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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금(泥篩今, 또는 泥簛今) 의 유래

by 檀童稗說 2023. 12. 17.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남해(南解)의 태자(太子)이다.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말하기를 왕비의 성은 박(朴)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처음 남해왕(南解王)이 세상을 떠나자 유리(儒理)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脫解)가 평소 덕망이 있어서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고자 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신성한 기물은 큰 보배라서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누가 이빨이 많은지를 알아봅시다.”라고 하였다.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니, 이에 좌우 신하들과 더불어 왕으로 받들었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불렀다. 옛 전승이 이와 같은데, 김대문(金大問)은 이르기를,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齒理]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 남해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에게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 석 두 성씨는 나이가 많은 자가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 후 김 씨 성이 일어나서 세 성씨가 이빨이 많은 것으로써 서로 왕위를 이어갔으므로, 이사금이라고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사람이 사자(Lion)처럼 다른 동물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걸 포기하고 불을 이용해 고기를 익혀먹으면서 소금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이 되었다. 고기에서 나오는 선혈(鮮血)이라 부르는 생피를 먹지 않은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소금을 먹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결국 소금을 만들어 내는 법을 하나씩 찾아냈다. 바닷물을 사용해 소금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알아낸 방법은 그러나 가장 마지막으로 채택되었다.  손쉽게 소금을 만들 수 있는 바닷가는 사람들이 사는 산(山)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바닷가에서 만든 소금을 녹지 않은 채로 사람들이 사는 산(山)까지 실어 나를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차(茶) 나무 때문이었다.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소금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바닷가에는 그보다 더 필요한 차나무(木+ 荼)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채택된 소금 제조 방법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山) 주변으로 짠맛이 나는 흙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소금이 나는 곳을 소금밭이라 하여 소금밭 강(䴚) 자를 쓰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소금이라고 뜻을 새기는(訓) 로(鹵)자는 원래 짠 땅 로로 새겼던 글자였다. 짠 땅(鹵)을 찾아내고 그 땅을 파내(坑) 만들어진 곳이 소금밭이었다. 염전(鹽田)이었다. 염전은 바닷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짠 땅(鹵)은 그래서 그걸 찾아낸 월지족 때문에 루(lu)라고 발음한다. 月의 발음이 루(lu) 인건 우연이 아니다.

아프리카 우간다 알버타 호수 동중부 연안 키비로에서 염토를 채취하는 현지 여인들. 출처:위키미디어


짠 흙(鹵)에서 소금을 만들어 내려면 제일 먼저 그 짠 흙을 질퍽거리는 땅 밖으로 퍼 날라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땅속에서 올라오는 염수(鹽水)로 인해 질퍽거리는 흙(鹵)을 온전히 실어 나를 기술이나 장비가 없었다. 염분(鹽分) 없이 바싹 마른 흙을 다른 곳에서 실어 와 염수로 질퍽거리는 그 흙(鹵)들 위로 부운 후 잘 개어서 질퍽거리는 정도를 낮춘, 실어 나를 때 최소한 흘러내리지 않는 흙으로 만들어야 했다.  진흙(泥)이었다. 염수(鹽水)로 질퍽거리는 흙(鹵)에다 다른 곳에서 실어 온 마른 흙을 섞고 반죽해, 진흙(坭)으로 만든 후 실어 날랐다. 염수를 함유한 흙에서 염분만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해 낸 건 염분을 녹여서(溶解) 침출(浸出)시키는 거였다. 염분(鹽分)을 용해(溶解)시키기 위해 뜨거운 물이 사용되었고 염분(鹽分)을 우려내는 침출(浸出)을 위해 체(篩)가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진흙(泥) 형태로 사람들이 불을 피우는 곳으로 옮겨진 염수(鹽水)를 함유(含有)한 흙들은 체(篩, 簛) 위에 올려져 뜨거운 물로 씻겨졌다. 이렇게 침출(浸出, leaching)된 염수(鹽水)는 다시 불에 의해 끓여졌다. 소금보다 훨씬 낮은 온도에서 기화(氣化)하는 물이 기체가 되어 모두 사라지면 염수(鹽水)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바다였던 곳이 땅이 되었고 그렇게 땅 속으로 갇혀버린 바닷물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광석 같은 암염(巖鹽)이 되었다. 이런 광석 같던 암염이 땅속 온도 변화에 의해 녹았고 이런 암염이 용해된 지하수는 땅 속에 생긴 작은 틈새들로 이동하다 모세관 현상(毛細管現象 capillary action)에 의해 지각 표면 위로 솟아나 흙을 적시게 된 것이었다. 이런 초기의 소금 생산법을 지금도 지속하면서 세계 유산으로 등록신청해 놓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의 키비로(Kibiro)다.

쳇불이 성근 어래미.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거르는 데 쓰는 용구인 체는 부엌살림중 으뜸에 속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금 염(鹽) 자는 신하 신(臣) 자와 기슭 엄(厂) 자, 소금 땅로(鹵) 자 그리고 그릇 명(皿) 자로 이루어져 있다. 신하 신(臣) 자는 땅 속에서 광석처럼 존재하던 소금이 녹아 지하에 생긴 균열들을 통해 모세관 현상으로 지상으로 올라오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고 소금 땅로(鹵) 자는 그렇게 지하에서 올라온 염수가 지상의 흙을 적셔 만들어진 질퍽한 흙들을 나타내고 있다. 기슭 엄(厂) 자는 염수를 함유한 흙들을 뜨거운 물을 부어 염수만 침출(浸出)시키고 또 그렇게 침출(浸出)된 염수를 끓일 수 있게 지붕과 벽이 있는 시설을 나타내고 있고 그릇 명(皿) 자는 염수에서 물이 모두 기화(氣化)되면 그릇에는 소금 기둥만이 담기게 되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소금 염(鹽) 자에는 소금이란 뜻 말고도 산의 이름, 못의 이름, 노래의 이름이란 뜻이 먼저 쓰였는데 그것은 원시 소금을 처음 만들어 낸 곳인 우간다의 키비로가 루왜은조리 산맥에서 흘러나온 나일강 물길이 이어진 앨버타 호수 연안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염수가 솟아올라 질퍽거리는 땅은 키비로에서도 사람 하나 겨우 다닐만한 좁고 가파른 길외에는 달리 접근할 방법이 없는 절벽 아래 외진 곳이었다. 그 외진 곳에서 염수를 잔뜩 먹은 진흙을 좁고 가파른 길을 통해 실어 나르기 위해 고안된 것이 지게였다.


실달성과 허달성, 그리고 마고대성이 있던,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록한 루왜은조리 산맥(Mt. Rwenzori)은 에드워드 호수(Lake Edward)와 앨버타 호수(Lake Alberta)를 남북으로 이어주고 있는데 그 앨버타 호수(Lake Alberta)의 중동부 연안에는 키비로(Kibiro)라는 마을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소금 생산 마을(Salt producing village)로 세계유산(World Heritage) 등록이 신청되어 컨벤션(Convention)에서 투표를 받고 있는  곳이다. 회염(灰鹽, Ash salt)이라고 불리는 소금을 고래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통적 방법으로 지금도 생산하는 이 마을은 우리 민족 고대 국가인 가야를 연상시키는 부가야(Bugahya) 카운티에 속해 있다. 부가야 카운티는 호이마 지구( Hoima District)에 속해 있는데 호이마라는 도시에는 역시 우리 민족의 고대 국가인 부여를 연상시키는 부녀로(Bunyoro) 왕국의 왕이 살던 궁전이 있다. 그들의 말로 오무카마 와 부녀로(Omukama wa Bunyoro)라고 기록된 이 왕호(王號)는 부녀로-키타라(Bunyoro- Kitara)라는 동아프리카 왕국(the East African kingdom)의 왕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부녀로-키타라(Bunyoro-kitara)에서 키타라(kitara)는 요나라를 세웠던 변발 풍습의 거란족이 스스로를 부르던 키타이(khitai) 또는 키탄(khitan)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 인연들이 중첩된 키비오에서의 Ash salt 생산법은 신라에서 왕호로 사용된 이사금이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 또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사금(尼師今)의 금(今) 자가 증류 장치의 원조라는 것을 설명하는 갑골문. 출처: 네이버 한글사전


인간이 만들어 내려야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차나무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며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天神: 桓雄)만이 풍백과 우사, 운사가 합동으로 만드는 폭풍우(暴風雨: Storm) 속에 신(神)만이 만드는 벼락(申)으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바닷가 멀리에서 반드시 인간이 만들어 내야만 했던 소금은 결국 만들어 내는 방법을 만들어 낸 사람에게 이사금(임금)이란 엄청난 보상을 안겨다 주었다. 이사금은 만들어 내야만 했던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축약해 놓은 암호 아닌 암호였다.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찾아야만 했던 차나무를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방법을 천부삼인(天符三印)이란 암호(暗號) 아닌 암호로 전수(傳授)했듯이.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아 제대로 된 소금을 만들어 내도록 사람들을 지도해 주는 사람을 그래서 사람들은 존경과 사랑을 담아 이사금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후일 임금으로 불렸다. 泥師今, 尼師今, 尼斯今, 泥斯今이라고 역사서에 조금씩 다르게 기록된 이사금은 사실 泥篩今, 또는 泥簛今이었다. 이사금(泥篩今, 또는 泥簛今)의 이(泥)는 지하에서 모세관 현상으로 올라온 염수(鹽水)로 질퍽해져 수송(輸送)할 수 없는 소금 땅(鹵)을 마른 흙과 함께 개워 진흙(泥)으로 만들어 수송하라는 첫 번째 작업 설명서였다. 이사금의 사(篩, 簛)는 체(篩, 簛) 위에 진흙(泥)들을 올려놓은 후 뜨거운 물을 계속 부어 진흙에 함유된 염분(鹽分)을 용해(溶解)시키고 용해된 염분을 체를 통해 염수로 침출(浸出, leaching)시키라는 두 번째 작업 설명서였다. 이사금(泥篩今, 泥簛今)의 금(今)은 이렇게 체들을 통해 침출 된 염수를 뚜껑이 있는 그릇에 넣어 무엇과도 섞이지 않게 한 다음 또다시 불로 끓여 소금을 머금게 하라는 것이었다. 즉 소금을 결정(結晶)시키라는 것이었다. 자염(煮鹽)이었다.

염수를 끓여 소금 결정을 얻는 자염 제조 광경


잇금은 신라 성덕왕 때 활약했던 김대문이 기록한 것처럼 사람의 입에 있는 이빨이 아니었다. 진흙에 담아 수송해 온 소금을 제대로 뽑아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침출(浸出, leaching)이었다. 이 침출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가는 금으로 체를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했다. 쳇불이라고 불린 그물이 얼마나 작은 구멍들로 이루어졌는지가 관건이었다. 용해 공정과 함께 이루어지는 침출 공정은 금과 금사이가 너른(쳇불 구멍이 큰) 성근 체로 시작해 금과 금 사이가 최대로 촘촘한 가는 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체들을 거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쳇불이라고 불린 그물이 거의 모든 불순물을 거를 수 있을 정도의 조그만 구멍들로 즉, 가는 금들로 채워진 체를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는 작업이었다. 대장장이로 추정되는 야금 전문가 석탈해가 인정할 정도로 박혁거세의 손자 유리(儒理)는 쳇불 구멍이 아주 촘촘한, 가는 금들로 빽빽이 채워진 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석탈해가 자신에게 오게 되어 있는 왕위를 처남인 유리(儒理)에게 양보한 것은 이 체가 차(茶) 가공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떡은 시루에 쪄서 만드는 음식이었고 떡이 왕위 계승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거론되는 것으로 볼 때 시루의 사용은 이미 결정적인 것이 되어 있던 시대였다. 찻잎이 시루에 찌어져 가공되는 증차(蒸茶)가 이미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증차(蒸茶)를 만들어 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찻잎이 뜨거운 증기에 엉기지 않도록 뜨거운 증기가 골고루 퍼지게 세심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는데 그 증기(蒸氣)의 양을 정밀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결정적 장치가 쳇불 구멍의 크기였다. 가는 금을 가지고 만들어 쳇불 구멍을 최대한 작게 만든 체의 존재였다. 누가 가는 금을 이중삼중으로 교차 연결해 쳇불 구멍을 최대한 작게 한 그물을 가진 체를 만들어 그 체 위에 올려진 찻잎들이 뜨거운 증기가 뿜어지는 대로 닿는 게 아니라 골고루 세밀히 퍼져간 증기를 닿게 하느냐가 증차(蒸茶)의 품질을 결정하고 있었다. 시루를 도입한 박혁거세 이후 왜인들이 사로국을 줄기차게 공격한 연유였다. 신라 제3대 왕으로 즉위한 유리서부터 이사금이란 왕호가 칭해진 연유였다.

차(茶) 저장시설의 최고봉이 석굴암이라면 차(茶) 제조시설의 최고봉은 불국사였다. 출처: 경주시청


  김부식이 삼국사기로 전한 신라 김대문의 이사금에 대한 기록은 조선 시대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은 안정복(安鼎福)에 의해 통렬하게 비판당한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고이(考異)에서 안정복은 떡을 물어보았다는 말은 아이들의 희롱에 가까운 일이라 고속(古俗)이 비록 질박하다 하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며 김대문의 기록을 맹랑한 것으로 치부했다. 안녹산의 발흥(發興)을 당 황실과 조정의 차(茶) 산업 국제 분업에 대한 정책 변경이라 오독(誤讀)하여 부왕(父王)인 성덕왕 때부터 다시 진흥시킨 신라의 차(茶) 산업을 스스로 접어버린 게 경덕왕이었다. 경덕왕의 이러한 오판은 안사의 난이 당 현종의 손자에 의해 진압된 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아들 혜공왕은 결국 제물이 되어 시해당했다. 아비의 죄를 죽음으로 감당해야 했던 혜공왕의 원통함은 그가 만든 성덕대왕신종에 스며들었다. 성덕대왕신종을 타종(打鐘)할 때마다 들리는 애비 때문에 애비때문에 라는 울음 같은 미묘한 소리는 그 종(鐘)의 이름을 에밀레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했다. 경덕왕 때 역사의 기록으로는 찾을 수 없는 김대성이라는 사람에 의해 지어졌다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스스로 폐업한 신라 차(茶) 산업의 가공기술과 저장기술을 아로새긴 불멸의 과학 기술의 기록이었다.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이었다. 역사 기록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김대성은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을 보유했던 모든 신라인의 이름이었다.

Ash salt 를 파는 키비로의 여인들. 출처:위키미디어


해리 존스턴 경((Sir Harry Jhonston)이 이끄는 영국의 킬리만자로산 과학 탐험대가 현생 인류의 기원지인 루왜은조리 산맥이 나일강의 발원지(發源地)라고 확인한 것이 1896년이었는데 그때 존스턴 경이 탐험 후 출간한 우간다의 창세 신화엔 아담 역할을 하는 킨투(Kintu)라는 남자와 그와 함께 나타났다는 상가(Sanga)라는 소, 그리고 무구루(MuGulu)라는 신(神)과  이브의 역할을 하는 그의 딸 남비(Nambi)가 기록되어 있었다. 남비(Nambi)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된 킨투에게 장인인 신(神) 그구루(Ggulu, Mugulu))가 선물한 건 메소포타미아 부조물(浮彫物)에서 생명수(生命樹, Tree of Life, 世界樹)의 열매로 묘사된 바나나(Banana)와 기장(millet) 그리고 암탉이었다. 닭을 우리는 해(奚)족의 새라고 하여 계(鷄)라고 쓴다. 유럽인들은 hen이라고 했다. 닭의 벼슬은 해족의 상투를 닮았다.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횡혈식 석실고분중 하나를 각저총(角抵塚)이라고 하는데 씨름하는 사람들이 그려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씨름하는 사람 둘의 왼쪽에는 곰과 호랑이가 까마귀들이 앉아 있는 가지 끝에 바나나처럼 생긴 열매를 단 차(茶)나무(생명수) 밑둥(trunk)에 각각 등을 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차나무 꼭대기 위에는 삼족오가 그려져 있었다. 구려(句麗)사람들이 성(城)을 구루(溝漊)라고 부른다고 진수는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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