라는 차(茶)가 운반되는 뱃길(水道)이 세 개나 되고 두양항(頭洋港: Touyang Harbour)을 필두로 총 6개의 차(茶)가 하역되는 하버(Harbour: 茶港)가 존재하는 이유는 제잠에서 수입되는 찻잎들을 실은 선박들이 이들 뱃길과 항구를 통해 들어와 영파(寧波)와 여조(Yuyao 余姚市), 항주와 호주(Huzhou 湖州市), 태호(太湖)와 격호(Ge Lake 滆湖), 상주(Changzhou 常州市)와 단양(Danyang 丹阳市)을 거쳐 진강(Zhenjiang 镇江市)에 이르러 장강 수로로 별도의 하역작업 없이 바로 들어설 수 있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회계(會稽)라는 지명도 인계자와 인수자가 만나(會) 서로가 가지고 있는 지절(持節)을 맞춰보고(稽) 거래가 정확한지 확인하는(稽) 곳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었다.
앞서 열거한 영파(寧波)인 명주(明州) 에서부터 진강(Zhenjiang 镇江市)까지 모든 지역들은 강과 운하와 호수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연결은 하나라 우왕 때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뱃길로만 움직이는 이 교역로는 그래서 습기(濕氣)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큰 현안이었고 습기 제거에 특장(特長)이 있는 옥(玉)과 뱀과 벌레 퇴치에 특별한 효과를 내는 경면주사(鏡面朱砂)가 나라의 전략물자가 된 것은 당연했다. 진시황릉이 수은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찻잎 보관 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뱀들과 찻잎을 갉아먹는 벌레들을 퇴치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했던 경면주사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일본 고분의 특징이라는 바로 그 무덤 안 돌벽에 칠해져 있는 빨간 칠(漆)의 정체는 찻잎 냄새를 맡아 반드시 기어 들어오는 뱀들과 벌레들을 특유의 냄새로 퇴치하는 역할을 했던 경면주사(朱砂)였다. 황하수은(HgS)인 주사(朱砂)는 황화합물이었기에 역시 황화합물인 마늘과 양파에서 나는 자극성 강한 특유의 냄새를 발생시켰다. 알리신(Allicin)이라는 성분을 가지고 있어 페니실린과 테라마이신보다 더 강력한 살균력을 보여주는 마늘의 약효를 이미 알고 있던 월지는 비슷한 냄새가 나는 주사(朱砂)에게서 동일한 효과를 기대했었다. 보관 중인 찻잎들에게서 피어나는 곰팡이들은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사(朱砂)는 찻잎의 곰팡이를 죽이는 살균 효과는 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벽에 칠해진 주사(朱砂)는 찻잎들이 보관된 공간에 참기름과 송로버섯(Truffle)에서 나는 향(香)을 제공해 주었다. 지중해 몰타섬 석조 신전의 내부 돌벽에 남아 있는 빨간 칠은 경면주사였고 곰팡이와 뱀을 막기 위해 칠해진 것이었다. 몰타섬의 신전들은 지중해 동서 찻잎 무역을 중계하기 위해 지어진 거대한 찻잎 저장고였다. 조그만 틈이라도 생길라치면 몰려드는 뱀들과 벌레들로부터 찻잎을 지키기 위해 채택된 획기적 방법이 경면주사로 만든 안료(顔料)로 습기 흡수에 특장을 가진 실리카 돌들로 지어진 찻잎 저장고의 벽들을 칠하는 것이었다. 주사(朱砂)로 칠해진 돌벽이 찻잎의 향기를 조절하는 탄배(炭焙)와 같은 역할도 해주고 있었다.
중원이라 불리는 중국 역사의 주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장강 남쪽으로 벗어나 있는 동중국해 연안 지역이 후일 청자(靑瓷)를 개발해 내는 용천요(龍泉窯) 같은 첨단 화학공업의 요람(절강성)이 되고 오늘날 구라파(歐羅巴)의 패권을 가능케 한 신대륙 발견의 일등공신인 포르투갈의 카라벨선 원조가 되는 격벽이 설치된 첨저선을 처음 개발했던 첨단 조선산업의 원천(복건성)이 된 근본적 힘은 바로 찻잎을 수출하던 제잠(蹄岑)이 대만 남단까지 뻗어 있어 회계를 비롯한 태주 온주 복주 같은 찻잎 수입항(harbour)이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회계(會稽)와 제잠 간의 바닷길은 대명혼일도에서도 잘 나타나있듯 두 지역 사이에 있는 섬들로 인해 중간에 섬들이 하나도 없는 근역(槿域= 槿花鄕)과 산동반도 사이의 바닷길을 포함해 다른 항구들과의 그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던 절강성의 동중국해 연안 지역은 그러나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 나온 바위 이동 사건으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동으로 제잠(蹄岑)이 근역(槿域)과 분리되며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동북쪽으로 이동해 버렸기에 전 세계 찻잎 시장에는 어마어마한 충격이 가해졌다. 그 여파로 중국에서는 동한(東漢)이 망하고 곧이어 조조와 유비, 손권이 겨루는 삼국시대가 도래했고 공급되던 최저한의 차(茶)마저 끊기자 차(茶)를 확보하기 위해 차(茶)가 수송되는 중국으로 남하(南下)해 차(茶) 확보에 혈안이 된 선비(鮮卑)족과 갈(羯)족, 흉노등이 활개 치는 오호(五胡) 십육국시대로 접어들어 중원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수당(隋唐)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4백 년간의 분열이었다.
찻잎 생산을 맡은 제잠(蹄岑) 말고 찻잎을 가공 생산하는 일을 맡은 근역(槿域)에는 꼭대기에 스투파(Stupa)가 설치된 계단식 피라미드인 지구라트(Zigurat)와 챔버(chamber)라 불린 원통형 방(房)과 방형(方形)의 공간을 널이라 부른 지붕이 있는 통로(回廊)로 연결한 후 작은 돌들과 흙으로 덮은 투무리 그리고 챔버만 있는 스투파 같은 최고의 찻잎 가공 시설들을 갖춘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된 이런 시설들은 찻잎에 가장 안 좋은 고온과 다습을 통제하기 위한 것들이었는데 그래서 무역로 요지 요지마다에 건설되어 있었다. 그렇게 촘촘하게 설계되고 건설된 차(茶) 공급망이었다. 그런데 그 공급망에서 찻잎을 생산하는 제잠이 근역(槿域)에서 떨어져 나가 바다를 항해해야 닿을 수 있는 섬이 되어버린 거였다. 게다가 근역(槿域)과 제잠 사이에는 쿠로시오라는 빠르게 흐르는 해류가 그것도 동북방향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이미 재생 불가로 파괴된 제잠의 찻잎 가공 시설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곧 한계에 봉착한 건 끊임없이 흔들리는 땅 때문이었다. 괜찮은가 하면 또다시 일어나는 지진이었다. 화산 폭발이었다. 결국 찻잎 가공은 근역(槿域)에서 모두 맡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시설로는 제잠(蹄岑)에서 건너오는 찻잎들을 제대로 가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잠에서 생산된 찻잎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해풍에 이미 많이 산화(酸化)되어 있었고 게다가 배로 바다를 건너와야 했기에 예전처럼 한꺼번에 수레로 많은 양이 운반될 수도 없었다. 결국 바다를 건너온 찻잎들을 가공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찻잎을 찌는 증차법(蒸茶法)과 찻잎에 좋은 향(香)을 입히는 숯으로 찻잎을 다시 건조, 살청 하는 탄배법(炭焙法)이 도입되었고 이 공정(工程)은 엄청난 숫자의 가마솥(釜)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제잠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는 제잠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지역이 하버(Harbour) 부산으로 새롭게 탄생된 연유였다. 부산의 부(釜) 자가 가마솥 부(釜) 자인 연유였다. 탄배(炭焙)로 인해 향이 스며든 찻잎으로 만든 차를 설(蔎:차(茶)의 다른 이름, 향초)이라고 부르게 된 시작이었다. 숯을 사용하는 탄배(炭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토기 대각부(臺脚部)에 설치한 숯에 공기가 공급되도록 투창이라 불린 다리 부분의 구멍들을 만들고 배신부(杯身部:윗부분)는 찻잎을 담은 배롱(焙籠)을 안정적으로 앉힐 수 있도록 접시 형태를 띤 토기가 만들어졌다. 찻잎의 탄배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이 토기는 유공토기(有孔土器)였고 몇 번의 개량을 거쳐 완성된 토기가 고배(高杯)라 불린 굽다리 접시였다.
쿠샨 제국의 고유 찻잎 가공 시설인 후일 전방후원분이라 불린 투무리는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개량되어야만 했다. 개량형은 점점 좁아지는 널로 원통형 챔버(chamber)와 방형(方形) 창고를 연결한 장고분(杖鼓形)이었다. 지금 아일랜드에서 투무리 유적으로 당당하게 전시되어 있는 Newgrange Tumulus와 동일한 형태였다. 아일랜드 뉴그란제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장고형이 근역(槿域:한반도)에 대거 등장하게 된 건 바로 제잠이 떨어져 나간 변화때문이었다. 제잠이 근역과 육지로 오갈 때보다 훨씬 길어진 수송기간때문에 이미 많이 산화(酸化)된 찻잎을 고속 고효율로 가공하여 대륙으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방후원형 공장보다 훨씬 더 시원하고 훨씬 더 건조한 공장이 필요했다. 게다가 더 빨리 대륙으로 운반하기 위해 그동안 이용되었던 직산을 대륙 수출항으로 이용하는 육로가 아닌 서해 연안을 따라 올라가는 바닷길도 개척되어야만 했다. 제잠과 가까운 뱃길로 이어지는 지역적 유리함을 이용해 찻잎 무역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경제적 이익을 거둬온 지금의 경남 서부지역에 퍼져있던 포상팔국(浦上八國)은 이제 부산과 해남, 장흥이라는 신흥 기지에 그 이익을 모두 뺏기고 있었다.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으로 기록된 이 전쟁은 전 세계 차 공급망을 관리해야 하는 월지에게는 신속히 안정시켜야 할 근본적 이익에 대한 위협이었다. 신라에게 뺏겨버린 변진(弁辰:후일의 가야伽倻) 세력의 경제적 지위를 모른 척 방치했다간 가뜩이나 바다를 통해 가까스로 연결되어 있는 야마토와의 무역로가 심각하게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경고가 포상팔국 전쟁이라고 생각한 월지였다. 월지국이 그 대안(對案)으로 내놓은 것이 고배(高杯)라고 기록된 굽다리 접시였다. 탄배의 효과를 극대화해 주는 이 토기는 가야(伽倻)로의 찻잎 제공을 전제로 야마토에게도 제공되었다. 찻잎의 산화(酸化) 문제 때문에 외면당한 가야(伽倻)였기에 야마토에서부터 찻잎의 산화(酸化)를 늦춰주는 가공 공정이 진행된다면 가야의 경쟁력이 제고(提高)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굽다리 접시의 시작은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유공토기(有孔土器)였다. 유공토기(有孔土器)는 제사를 위해 만들어진 그릇이 아니었다. 유공토기는 이미 개발된 탄배법의 생산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발명된 특수 토기였다. 숯 연소성을 대폭 향상시키기 위해 토기 몸체에 일부러 구멍을 내어 숯이 타고 있는 토기 그릇 안으로 공기가 유입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유공토기였다. 한 개의 구멍을 가진 유공토기에서 시작된 탄배용 토기는 여러 개의 구멍을 가진 고배로 발전했고 이 고배는 포상팔국 전쟁의 불안을 잠재웠다. 야마토는 허물어진 투무리(Tumuli)를 재건하려는 노력과 함께 찻잎 제공을 약속하고 가야로부터 넘겨받은 굽다리 접시들을 적극 활용해 중국과의 찻잎 거래에서의 열세를 만회했다. 하니와(埴輪)라고 하는 일본 토기가 나타난 연유였다. 탄배(炭焙)를 하기 위해 찻잎들을 담은 배롱(焙籠)을 앉히는 접시 또는 사발 모양을 한 배신부(杯身部)와 탄배에 쓰는 숯 연소(燃燒)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바람이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을 낸 투창이 선명한 대각부(臺脚部)를 가진 하니와(埴輪)의 존재는 전방후원분과 장고분(杖鼓墳)의 선후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챔버(Chamber)라 불린 찻잎 가공 공간인 원통형 방(房)과 찻잎 보관 장소인 방형(方形)의 창고가 단순하게 연결된 쿠샨식 전방후원형 투무리를 방형(方形) 창고를 점점 좁아지는 긴 널로 원통형 챔버와 연결한 아일랜드식 장고형 투무리로 바꾸는 작업이 근역(槿域)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일부는 새로 건설되었다. 점점 좁아져 삼각뿔 모양이 된 긴 널은 투무리 내부의 공기 흐름을 빠르게 만들었고 그 빨라진 공기의 흐름은 투무리 내부를 차갑게 했다. 빠른 속도로 챔버(Chamber)에 들어온 공기는 원통형 공간을 휘돌며 더욱 빨라졌고 이것은 챔버 안의 온도를 더욱 떨어뜨렸다. 원통형 공간을 휘돌아 나온 차가운 공기는 챔버의 습기를 머금고 빠져나갔고 찻잎들은 따라서 더 이상 심각하게 산화(酸化)되지 않고 가공될 수 있었다. 장고형 투무리는 전방후원형보다 과학기술에 앞선 찻잎 생산 시설이었다. 개조가 불가능한 기존의 투무리는 해체되어 새로 건설되는 아일랜드식 장고형 투무리 건축에 자재로 투입되었다.
지금 전라도 지역에 소재하는 개석식 또는 바둑판식으로 불리는 수많은 고인돌들은 그때 전용되지 못한 채 남겨진 옛 찻잎 가공 공장의 잔해들이다. 또한 전라도에서 발견되는 장고형 고분은 일본에 남아 있는 전방후원분의 아류가 아니다. 근역은 제잠(蹄岑)과 함께 붙어 있을 때도 떨어져 있을 때도 그들의 아류로 지내온 적은 없었다. 늘 그래온 것과 달리 근역에서 개발되어 그 생산성이 입증된 장고형이 야마토에 지어지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안전성과 비용 문제 때문이었다. 많은 자원을 투입해 지은 공장이 지진으로 인해 그 생산을 멈춰버린다면 제 아무리 탄탄하다고 하는 월지라도 자칫하면 누적된 투자 손실 때문에 차(茶) 산업 패권을 상실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낙양과 회계에는 월지가 키워 온 탄배와 도자기 관련 과학자와 기술자가 즐비했다. 중국은 하나라 우임금 이래로 단 한 번도 차(茶) 산업 패권 확보에 혈안이 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따라서 기술 습득과 축적에 누구보다 악착이었다. 중국인들이 기록 문화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그런 연유였다.
결국 찻잎 생산을 제외한 나머지 야마토에서의 모든 차(茶) 산업 시설은 연오랑 사건 이후 단계적으로 철수되었다. 나카노오에 황자에 의해 목이 잘린 소가노 이루카는 그 철수된 차(茶) 산업 공장을 복원하려다 그리 된 것이었다. 그의 조부(소가노 우마코:蘇我 馬子) 무덤으로 알려진 이시부타이(石舞臺)는 돌무덤이 아니었다. 나라(아스카)로 도읍을 옮긴 뒤 일본에서도 이제는 찻잎 가공 시설인 투무리가 지진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보여주려던 처절한 몸부림의 증거였다. 이미 기와가 보급되어 중국이 아닌 근역에서도 모든 찻잎 가공 공장이 돌이 아닌 나무로 지어져 투무리의 모습 아닌 사찰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걸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飛鳥)사(寺)를 지어 주며 보여줬건만 투무리를 계속 고집하던 소가노 이루카였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오사카의 전방후원분이 전라남도의 장고형 고분의 원조라 생각하며 자랑으로 여기고 이시부타이(石舞臺)가 돌무덤이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건 착각이다. 소가노 이루카가 사찰을 지으라는 쿠샨 간다라(쿠다라:백제)의 명을 어기며 투무리를 지은 건… 기와를 만들 줄 몰라서였다. 또다시 만들 줄 모르는 기와가 핵심인 목조 건물로 차(茶) 생산 공장을 만들면 또다시 종속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소이(所以)였다. 투무리는 이시부타이(石舞臺)가 보여주듯 야마토도 할 줄 아는 거였기에 고집한 것이고. 결국 소가노 이루카가 목이 베이던 그날, 아스카사의 기와와 두공을 백제로부터 하사 받았던 소가노 우마코의 아들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는 아들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집에 불을 놓고 그 불속에서 자살했다. 645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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