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오카의 개발
1069년 9월부터 시행된 두 번째 신법인 청묘법(靑苗法)은 중국에서 품질 좋기로 엄선된 차나무 묘목(苗木)을 일본에 보내 대규모 재배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제정된 조례였다. 사천성 아안시에 위치한 몽정산에서 오리진(吳理眞)이 차나무의 인공재배를 성공시켰던 기원전 53년이후 천년동안의 기술축적으로 이뤄낸 개량된 차나무들의 종자들이 속속 일본에 보내져 안정화 실험에 들어갔다. 저리의 이자를 농민들에게 제공해 지주들의 고리대 착취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입법 취지는 일본 차재배(茶栽培) 농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싼값으로 일본에서 찻잎을 구매해 중국에서 만든 상대적으로 값싼 청자에 담아 자신들의 배로 실어 날라 전 세계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던 국제적 대상인들에게 송나라 황실이 한중일 삼국 분업이라는 신개념으로 도전장을 내민 셈이었다. 일본에서 생산된 차(茶)들을 그동안 독점해 오던 국제대상인들의 눈치를 보는 일본내 차(茶) 상인들의 판매 기피 때문에 대규모의 새로운 차재배지를 선정해 육성해야 했다. 연평균 기온이 13에서 15도 사이이고 우기와 건기 구별 없이 연 평균 1500 mm 정도의 강우량을 나타내고 연중 온난하며 비가 많이 오는 시즈오카(静岡)가 선정되었고 대규모의 송나라 재정자금이 토지구입과 경작민 육성을 위해 일본에 뿌려졌다. 시즈오카에 심어진 차나무는 산차(山茶)로 명명되었고 그로부터 일본 내 역학관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압도적 지배력을 구가했던 교토와 오사카 지역의 동쪽에 위치해 미개발지로 천대받던 시즈오카가 중심이 된 후지산 지역이 새로운 중앙(中央)으로 떠올랐다. 전통의 관서(關西)지역과 신흥 관동(關東)지역간 문화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창이기(一槍二旗)와 곡우(穀雨)가 가져온 좌측 통행
차(茶)재배와 관계가 없는 관서(關西)지방은 자연스럽게 우측보행이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차잎(茶葉)을 따는데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 시즈오카를 중심으로 한 관동(關東)지방은 그역시 자연스럽게 좌측보행이 당연시되었다. 이유는 어디든 오른손잡이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른손잡이들은 오가는 사람들로 비좁은 길들을 다닐 때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치우쳐 걸어다녔고 이는 우측 통행이 질서로 자리잡은 이유였다. 24절기중 청명과 곡우를 중심으로 한정된 기간중 특정한 기상조건에서만 신속하게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차잎 채집 작업은 오른손잡이들에게 좌측 통행을 질서로 받아들이게 했다. 찻잎을 딸 때 적용되는 일창이기(一槍二旗) 기준은 정교한 손놀림을 요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세밀한 손놀림은 오른손잡이들에게는 오른손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정교하고도 세밀한 수작업을 신속하게 짧은 기간내 마치려면 모든 이들이 평소부터 좌측 통행에 익숙해져 있어야만 했다. 스톤헨지로 대표되는 영국의 좌측통행 또한 기원면에서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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