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蚩尤作亂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다… 치우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황제는 제후의 군사를 징발해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워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 사마천의 사기(史記) 권 1 오제본기(五帝本紀)
朝陽之谷 神曰天吳 是為水伯. 在虹虹北兩水閒. 其為獸也 八首人面 八足八尾 皆青黃. 靑丘國 在其北 其人 食五穀 衣絲帛 其狐四足九尾 一曰在朝陽北. 조양곡은 신(神)을 천오라 하니 바로 수백(水伯)이다. 있는 곳은 홍홍북쪽 양수(兩水) 사이다. 그는 짐승에 속하였는데 여덟 머리에 인면이며 여덟 개의 다리에 여덟 개의 꼬리이니 모두 푸르고 누렇다. 청구국은 그 북쪽에 있으며 거기 사람은 오곡을 먹고 비단을 입으며 그곳에 여우는 네 개의 발에 아홉 개의 꼬리가 있다. 한편으로는 조양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
황제가 청구(靑丘) 땅에서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 -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
기원전 2334년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에서 대군을 일으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지역까지 달려가 정벌한 이유는 황제 헌원과 문자 사용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동해안 지역을 통해 들어오는 한반도와 일본의 찻잎들은 전량 북쪽에 위치한 배달족이 관리하는 홍산 단지로 수송해 가공처리하고 있었는데 신농 이후 차나무와 찻잎에 대한 지식을 늘려가던 지나(支那:중국)인들이 그 일부에 대한 가공 처분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원전 2650년경이었다. 그렇게 해 줄 수 없다는 신시 배달국의 결정에 지나인들은 전쟁을 도발했다. 판천(阪泉) 전투에서 승리한 지나(支那)인들은 황제(黃帝) 헌원(軒轅)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찻잎 처분권을 요구해 왔다. 치우(蚩尤) 환웅(桓雄)은 도읍을 신시에서 청구(靑丘)라 불리던 홍산(紅山)으로 옮겨가면서까지 불가함을 알렸다. 치우 천왕이 도읍을 신시에서 청구(靑丘)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 연유였다.
산동반도를 통해 들어오는 찻잎들이 북쪽 연산(燕山) 산맥 너머 홍산(紅山)으로 수송되기 위해 집산되는 탁주(涿州)와 녹주(鹿州) 사이 지역에서 10년간 73회나 찻잎 수송단(輸送團)을 놓고 벌어진 전투에서 태양을 다스리는 여신 발(妭)의 도움을 받은 웅 씨(熊氏)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승리했다. 의외였다. 태양신이 수메르를 의미하는 것임을 치우(蚩尤)는 알지 못했다. 인더스강에 무역 기지들을 완비한 수메르인들이 더 많은 찻잎을 원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수메르와 중국 지나(支那)인들의 연합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불가능한 연합이 성사된 건 정확한 거래 내용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준 문자 때문이었다. 가지게 될 정확한 이익에 대한 문서화된 약속은 공고한 연합을 이끌어냈고 승리를 향한 갈망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치우는 그걸 간과했다. 기원전 2597년의 일이었다. 인더스 강 유역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그리고 카라치 등이 이 시기 번영의 절정기를 누린 건 당연했다.
나라를 운영해 가려면 어쩔 수 없었기에 문자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상형문자라 불린 그림 기호까지는 사용을 허락해 주었으나 아얼(阿尔:Eire)에서 난민(難民)으로 들어온 수메르인들이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쐐기문자는 그 수준이 아니었다. 정보의 왜곡이 생기게 하는 그래서 해석의 오류가 생기는 그런 글자가 아니었다. 진짜 글(栔)이었다. 정확한 정보는 신뢰를 만들었고 연합을 끌어냈다. 설형(楔形) 문자가 상형(象形) 문자와 다른 점은 추상화(抽象化)였다. 설명할 수 없는 건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루왜은조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본(復本)에 대해서도 결국 설명을 원했다. 처음엔 빌려준 씨앗을 정확한 양으로 돌려받기 위해 시작한 막대기 같은 금을 긋는 것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무척이나 편리하고 써먹을 데가 무진장한 금 긋기였다. 언제든 털고 떠날 수 있도록 제도화된 불편한 생활 조건들에 대한 설명을 원했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설명을 요구했고 급기야 스스로 자신들의 불편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 끝은 반역이었다.
복본(復本)을 위해 금지되었던 문명을 이루려는 변혁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게 되어서야 결행된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원정(遠征)은 사실 모든 수송체계를 순록에서 말(horse)로 교체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였다. 게다가 순록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순록(馴鹿)은 메소포타미아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쓰러졌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르곤이 지휘한 칸헨티(Khan Khentii)의 알카나이(alchanai)에서 온 기마(騎馬) 군대는 강력했고 무자비했다. 받침을 모르던 사람들이 아카드(Akkad)라 불렀던 알카나이 원정군의 탄압에도 한번 각성(覺醒)된 사람들의 저항은 끈질겼다. 복본이 뭘 의미하는지 왜 달의 산(月山: Ruwenzori)에 꼭 돌아가야 하는지 알 길 없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도 바쁜 사람들은 오늘의 노동을 쉽게 해 주는 문명이 좋았다. 그래서 기꺼이 수로(水路)를 내는 대규모 토목공사장에 나와 흙을 짓이겨 벽돌을 만들어 내고 그들을 날라 쌓아 올리는 수고를 감수했다.
기원전 2334년에 사르곤 원정군이 시작한 살육전은 사르곤의 손자 나람신이 죽을 때까지 만 84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나람 신이 죽은 기원전 2218년, 찻잎 보급이 끊기고 가져간 말들도 모두 죽어버린 아카드 군대는 북쪽으로 철수했고 메소포타미아는 구티라는 동쪽의 산악족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북쪽으로 철수한 아카드인들은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또한 살기 위해서라도 말(馬) 사육(飼育)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카서스(caucasus) 말이 다른 말(馬)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고 우세종이 된 연유였고 사르곤 원정군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고 메소포타미아에 남아 건국한 미탄니(Mitanni) 사람들이 히타이트(Hititte) 사람들에게 말 사육법을 가르쳐 준 연유였고 후일 이란 북부 지역에서 건국한 메디아(Madai) 사람들이 말을 잘 키우고 좋은 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걸로 유명해진 연유였다. 결국 말에 대한 이런 특장(特長)은 키루스 대제(Cyrus the great)의 페르시아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 큰 동력이 되었고 삼한(三韓:후르리인, 아수르인, 아모리인)의 첫째가 마한(馬韓:후르리인)이 되게 하는 힘이 되었다. *Hurrian/Assurian/Amorian : 月支 중 支를 이루는 세부족. 수메르인 월지(月氏)는 이들 지(支)들을 癡(chi, qi)라고 불렀다.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모든 역량이 메소포타미아 원정군에 실려 사라지자 신시(神市: alchanai)가 있던 지석산(砥石山:dishi: 窮石山)으로 이름이 바뀐 궁석산의 영향력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문명으로 발전되는 것을 한사코 막아온 배달족(倍達族)의 업보였다. 문자로 소통되는 모든 정보와 지식들을 기반으로 문명이라 불리는 제도로 유지되는 체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서 유지되던 배달국은 그 사람들 대부분이 수메르 원정에 나서자 이내 그 힘을 잃어버렸다. 원시시대가 된 거였다. 언제든 복본이 결정되면 미련 없이 떠나기 위해 고집되었던 배달 체제의 숙명이었다. 원정군에 속하지 못하고 배달국에 남아 있던 당시 사람들은 그래서 이후 사그라(Sagra)라고 불렸다. 산스크리트어로 버려진(relinquish), 포기된(abandoned)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아얼(Eire)에서 기후변화로 알거지가 되어 차(茶) 나무를 찾아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배달국까지 들어온 난민들이 터 잡아 아얼산(阿尔山)이라 불리던 곳에 살던 사람들은 사그라(Sagra)들을 대단히 위험하게 생각했다. 배달국(倍達國) 사람들을 치(癡: chi, qi)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그들 몰래 문자 생활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켜 왔던 아얼산 사람들에게 사그라(Sagra)는 공중보건적인 측면에서도 개인위생적 관점에서도 대단히 더러운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러운 걸 만지려 하는 아이들에게 단말마처럼 외치는 지지! 지지라는 말의 지지(砥癡)는 지석산(砥石山:di shi shan)의 버려진 미련한 사람(癡:qi, chi)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수메르 원정을 떠나기 전 수많은 돌칼(石刀)들을 갈아대는 바람에 숫돌 지(砥) 자와 돌 석(石) 자로 이뤄진 지석산(砥石山)으로 불린 배달국의 궁석산(窮石山)은 결국 아얼산(阿尔山))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지지(砥氏:diqi)가 되었다.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들고 차(茶) 나무를 찾아 산속 곳곳을 뒤지는 사람들로 메워진 돌산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 궁석산이었다. 몽골어로 칸 헨티(Khan Khentii)인 이 궁석산의 이름을 산스크리트어로 분석하면 무언가를 찾으려 샅샅이 뒤진다(delve)는 뜻의 칸(khan)과 군대 같은 무리를 지은 사람들(troop)이란 뜻의 핸티(henti)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궁석산(窮石山)의 궁(窮)은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파고들어 깊게 연구하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그렇게 굶주리며 어렵게 찾은 찻잎들을 복본의 전초기지인 메소포타미아를 지켜야 한다며 무상원조로 보냈던 사람들을 그곳에서 공짜로 찻잎을 우려낸 물을 마시며 난민에서 일약 문명까지 일으킨 수메르 조선인들이 지지라며 멸시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러시아 연방 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사하(Sakha) 또는 야쿠티아(Yakut) 공화국을 포함해 바이칼 호 주변의 지역은 지지(砥氏: diqi)가 되어 아얼산 사람(Sumer)들에게 경멸당했던 배달족 사르가들의 후예들인 예벤키(Evenki)족과 야쿠트(Yakut=Shaka))족, 부리야트(Buryat)족이 혹독한 자연조건 속에서도 그 땅의 주인으로 버티며 지키고 있는 배달(倍達) 민족의 땅이다. 또다시 흉폭해지는 기후 변화로 폐쇄될 수밖에 없는 marine road(해양 무역로)를 대신할 초원로(草原路)를 배달민족들을 위해 지켜 온 그들의 힘은 바로 서약(誓約)을 지키려는 순결한 정신에서 나오는 우직한 끈기였다. 그동안 실크 로드와 마린 로드에 뺏겼던 무역로(貿易路)로서의 위엄을 따뜻해지는 기후 온난화의 작용으로 되찾을 초원로와 북극 해양(海洋) 무역로의 중심에 그들의 땅이 있다. 그들이 역사서를 남기지 않았다 해서 그곳이 그들의 땅이 아닐 수는 없다. 복본(復本) 하기 전까지 배달족에게 일어난 일들이란 기록할 의미가 전혀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시간이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그들이다. 그러나 박제상(朴堤上) 선생이 배달(背達)의 역사가 담긴 증심록(澄心錄)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반드시 해야 할 기록은 또한 기록하는 민족이 배달(背達)의 민족이었다.
기원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을 도읍지로 한 단군(檀君) 조선(朝鮮)의 개국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사르곤 원정군의 공백을 지석산(砥石山)의 신시(Alchanai)에 남아 있던 배달족(背達族)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게 확인되자 한시도 비울 수 없는 찻잎 생산 기지의 사령부는 아얼산(阿尔山: 阿爾山)으로 옮겨졌다. 사르곤 원정군에 포함되지 못하고 버려졌다 해서 사르가(Sarga)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저항 없이 찻잎 생산 본부가 아얼산(阿尔山)으로 이동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들의 평화적 동의 때문에 배달족과 조선족은 예맥족(濊貊族)이라 불리며 한 민족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 그런 사르가들도 사르곤이 이끄는 원정군이 돌아오면 모든 상황은 다시 옛날처럼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기원전 1285년이나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르가(Sarga)라는 말엔 포기된(abandoned) 사람들이란 뜻이 추가되었다. 동이(東夷)의 탄생이다. 동이는 서이(西夷)가 있다는 말이어서 사르곤 원정군과 그 후예들이 후일 서융(西戎)이라 불린 서이였다. 사르가들은 동이(東夷)였다.
기후가 따뜻해져 초원로(草原路)가 활짝 열렸어도 대륙의 동쪽 땅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건네지는 찻잎의 양은 늘기는커녕 줄어들었다. 기원전 2112년 구티 산악족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 영유권을 회복한 수메르인들이 2004년까지 계속된 자신들의 우르 제3왕조 통치 기간 동안 너도나도 모두 차례로 동쪽 아얼산(阿爾山)으로 이주해 버려 중국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찻잎 분배권을 장악한 아사달(阿斯達) 조선(朝鮮)이 새롭게 부상한 중국에 치중하느라 궁석산(窮石山) 배달(倍達) 시대만큼 메소포타미아에 지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탄니(Mitanni)를 건국하며 메소포타미아에 끝까지 남으려던 배달족(背達族)들의 대부분이 동쪽 신시(神市: Alchanai)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고조선이란 국호에서 알 수 있듯 수메르와 아카드(사르가)가 혼합되어 예맥(濊貊) 조선이라 불리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삼위태백(三危太伯)에 대립과 분리의 긴장이 고조된 것은 돌아온 배달족의 지도부가 초강경 복본주의자들인 아수르(Assur)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메르를 정벌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아카드 제국이 통치할 때 제국을 떠받치는 세 부족이 아수르(Assur)인과 아모리(Amori)인 그리고 후르리(Hurrruri)인이었는데 그중 가장 혹독하게 수메르를 정벌했던 게 후일 아시리아를 건국한 아수르인들이었다.
궁석산(지석산: 砥石山)의 배달국(倍達國)이 가지고 있던 찻잎 분배권을 사르가(Sarga)로부터 이양받은 아얼산(阿爾山)의 조선국이 가장 먼저 크게 주력한 것은 중국 지역의 개발이었다. 사슴돌(鹿石)이라 불리는 무역로의 환석(桓石: 표석)이 대륙의 동서에 걸쳐 촘촘히 박혀있는 이미 개발된 북방 초원로(草原路)는 결코 수메르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스스로 개발하고 개척한 것이 아니면 뺏을 수는 있으나 가질 수는 없는 것이 정의였고 법이었다. 배달족(背達族)이 기후 온난화 시기에 대비해 이미 개발한 홍산(紅山) 문화권보다 더 남쪽 지역을 그들은 개발해 내야만 했다.
게다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는 기후 온난화의 심화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막화는 점점 심해져 기원전 2000년경에는 모든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아얼산(阿爾山)으로 이주해 왔다. 뜨거워진 지구의 기후는 한반도와 일본을 삼위태백(三危 太伯) 지역보다 더 좋은 차(茶) 나무 산지(産地)가 되게 했고 이것은 일본의 찻잎을 들여와 서쪽으로 중계하는 무역 산업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요순시대(堯舜時代 :BC 2286-BC2146)를 상징하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이 만들어진 연유였다.
초원로(草原路)가 기후 온난화로 무역로(貿易路)로서의 활기를 되찾아야 할 시기에 배달족이 사르곤 원정군의 메소포타미아 정벌로 신시(神市)를 비운 사이 남아 있던 사르가(sarga)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 찻잎 분배권을 움켜쥔 수메르는 이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중국 개발은 단순히 역참(驛站) 개발로 끝나지 않았다. 유사 이래 최초의 번영을 경험한 중국인들의 강렬한 번영에의 욕망을 이용해 드디어 산(山)을 옮기는 대역사(大役事)를 착수하게 한 거였다. 순(舜) 임금 시절에 홍수를 다스린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 우(禹) 임금의 공적은 사실 홍수를 다스린 것이 아니었다. 복본(復本) 전초(前哨) 기지(基地) 보존을 위해 메소포타미아 원정에 나선 배달족(倍達族)이 본부를 비운 사이 그들의 근본적인 힘의 원천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본부로 그 힘의 원천을 옮기려는 조선족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곤(鯀)과 우(禹)의 고사(故事)에는 숨겨져 있었다. 우(禹) 임금이 수메르 조선의 지원으로 하(夏) 왕조를 개창한 이후 모든 중국 왕조의 변천은 모두 수메르 조선인들의 세계경제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곤(鯀)은 황제(黃帝)의 고손자였다. 황제(黃帝)의 손자인 전욱(顓頊) 고양의 아들로 태어난 곤은 오늘날의 몽골 고원으로 흘러 들어가 몽골 고원을 평양(平壤)으로 만들어 주며 배달족(倍達族)의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해주고 있는, 황하(黃河)가 몽골(蒙古) 고원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막아버리는 대역사(大役事)를 해낸 사람이었다. 지금은 사막화되어있는 몽골(Mongol) 고원 지역은 당시에는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다. 황하뿐만 아니라 금산(金山)이라 불린 알타이(Altai)와 대흥안령이 포함된 삼위태백(三危 太伯)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들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무역로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산물들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배달민족 국력(國力)의 원천이 되는 지역이었다. 평양(平壤)이란 말은 우리나라(수메르) 고유말인 부루나를 한자(漢字)로 옮겨서 생긴 말인데 우리말 부루나는 평평한 땅, 너른 벌판의 땅이란 뜻을 가진 말이었다. 부루는 평평한 너른 들판이란 뜻이었고 나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단군이 조선의 도읍을 궁석산부터 음산산맥에 이르기까지 너른 벌판 즉 몽골 고원을 내려다보는 궁석산 평양(平壤)에서 아얼산의 아사달로 옮겼다고 기록된 연유였다.
음산(陰山) 산맥 북쪽으로 흘러 나가 당시 몽골 고원의 한가운데를 흘러 몽골 고원 전체를 펑양(平壤)으로 만들어 풍요롭게 해 주던 황하(黃河)의 물줄기를 음산산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몽골 고원 쪽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공사를 맡은 게 곤(鯀)이었다. 수메르인이라는 표지(標識)를 이름의 어(魚) 자로 증명하고 있는 곤(鯀)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故事)로 역사에 남은 우산(羽山)에서 죽었다. 곤(鯀)은 음산(陰山) 산맥 북쪽으로 흘러 나가는 황하를 우산(羽山)을 옮겨 흘러 나가지 못하게 막은 거였다. 요(堯) 임금을 이은 순(舜)은 곤(鯀)이 우산(羽山)을 옮겨 쌓아 몽골고원으로 흘러 나가지 못하게 막은 황하를 배달족의 무역기지인 홍산(紅山) 이남 지역으로 흐르게 해 그 당시 홍산(紅山)이 누리는 무역 기지로서의 이점을 빼앗아오는 일을 곤(鯀)의 아들 우(禹)에게 맡겼다. 물길을 막는 아버지의 방식을 버리고 물길을 트는 방식으로 치수에 성공해 하 왕조의 시조가 된 사람이 우(禹)란 말이 나오는 연유다.
지금의 적봉(赤峰)과 조양(朝陽) 사이의 지역인 당시 홍산(紅山)은 중국 동해 연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찻잎들을 모아들여 가공한 후 전 세계로 수출하는 중국 동해안 유일의 배달족 소유의 최대 찻잎가공 무역기지였다. 만약 황하가 홍산 지역 이남으로 흘러 중국 동해로 들어가면 황하 이남의 동해 항구로 들어오는 찻잎들은 더 이상 홍산으로 수송될 수 없었다. 황하 이남 지역에 홍산에 있는 찻잎 가공 공장과 견줄 수 있는 공장이 있다면 굳이 황하를 도하하는 위험과 비용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산동반도 지역에 그토록 엄청난 발전이 촉진된 연유였다. 황하 이남으로 들어오는 찻잎들은 이제 배달족이 아닌 조선족의 찻잎이었다. 배달족의 것을 뺏는 것이 아니라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禹)는 토그토흐(Togtoh:托克托县)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수로를 파서 음산에서 막힌 황하를 진령(秦嶺) 산맥 쪽으로 돌려 내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소(牛)가 엎드려 앉아 있는(伏) 모습의 동서로 발달한 진령산맥에 부딪친 황하는 순(舜) 임금이 바람대로 다시 동쪽으로 꺾어 홍산 이남 지역으로 흘러 홍산으로 올라가는 모든 찻잎 수송로를 막으며 바다로 흘러갔다. 기원전 2100년의 일이었다. 우(禹)가 그 공적으로 하(夏) 나라를 개창하는 대가로 사르곤 원정군이 건국한 아카드 제국은 결국 제대로 보급되지 않는 찻잎 때문에 망했다. 우(禹) 임금의 묘(墓)가 일본의 찻잎이 들어오는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인 회계(會稽)에 있는 연유였다. 우 임금이 성공했을 때 동호(東胡)가 형성되었다. 우임금의 성공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카드 제국이 망하고 구티족의 과도기적 점유를 거쳐 수메르 왕조인 우르 제3왕조가 개창될 수 있었다. 기원전 2112년이었다. 아사달의 수메르 즉 동호(東胡)가 보낸 찻잎들로 키울 수 있었던 힘이었다. 서호(西胡)는 우르 제3왕조의 수메르인들이었다.
복본(復本)을 유일 가치로 내세우는 궁석산 신시배달 체제(體制)는 벼락과 바람, 구름과 비를 대표하는 폭풍우의 신, 환웅(桓)을 정점으로 한 구조였다. 수메르에겐 엔릴(Enlil)로 아카드(Akkad)에게는 마르둑(Marduk), 가나안(Canaan)에겐 바알(Baal)로 불려진 환웅은 그래서 우간다 창세 신화에서 최초의 인간 킨투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황소로 상징되었다. 사르곤의 손자 나람 신과 치우 천왕의 투구에 나타난 뿔은 바로 이 루왜은조리 상가(sanga)의 뿔 모양을 본뜬 것이었다. 복본(復本) 보다 안정과 번영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아얼산(불함산) 조선 체제(體制)는 물(水)과 지식, 기계와 기구들(crafts)을 대표하는 나무로 제단과 창고를 짓는 신, 단군(檀)을 중심으로 한 구조였다. 수메르에겐 엔키(Enki)와 니시쿠(Nissiku)로 아카드에겐 아얼(Ae: Ea)로 가나안에겐 라(La)로 각각 불려진 단군은 양과 물고기가 상징으로 내세워졌다. 복본 서약을 지키기 위해 다른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환웅에게 황소만이 함께 한 것과는 달리 복본의 서약은 아랑곳없이 안정과 번영을 추구한 단군에겐 양과 물고기에 더해 수리(eagle)가 상징으로 함께 했다. 루왜은조리에서 벌어졌던 배달(背達) 사건과 기원전 4천 년경 아얼(Eire)에서 일어났던 피난(避難) 사건을 모두 겪어야 했던 조선(朝鮮) 사람들에게 안정과 번영 외에 추구해야 할 가치는 더 이상 없었다. 안정과 번영이 아닌 가치는 사치(奢侈)였다.
복본(復本)만을 최고 가치라 강요하는 배달민족에게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내세우기 위해 아얼산(阿尔山: 阿爾山)을 불함산(不咸山)으로 불렀다. 복본의 복(復) 자와 발음이 푸(Fu:bu)로 똑같은 아니 불(不) 자를 써서 모든 사람이 다(咸) 돌아가려(復:fu) 하는 건 아니다(不:fu)는 것을 강조한 이름이 불함산이었다. 또한 조선 민족의 상징으로는 폭풍우가 함께 할 수 없는 햇볕을 내세웠다. 밝 사상이었다. 부여의 동명성왕과 고구려의 추모왕 탄생과 관련된 일광감응(日光感應)에 의한 임신 이야기가 생겨나게 된 연유였다. 찻잎 분배권을 새로 가지게 된 조선이 복본(復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일강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장 뼈저리게 알아차렸다. 환웅과 단군 같은 왕호(王號)로 바람의 신인 아문(Amen)이 만족한다라는 뜻의 아멘호테프(Amenhotep)라는 왕호를 사용하던 이집트 18 왕조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는 왕호(王號)를 아크나톤(Akhnaton)으로 바꾸고 폭풍우와 상극인 햇볕을 상징하는 아톤(Aton)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결국 아들 투탕카멘까지 비명에 가게 하고서야 끝난 실패한 종교개혁은 그러나 세상이 엄청난 변화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새로이 찻잎 분배권을 장악한 아얼산에 터 잡은 수메르 조선은 복본 준수(遵守)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수메르 조선에 대한 지지(支持)는 빛을 쏘는 태양신(Aton) 숭배로 암호화되었다.
지석산(砥石山) 신시로부터 보내지는 찻잎 공급량이 대폭 줄어들고 종국엔 아예 중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르곤 대왕의 수메르 정벌 사업 이후에 그대로 정착한 미탄니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지 않고 기원전 1260년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해진 기후 때문에 코카서스(caucasus) 산악지역에서 차(茶) 나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한 기후 온난화였기에 아라라트(ararat) 같은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차(茶)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아라라트 같은 코카서스 산맥에서 자라는 차(茶) 나무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천부인(天符印)을 통해 보아 왔던 차(茶) 나무와는 잎도 열매도 꽃도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천부삼인(天符三印)이란 게 실은 차(茶) 나무의 잎(葉)과 열매(果), 그리고 꽃(花)의 생김새를 알려주어 어디서든 차나무를 찾을 수 있도록 비밀리에 전수된 보물이었다. 비파형(琵琶形) 동검(銅劍)은 차나무의 잎(葉) 모양을 팔주령(八珠鈴)은 차(茶) 열매 모양을 청동거울(靑銅鏡)은 빛을 받으면 하얗게 반사하는 청동거울의 특성을 이용해 하얀 차(茶) 나무의 꽃을 알려주는 물건들이었다. 그래서 삼보(三寶)라 불린 것이었다.
그런데 코카서스 (caucasus) 산맥의 차(茶) 나무들은 열매도 잎도 천부인의 모양과 달랐다. 새끼를 꼬아 만든 끈으로 서로 교차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잎이 없는 가지들 끝에 옥수수(cone) 모양으로 또는 연꽃(lotus) 모양으로 아티초크(artichoke) 같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이 열매들은 연꽃의 꽃잎들처럼 수많은 찻잎들이 겹겹이 엉겨 모여 만들어진 찻잎 덩어리였다. 이렇게 천부인(天符印)과 사뭇 다른 모습의 차(茶) 나무를 아라라트산 일대에서 발견한 사람들은 아수르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후 천부인(天符印)과 다른 끈처럼 생긴 차(茶) 나무를 찾아내었다 하여 색족(索族)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계속 심화된 기후 온난화가 사막화를 불러일으키자 이 차(茶) 나무들도 결국은 모두 사라졌다. 미탄니 왕국이 최종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사라진 건 기원전 1260년이었다. 그 이후 색족(索族)이 삼위태극에 나타난 건 당연한 일이었고 배달족의 지도 부족(部族)으로 나선 건 더 당연한 일이었다. 삼국지 위지에 고리국(高離國)이라 오기된 고리국(高麗國)이 후한서에 색리국(索離國)이라고 기록된 연유였다.
결국 사르곤 원정에 나섰던 사람들이 모두 궁석산 신시(alchanai)로 돌아왔다. 순록을 타던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말을 타고 돌아왔다. 티그리스강 상류지역에서 말의 육종(育種)과 사육(飼育)에 관한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터득한 그들은 이제 순록이 아닌 말의 민족이 되어 있었다. 조선(수메르)인들이 수레바퀴를 만들어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닐 때 배달(아카드)인들은 말에 직접 올라타고 다녔다. 마차를 타는 승마(乘馬)는 말들과 마차와 마부와 마차를 위한 도로를 필요로 했지만 말을 타는 기마(騎馬)는 말과 활, 그리고 칼이 필요한 전부였다. 따라서 기동성과 비용(費用) 면에서 조선인들은 배달족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색족(索族)으로 대표되는 미탄니의 주력 배달족이 삼위태백에 돌아왔을 때 조선의 주력군은 귀방(鬼方)이라고 기록된 전차(Charriot) 전투에 능숙한 하티(Hatti) 즉 히타이트 수메르인들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금과 은 같은 보물들을 밤중에 방망이로 뚝딱하고 만들어내는 돈 많고 호방한 이미지로 전승되는 도깨비들이 이 귀방이었다. 이렇게 귀방이 도깨비와 같은 부유한 인상으로 각인된 연유도 사실 당시 수메르 조선인들이 찻잎 교역권을 한 손에 쥐고 세계 시장을 쥐락펴락하며 떼돈을 벌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절은 색족(索族) 군대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삼위태백으로 돌아오자 끝나게 되었다.
기원전 1285년, 고등(高登)이 지휘하는 색족(索族) 군대(軍隊)는 서역을 총괄 방어하던 귀방군(鬼方軍)을 습격, 전멸시켜 놀란 소태(蘇台) 단군으로부터 우현왕(右賢王)이란 단군 바로 밑의 최고위직을 얻어냈다. 색족(索族) 군대가 서역 방위를 책임지고 있던 귀방군(鬼方軍)을 전멸시키자 귀방군(鬼方軍)의 보호를 받으며 번영을 누리던 수메르 조선의 무역기지인 인더스 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같은 식민 도시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찻잎 무역만을 전문으로 다루며 전투와는 상관없었던 모헨조다로 같은 도시에 살던 수메르 조선인들은 결국 찻잎을 원하는 원주민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야 했다. 인더스 강 유역의 도시 문명이 기원전 1300년경에 멸망했다는 연유다. 결국 위협을 느낀 소태(蘇台) 단군이 서우여(徐于餘) 에게 양위하려 하자 고등(高登)이 죽은 후 그 자리를 이은 손자 색불루(索弗婁)는 소태(蘇台)를 아사달(阿斯達)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조선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색불루(索弗婁)는 즉위 후 조선이라는 국호를 고리(고려)로 바꾸었다. 이제 수메르의 조선은 사라지고 배달족의 고려(高麗)가 돌아왔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동한(東漢) 시대 왕충(王充)이 논형(論衡)이라는 책에 기록한 탁리((橐離)라는 나라와 삼국지 위지와 후한서에 색리(索離), 고리(槀離)등의 나라로 기록되며 부여(夫餘) 동명왕(東明王)의 출현을 알렸던 나라들이 바로 색불루(索弗婁)에 의해 건국된 배달족의 나라 고리(고려)였다. 새끼로 꼰 것 같은 가지로 연결된 차(茶) 나무를 찾아내었다 하여 색족이라 불린 그 배달 삼족(三族)중 하나인 사람들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이름으로 어정쩡하게 뭉뚱그려져 있던 예(濊)와 맥(貊)도 이제는 완전히 분리되어 이후 부여와 고려로 확실하게 자신의 민족 철학적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복본의 맹세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던 배달족의 고려(高麗)가 다시 안정과 번영을 집요하게 추구하던 월지(月氏)족의 부여(扶餘)와 엮어내는 역사가 잉태된 시기였다. 이집트 파라오 아크나톤(Akhnaton)이 아톤(Aton) 신을 내세워 종교개혁이란 이름으로 바람의 신인 아문(Amon)을 모시는 배달족을 숙청해 나갈 때 아문(Amon)의 보호자로 나선 상징이 개구리였다. 기원전 1300년경 이집트에서 실패로 끝난 종교개혁에서 배달족을 태양빛으로부터 보호했던 상징으로 등장했던 개구리가 기원전 90년 동부여에서 금와(金蛙)라는 인물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또다시 배달족과 수메르가 격한 투쟁의 와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색불루(索弗婁)가 단군 소태(蘇台)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단군세기는 기록했다. 그러나 색불루(索弗婁)는 단군세기 기록에 있는 것처럼 조선의 니시쿠(Nissiku: 이사금 尼師今)가 아니었다. 배달 족의 즉 고려의 마르둑(Marduk: 마립간 麻立干)이었다. BC 1285년의 일이었다, 이제 예맥(濊貊) 조선(朝鮮)으로 통합되어 있던 민족은 예(濊)와 맥(貊)으로 명확히 노선을 분리했다. 예(濊)는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는 수메르 조선(朝鮮)이었고 맥(貊)은 복본의 맹세를 저버릴 수 없는 배달(倍達) 고려(高麗)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지금도 궁금해하는 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그 대답을 이제 해 줘야 할 때가 되었다. 아얼(阿尔:Eire)이라 불리던 아일랜드에서 그들은 기원전 4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들은 초록색을 푸르다고 말하는 단오 축제인 푸르니(Puruni) 축제를 매년 6월에 열었다. 그리고 흙으로 대형 옹관을 만들어 냈고 거석들로 도시 문명을 이룩했다. 하티와 히타이트, 그리고 수메르라고 불리며 메소포타미아에 인류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그들은 이후 배달족 아카드의 학살을 피해 배달족이 비워 놓고 온 본부, 궁석산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2334년의 아카드 사르곤 대왕의 수메르 정벌때부터 수메르를 떠나기 시작한 그들이 궁석산 동쪽 아얼산으로 모두 이동한 건 우르 제3왕조가 망한 기원전 2004년이었다. 수메르는 조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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