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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玉璽)- 중국이 옥을 사랑한 이유

by 檀童稗說 2023. 12. 30.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厲王使玉人相之. 玉人曰 石也. 王以和爲誑, 而刖其左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 石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 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 三日三夜, 泣盡而繼之以血. 王聞之, 使人問其故, 曰 天下之刖者多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誑, 此吾所以悲也. 王乃使玉人理其璞而得寶焉, 遂命曰 和氏之璧. - 韓非子 第13篇 和氏
초나라 사람 화씨가 비취휘석을 캐냈다. 여왕이 감정을 시켰는데 돌이었다. 보석이라며 진상한 화씨의 왼발을 잘랐다. 무왕이 새로 즉위하자 화씨는 재차 진상했다. 무왕이 감정했는데 또 돌이라는 결과였다. 오른발을 잘랐다. 문왕이 또 새로 즉위했다. 화씨는 비취휘석을 처음 캐낸 산에 가서 울었다. 삼일밤낮을 계속 울자 눈물 대신 피가 나왔다. 소문을 들은 문왕이 사람을 보내 연유를 물었다. 화씨가 답했다. 발이 잘려 서러운 것이 아니다. 보옥을 돌이라 해서 슬픈 것이요 올바른 선비를 거짓말장이라 부르니 그것이 슬픈 것이다. 문왕은 원석을 세공시켜 보물을 얻고 화씨지벽이라 이름붙였다. - 한비자 화씨

趙惠文王 嘗得楚和氏璧 秦昭王 請以十五城易之 欲不與畏秦强 欲與恐見欺 藺相如願奉璧往 曰 城不入 則臣請完璧而歸 旣至秦 王無意償城 相如乃欺取璧 怒髮指冠 卻立柱下曰 臣頭與璧俱碎 遣從者 懷璧間行先歸 身待命於秦 秦昭王賢而歸之 - 史記 列傳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조 혜문왕이 초나라의 화씨지벽을 얻게 되었다. 진(秦) 소양왕이 15개의 성과 벽(璧)을 바꾸자고 제안 했다. 아니 바꾸자니 진(秦)나라의 공격이 무섭고 바꾸자니 사기(欺)당할까 두려웠다. 만약 15 성(城)을 주지 않으면 화씨지벽을 완전(完璧)하게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인상여가 진 소왕을 만났다. 화씨지벽을 받은 진 소왕이 성들을 줄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인상여는 진 소왕을 속여(欺) 벽(璧)을 손에 넣은 다음 기둥 뒤로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기 머리와 함께 벽(璧)을 깨버리겠다 고함을 쳤다. 종자에게 딸려 벽(璧)을 먼저 조나라로 돌려보낸 인상여는 진(秦)나라에 남아 진(秦) 왕의 명을 기다렸다. 진(秦) 왕은 인상여가 현인이라며 돌려보내 주었다. -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


중국인들의 옥(玉)사랑은 유별나다. 숭배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중국인들의 옥(玉)에 대한 생각은 각별하다. 그런 옥(玉)을 그러나 서양인들은 보석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옥(玉)을 중국인들은 신(神)이 깃들 수 있는 마법(魔法)의 돌이라고 믿어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 이후 왕(王)을 상징하는 보석으로 사용했다. 용(龍)과 봉황(鳳凰)의 형상을 옥(玉)에 새겨 그 신령함을 더욱 강조했다. 옥안(玉顔), 옥체(玉體), 옥새(玉璽)라는 말이 쓰여 지게 된 연유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옥(玉) 사랑이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유래했는지 정확히 알려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잊어 버렸다. 고대(古代) 중국인들의 많은 숭배(崇拜) 가운데에서도 줄곧 아주 높은 위치를 차지해 왔던 옥(玉)이었다. 부(富)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 연유(緣由)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분명해야만 하는 것이 모호(模糊)하고 엄연(嚴然)해야 할 자초지종(自初至終)이 애매(曖昧)할 때 그건 누군가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무언가를 왜곡(歪曲)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역사(歷史)란 한두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란 한두개 사건(事件)으로 엮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란 끝났다는 선언(宣言)으로 종지부(終止符)를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모든것으로 영원히 만들어 가는 역사는 절대로 애매모호(曖昧模糊)해 질 수 없는 것이고 결단코 은폐(隱蔽), 왜곡(歪曲)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 분명(分明)하고 정연(整然)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만큼 명료(明瞭)한 진실이다. 옥(玉)에 대한 자신들의 숭배가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부르기 전부터라는 걸, 그 땅에 깃들어 살면서부터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옥(玉)이란 것이 대륙을 관통하는 교역을 통해 자신들이 역사의 주요 무역품으로 등장시킨 비단(緋緞)과 도자기(陶瓷器)보다도 먼저 거래(去來)된 상품(商品)이란 걸 중국인들은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일극(一極)으로 세계에 군림해 왔던 중국은 그래서 애매모호(曖昧模糊)한 많은 역사 들에 대한 직접적인 귀책(歸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건 일극(一極)으로 자처하는 멍청한 나라들에게 지워지는 멍에다.

옥이란 글자의 갑골문이 구슬을 꿰어 늘여놓은 모습을 상형했다고 밝히고 있는 네이버 한자사전


옥(玉)이란 글자의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땅에서 캐내는 광석(鑛石)인 옥(玉)을 상형(象形)하고 있지 않았다. 옥(玉)자의 갑골문은 구슬들을 무언가로 꿰어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지금은 구체(球體)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 된 구슬은 원래 화씨지벽(和氏之壁)의 벽(壁)이란 글자가 옥(玉)을 납작한 도넛 모양으로 다듬은 것을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옥(玉)을 둥글게 깍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최고의 보석(寶石)으로 평가하는 옥(玉)은 우리가 비취(翡翠)라고 부르는 경옥(硬玉)이다. 영어로 Jadeite인 경옥(硬玉)은 규산염(硅酸鹽 silicate of sodium and aluminum)으로 휘석(輝石 pyroxene NaAlSi₂O₆)에 속하는 광석이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조미김을 포장할 때 반드시 함께 넣어야 하는 수분흡수제, 실리카겔과 같은 성분이다. 이것은 비취옥(翡翠玉)이 고대(古代)에 가장 간단히 설치할 수 있는 최고의 수분 흡수장치였다는 걸 알려 주고 있다. 중국인들이 옥(玉)에는 부패(腐敗)를 방지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게 된 데에는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찻잎이 옥(玉)의 수분(水分) 흡수 성질로 산화(酸化)가 지연(遲延)되어 약효(藥效)를 유지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옥(玉)이 건강을 지켜 주고 장수(長壽)를 보장해 준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연유였다.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시작한 옥(玉)의 가공은 상(商), 주(周) 시대가 되면 하나의 전문(專門) 영역이 되어 실력 있는 옥인(玉人)으로 평가받으면 전문가로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옥(玉)의 최대 가공지와 소비지는 단연 중국이다. 이렇게 현대와 고대(古代)를 불문하고 옥을 좋아하고 숭배하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는 중국인들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된 것이었을까?


중국의 모든 부(富)는 동쪽 끝 땅에 있는 부상국(扶桑國)에서 들어오는 차(茶)에서 나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차(茶)가 오직 동쪽 끝 땅에서밖에 생산되지 않았고 그 차(茶)들은 초원로(草原路: 시베리아)와 중국(中國)을 통해서만 서쪽 땅으로 공급될 수 있었다. 중국 발해만(渤海灣)의 천진(天津)과 래주만(萊州灣)의 봉래(蓬萊), 해주만(海州灣)의 연운항(連雲港) 지역등에 하역(荷役)된 차(茶)들은 가장 값을 높게 쳐주는 서쪽을 향해 운반(運搬) 되어졌다. 서역(西域)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타클라마칸 사막 때문에 중국 땅을 통과하는 모든 차(茶)들은 형양(滎陽) 아니면 남양(南陽)에 모였다. 형양(滎陽)에 모인 차(茶)들은 황하와 위수(渭水)를 따라 서안(西安)과 한양(漢陽, 지금의 天水)에 이르렀고 남양(南陽)에 모인 차(茶)들은 상락(商洛)을 통해 서안과 한양(천수)에 이르렀다. 형양(滎陽)과 남양에 차(茶)들이 모인 이유는 그곳들에 차(茶)들을 다시 건조(乾燥)시키는 대규모 살청(殺靑)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陽)자는 阜(阝:언덕 부) 자와 昜(볕 양) 자가 결합한 글자인데 그 뜻은 건조대(干)에 널려져 언덕 위에 내놓은 찻잎들을 태양이 내려 쪼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공정(工程)은 운반 중인 찻잎에 생겨난 수분(水分)을 다시 한번 제거(除去)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온과 습기는 차(茶)를 운반하는 대상(隊商 caravan)들에게는 가장 피해야 할 적(敵)이었기에 이들을 제거 하는데 도움을 주는 시설이 있는 곳은 어디든 캐러밴들이 몰려들었다. 차(茶)를 운반(運搬)하는 캐러반(caravan)은 중국인들에겐 젖과 꿀이 흐르는 움직이는 가나안이었다.

돌로 쌓은 초기의 성곽 위에 벽돌로 쌓은 성곽이 추가된 중국의 읍성 출처:China Tour


형양(滎陽)과 남양(南陽)을 향해 차(茶)를 운반하는 캐러밴(caravan, 隊商)들이 숙식(宿食)을 위해 머무르는 곳은 대상(隊商)들의 차(茶)를 도적떼 들로부터 지켜 줄 성곽(城廓)이 있는 마을이었고 자신들의 차(茶)를 습기로부터 보호해 줄 창고(倉庫)가 있는 마을이었다. 비취(翡翠 jade 硬玉)가 습기(濕氣) 제거제(除去劑)로 쓰이기 위해 실에 꿰어져 창고에 걸려 있게 된 연유였고 그런 비취(硬玉)들이 실에 꿰어져 주렁주렁 걸려 있는 창고(倉庫)를 가진 마을에만 캐러밴들이 몰려 들었다. 성곽(城廓)과 비취휘석(翡翠輝石)들은 차(茶)를 실어 나르는 캐러밴들을 유치(誘致)하기 위해서 중국의 고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시설이었다. 중국이 우리와 달리 산성(山城)이 아닌 읍성(邑城) 국가로 발전했던 연유였다. 중국 동해안의 항구들과 형양과 남양에 이르는 직선(直線) 주로(走路)에 비취(翡翠) 구슬들이 실에 꿰어져 들보에 습기 제거제로 설비(設備)된 창고들과 성곽(城廓)이 있는 읍성(邑城)들만 도읍(都邑)으로 발전해 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는 말이 생겨난 연유였다. 옥(玉)을 둥글게 깍은 것을 말하는 구슬을 서 말이나 가지고 있어도 그냥 가지고만 있으면 안 되고 차(茶)들을 보관할 창고를 짓고 그 구슬들을 꿰어 창고들에 습기 제거제로 사용해야만 캐러반(隊商)들이 모여들게 되고 그들의 소비(消費)를 통해 발전할 수 있다는 격언이었다.


황하(黃河)가 지금처럼 토그토흐(togtoh)에서 남쪽으로 내려꽂히지 않고 바오토우(包頭市 baotou)와 호흐호트(呼和浩特市 hohhot) 그리고 우란커우(烏蘭察布ulanqab)와 장가구시(張家口市) 들의 북변(北邊)을 지나는 음산(陰山) 산맥과 청산(靑山 qingshan), 빙산(冰山)을 따라 흐르다 지금의 시라무런(潢水 xar moron river) 강으로 들어가 차간(査干 chagan) 호수(湖水) 앞에서 눈강(nenjiang river) 과 송하강(songhua river) 두 강과 합류해 흑룡강(黑龍江 amur river) 이란 이름으로 태평양에 들어가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번영(繁榮)이었다. 시라무런강(潢水 xar moron river) 은 광개토대왕 시절 소금(鹽) 확보를 위해 정벌했다는 염수(鹽水)를 말한다. 황하(黃河)는 상류(上流)가 철새들의 도래지인 까닭에 새똥에서 나온 질산(窒酸)이 합성되어 질산나트륨(sodium nitrate, NaNO3)이 듬뿍 들어있는 강(江)이었다. 그래서 황하는 꺽이는 곳마다 염정(鹽丼)이 만들어 지는 강이었다. 그런데 그 황하가 음산산맥 북쪽으로 흐르지 않고 우(禹) 임금이 새로 낸 토그토흐(togtoh) 남쪽으로 낸 물길을 따라 흐르자 황하는 황토(黃土) 고원을 완전히 감싸며 흐르게 되었다. 규토(硅土 silicon)와 흙으로 이뤄진 황토(黃土) 고원을 감싸며 흐르는 까닭에 황하에는 엄청난 규토(硅土 silicon)가 함유되었다. 그래서 황하 하류엔 후일 백자의 도토(陶土)가 되는 고령토(高嶺土)가 쌓여져 갔고 유럽인들이 후일 중국의 눈(chinese snow) 이라고 부른 염초(焰硝 질산나트륨)들도 허옇게 온 바위들에 그리고 뻘 위에 가득하게 되었다.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Erlitou culture) 유적지 지도. 출처: 위키미디어

순(舜) 임금 시절 기후변화로 인해 계속되는 황하의 범람(氾濫)을 언제(堰堤)로 막으려다 실패한 아버지 곤(鯤)과는 달리 범람한 황하를 아예 남쪽으로 흐르게 하는 새로운 물길을 내서 해결한 우(禹)임금은 오늘날 중국의 번영을 가져온 일등 공신이었다. 이렇게 남쪽을 향해 흐른 황하는 동서로 누운 진령산맥(秦嶺山脈)에 의해 동쪽으로 굽이친 후 태행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북쪽으로 흘렀다. 태행산(太行山)과 오대산(五臺山) 줄기들을 따라 흐르는 황하는 이제 건널 수 있는 강이 아니었다. 진흙 함량이 60%라는 걸 의미하는 물 1말에 진흙 6되라는 기록 (記錄)이 한서(漢書)에 새겨져 있듯이 배를 띄울 수조차 없는 강이었다. 거대한 진흙더미가 흘러가는 강이었다. 황하는 강 양쪽에서 서로 오가지 못하는 경계선이 되었다. 이제 천진(天津) 남쪽으로 들어오는 모든 차(茶)들은 오로지 중국 땅을 거쳐야만 서쪽으로 운반될 수 있었다. 중국 땅 여기저기에서 서쪽으로 차(茶)를 나르는 캐러반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번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차(茶) 운반을 독식할 수는 없었다. 중국인들이 차무역 캐러반(隊商,caravan) 들을 맞이해 돈벌이를 시작할 수 있었던 곳은 황하의 북쪽으로 심하(沁河 qinhe river)가 남으로는 사수(汜水 Sishui river)가 만나는 형양(滎陽 xingyang) 부터였다. 하남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 엔스시(偃師市)의 이리두(二里頭) 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유적들이 발견되어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Erlitou culture, BC 2100년경 ~ BC 1800년경) 라 명명되며 중국 고고학회에서 하(夏)나라의 유적들이라고 주장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형양(滎陽 xingyang)은 동쪽으로는 정주(鄭州 zhengzhou)가 서쪽으로는 낙양(洛陽 luoyang)이 있는, 황하가 태행산맥을 따라 북으로 변류(變流)를 시작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런 형양의 형(滎)자는 찻잎(茶葉)을 돌위(冖)에 놓고 불길(炏)로 굽고 물(水)로 식혔던 모습을 상형한 글자다. 형양까지 운반(運搬)되면서 습기(濕氣)에 노출되어 산화(酸化)되어가는 찻잎을 다시 데우고(殺靑) 빠른 시간내에 차가운 물로 냉각(冷却)시켜 줌으로써 더이상 산화(酸化)되지 않도록 해주는 시설이 형(滎)이었다. 형양의 양(陽)자는 阜(阝:언덕 부) 자와 昜(볕 양) 자가 결합한 글자인데 그 뜻은 햇볕이 건조대(干)에 널어 언덕 위에 내놓은 찻잎들을 내려 쪼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또한 수분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우에도 뜨거운 햇빛을 이용해 습기를 제거한 후에는 차가운 물을 이용해 빨리 냉각시켜 찻잎의 온도를 낮추는 작업이 이뤄져야 했다. 이런 찻잎들의 재살청(再殺靑) 시설들이 완비된 곳이어서 형양(滎陽)인 이 곳의 독보적(獨步的)인 경제사적(經濟史的) 위치를 낙양(洛陽)으로 이천(移遷)시킨 건 주(周) 문왕(文王)의 넷째아들인 주공(周公 旦)이었다. 둘째 무왕(武王 發)의 요절(夭折)로 인해 조카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攝政)이 되어 전권(全權)을 쥔 네째 주공(周公 旦)이 자기의 영지(領地)인 노(魯)나라는 큰아들에게 맡기고 형양(滎陽)이 누리고 있던 경제적 번영을 자기가 직접 건설한 낙읍(洛邑)으로 옮겨버린 것이었다.


형양(滎陽)에서 서쪽으로 95km 약 250여리나 떨어진 곳으로 재살청(再殺靑) 중심지를 옮겨 버리자 형양(滎陽)과 붙어 있어 캐러밴들의 역참(驛站)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정주(鄭州)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정주(鄭州)의 남쪽을 식읍으로 하던 셋째 관숙(管叔 鮮)과 정주(鄭州)의 북쪽을 담당하던 다섯째 채숙(蔡叔 度), 황하 북쪽 지금의 초작시(焦作市)를 다스리며 상(商)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이 그대로 다스리던 지금의 신향(新鄕)을 감시하던 여덟째 곽숙(霍叔 處)이 나눠 가졌던 캐러밴 낙수효과(落水效果)를 모두 낙읍을 다스리는 넷째 주공(周公)이 가져가 독식해 버린 것이었다. 삼 년간의 처절한 내전인 삼감(三監)의 난(亂)이 발발한 연유였다. 숙부(叔父)인 기자(箕子)가 상나라의 모든 차(茶) 관련 과학기술을 낱낱이 적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바치는 댓가로 영지(領地)와 백성들을 보존하며 탕왕(湯王)과 이윤(伊尹)의 제사를 종묘(宗廟)에서 계속 모실 수 있었던 무경(武庚)은 그러나 이 난이 평정되며 주공에 의해 목이 잘렸고 백성들은 황하를 건너 남쪽 상구(商丘)로 강제 이주 되며 상나라가 아닌 송(宋)나라 백성이 되어야 했다.

중국의 읍성국가로의 발전이 차를 실은 캐러반들이 서역으로 나아가는 교역로를 따라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춘추시대 지도. 출처:나무위키


중국의 춘추(春秋)시대 지도(地圖)를 보면 중국이 한국에서 수입되는 차(茶)들을 서역으로 운반하는 일을 통해 발전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가공된 일본 찻잎과 한국 찻잎들이 차(茶) 가 되어 북방 초원로와 더불어 중국 동해안에 하역되어졌고 이 차(茶)들은 캐러반에 의해 서쪽 땅끝까지 운반되었다. 형양(滎陽)이 확실한 기술도시로서 우뚝 서기 전 캐러반들이 집결한 곳은 낙양(洛陽)과 동일 경도(經度)의 남쪽에 있는 남양(南陽)이었다. 회수(淮水)와 상해(上海)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차(茶)들은 서역으로 가기 위해 모두 남양(南陽)으로 집결했었다. 남양에 서역으로 가는 캐러반들이 집결한 이유는 남양이 하서회랑(河西回廊)과 연결되는 상락(商洛)과 최단 거리에 있는 살청(殺靑)시설이 설치된 읍성(邑城)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성(長城)중 제일 먼저 건설된 것이 초(楚)나라 장성이었고 그 유적이 발견된 곳이 남양(南陽)인 연유였다. 햇볕을 쪼여 습기를 걷어낸 차(茶)들은 상락(商洛)을 거쳐 서안(西安)과 천수(天水)로 보내졌고 천수(漢陽)에서 다시 수분을 제거한 차(茶)들은 낙타와 말에 실려 캐러밴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에 올랐다. 황하가 지금처럼 래주만(萊州灣)으로 들어가지 않고 태행산맥과 오대산을 따라 북쪽으로 휘돌아 천진(天津)을 통해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가던 시절, 황하 이남의 중국 동해안에 하역되는 모든 차(茶)들은 형양(滎陽)과 남양, 낙양(洛陽)과 남양(南陽)으로 모였다. 그 길들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곳은 도적떼들로부터 캐러반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튼튼한 성곽을 쌓고 강력한 상무(尙武) 체제를 구축한 마을이었고 운반 중에 수분을 잔뜩 먹은 찻잎들에게서 습기를 제거해 주는 비취(翡翠 jadeite)를 충분히 확보해 창고마다에 비치(備置)한 마을이었다. 옥(玉)을 중국인들이 그토록 사랑한 연유였고 중국이 산성이 아닌 읍성(邑城) 국가로 발전한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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