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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 신법의 진짜 목적

by 檀童稗說 2023. 3. 2.

1. 왕안석 균수법의 진짜 목적

왕안석의 신법 중 1069 7월부터 가장 먼저 시행된 균수법은 물길을 통해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책임지는 발운사(發運司)의 설치와 운영을 위한 조례였다. 균수법에 근거해 조운(漕運)을 전담하게 된 발운사는 사실 일본의 차를 중국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담당하기 위한 관청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수출되는 차()는 그 품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라는 지리적 제약 때문이었다. 일본 하카다와 송나라 명주(영파)를 잇는 원양항해로 차()같은 귀한 상품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중국뿐이었다. 예로부터 차나무가 자생해 차를 많이 생산하는 일본이 최고가로 팔리며 전 세계의 각광을 받는 차()를 교역하지 않은 것은 바다 건너까지 차()를 실어 나를 용기(그릇)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피할수 없는 수분과 습기, 그리고 소금기에 배에 실은 차()들이 모두 변질되어 버렸기에 자기(瓷器 porcelain)라 불리는, 잘 깨지지 않는 첨단 세라믹 그릇이 개발되기 전까지 일본의 차는 그저 일본 안에서만 쓰이는 내수품일 뿐이었다. 일본 하카다항으로 가기위해 주산군도(舟山群島)를 떠나는 송나라 대선(大船)들엔 안이 텅 비어있는 청자(靑瓷)들이 빈틈없이 실려 있었다. 일본에 가서 차를 실어오기 위한 운반용기들이었다. 선박을 제조하는 조선술과 나침반을 개발해 항로를 유지하는 항해술이 송나라때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였다. 방수와 방습이 완벽하면서도 잘 깨지지 않는 청자들에 담겨 원양 항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신주(神舟)에 의해 바다길을 통해 실려 온 값싼 일본 차()들은 엄청난 이윤을 송나라에 가져다주며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2. 왕안석 청묘법의 진짜 목적

1069 9월부터 시행된 두 번째 신법인 청묘법(靑苗法)은 중국에서 품질 좋기로 엄선된 차나무 묘목(苗木)을 일본에 보내 대규모 재배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제정된 조례였다. 사천성 아안시에 위치한 몽정산에서 오리진(吳理眞)이 차나무의 인공재배를 성공시켰던 기원전 53년이후 천년동안의 기술축적으로 이뤄낸 개량된 차나무들의 종자들이 속속 일본에 보내져 안정화 실험에 들어갔다. 저리의 이자를 농민들에게 제공해 지주들의 고리대 착취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입법 취지는 일본 차재배(茶栽培) 농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싼값으로 일본에서 찻잎을 구매해 중국에서 만든 상대적으로 값싼 청자에 담아 자신들의 배로 실어 날라 전 세계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던 국제적 대상인들에게 송나라 황실이 한중일 삼국 분업이라는 신개념으로 도전장을 내민 셈이었다. 일본에서 생산된 차()들을 그동안 독점해 오던 국제대상인들의 눈치를 보는 일본내 차 상인들의 판매 기피 때문에 대규모의 새로운 차재배지를 선정해 육성해야 했다. 연평균 기온이 13에서 15도 사이이고 우기와 건기 구별 없이 연 평균 1500 mm 정도의 강우량을 나타내고 연중 온난하며 비가 많이 오는 시즈오카가 선정되었고 대규모의 송나라 재정자금이 토지구입과 경작민 육성을 위해 일본에 뿌려졌다. 시즈오카에 심어진 차나무는 산차(山茶)로 명명되었고 그로부터 일본 내 역학관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압도적 지배력을 구가했던 교토와 오사카 지역의 동쪽에 위치해 미개발지로 천대받던 시즈오카가 중심이 된 후지산 지역이 새로운 중앙(中央)으로 떠올랐다. 전통의 관서(關西)지역과 신흥 관동(關東)지역의 경쟁관계가 시작됐다. 그동안 일본 차()유통시장을 독점해 온 대상인들은 결국 발운사(發運司)가 조운(漕運)으로 운반해 가는 찻잎 유통을 방해하고자 일본과 중국에서 동시에 담합(談合)했다. 일본에서 차()를 거래해온 상인들이 담합해 송나라 발운사와 찻잎을 거래하지 않자 시역법(市易法)이 시행되었다. 고가품인 찻잎을 거래하고 싶어도 자본이 모자라 엄두를 못내는 중소상인들에게 자본을 지원해 차() 유통업에 신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법이었다. 중국에서도 그동안 자본력이 미천해 차상인(茶商人)이 되지못한 중소 상인들에게 자금지원이 이루어졌다. 대규모 회계부정으로 천문학적 세금을 포탈하던 대상인들과는 달리 송나라의 자금 지원으로 꿈에서나 상상하던 머천트(merchant 차상인)가 된 중소상인들은 적지만 정확하게 세금을 납부했다. 이 당시 일본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일들은 엔큐(延久)의 선정이라고 일본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송나라 국고에 은병(銀甁)들이 쌓여가는 동안 신종황제 앞으로는 사마광, 구양수, 정호, 정이, 소식(소동파)등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이 청묘법을 극렬히 반대하는 상소가 쌓여갔다. 그들의 상소는 일본 차()산업을 육성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이 독점하고 있는 차()산업을 위협할 유일한 잠재 경쟁국이 일본인데 그 일본에 중국의 돈과 기술을 투입한다면 후일 반드시 역습을 맞게 될 것이라는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상소는 BC 57년 한나라 선제때 최초로 인공 차재배를 중국이 성공시켰을 때 고려와 일본이 어떻게 중국에 어깃장을 놓았는지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3. 왕안석 모역법의 진짜 목적

서하(西夏)에 매년 보내야 하는 차 2만근과 비단 그리고 은()은 엄청난 부담을 송나라 조정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안겨주고 있었다. 우선 변질되지 않은 차() 2만근()을 서하의 수도인 흥경(지금의 은천)까지 운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 공물을 인수할 때마다 서하의 관리들은 변질을 지적했고 변상을 요구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상품들을 수출해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반드시 하서회랑을 이용해야만 했던 송나라로서는 결국 고가(高價)의 청자에 찻잎을 담아 운송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서하로 가는 공물 운송단은 도적들에겐 복권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둘 다 초고가인 차()와 청자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은 도적떼가 횡행했다. 서하로 가는 공물 운송단 에는 임의로 부과된 직역(=부역:정부(各級 政府)의 여러 잡무를 대신 처리해야 하는 의무)으로 참여한 많은 일반 백성들이 있었다. 만약 갑작스레 부과된 직역에 의해 수송하고 있는 물품이 잘못될 경우 그들은 변상해야 했다. 그게 직역의 의미였고 국법이었다. 변상 때문에 파산하고 자살하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모역법(募役法)이 만들어져 이 폐단은 없어졌다. 모역법에 의해 그동안 부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던 관리들과 대상인들, 사찰(寺刹)과 사원(寺院)의 승려들에게 조역전(助役錢)이 부과되었다. 모든 농민들에게는 재산등급별로 차등을 둔 면역전(免役錢)이 부과되었다. 이 돈을 내면 누구나 직역의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성된 기금은 직역(부역)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맞는 보수를 지급하는데 지출되었다. 직역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을 모집한다는 방()이 거리마다 내걸렸다. 부역의 금납화(金納化)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서하의 수도 은천으로 향하는 공물 운송단엔 최정예 용병(傭兵)들이 모집되었다. 최정예 용병들에겐 최고의 보수가 지급되었고 그들이 지키던 차()를 담은 청자 공물을 강탈하려던 도적떼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매년 약속한 차 2만근의 몇 배를 파손배상명목으로 지급해 왔던 서하로의 공물은 이제 더이상 추가되지 않았다

 4. 실크로드의 진정한 교역품은 실크가 아니었다

실크로드로 불리는 무역로에서 실크가 중요한 상품이 되지 못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중국 비단 장수들에게 언제나 엄청난 수익을 보장해 주던 로마제국이 비단을 자체 생산해 중국의 비단 독점을 파괴한 건 554년 부터였다. 그 이후 더이상 큰돈이 안 되는 비단 대신 실크로드 대상(隊商)들의 이익을 유지시켜준 건 역시 차()였다. 1005년에 체결된 송나라와 요나라와의 조약 그리고 1044년에 체결된 송나라와 서하와의 조약을 비교해 볼 때 가장 크게 차이나는 것은 차()의 유무(有無)였다. 요나라가 불가침 댓가로 차()를 요구하지 않은 반면 서하는 매년 2만근의 차()를 공물로서 제공받는 것을 중요한 화약조건으로 내걸었다. 서하가 차() 2만근을 받는 대신 포기한 것은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40년이나 먼저 조약을 맺은 요나라가 챙겼던 비단보다 7만필이나 적은 13만필만, 은은 절반이나 적은 5만냥만 매년 받는 댓가로 중국 상인들의 실크로드 이용을 보호한 거였다. 매년 받을 차() 2만근이 비단 7만필과 은() 5만냥을 합산한 것의 40년동안의 물가상승분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이윤을 보장하는 것이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 값비싸고 귀한 차()를 강과 바다를 통해 실어 나르려면 어지간한 파랑(波浪)에는 견딜 수 있는 배가 필요했고 어떤 물기로부터도 그 어떤 습기로부터도 차()를 지켜낼 수 있는, 안과 밖 모두에서 완벽한 방수, 방습이 가능한 항아리가 필요했다. 그러면서 웬만한 충격에는 깨지지 않는 내구성을 함께 가진 운반용기(運搬容器)가 절실했다. 그 그릇이 청자(靑瓷)였고 그 배가 신주(神舟)로 대표되는 원양항해가 가능한 선박(船舶)이었다

왕안석  출처: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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