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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가 오대산으로 간 까닭은

by 檀童稗說 2023. 6. 23.

1. 백제 무왕의 정체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말살(抹殺)하기 위해 당() 태종(太宗)이 모란도(牧丹圖)를 보내며 강력한 압살정책(壓殺政策)을 펼 때, 죽을 때까지 그에 저항(抵抗)한 선덕여왕(善德女王)647년 당 태종의 사주(使嗾)로 벌어진 비담(毗曇)의 반란(叛亂)중에 훙서(薨逝)한 이후 결국 신라가 차()산업을 포기(抛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백제(百濟) 때문이었다. 실크로드 상방(商幫)과 손을 잡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지원(支援)으로 끊임없이 신라를 침략(侵略)한 백제(百濟) 때문에 신라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이 원하는 대로 일본 차() 중계무역(中繼貿易)을 포기(抛棄)할 수 밖에 없었다.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키워 온 백제(百濟)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가 위덕왕(威德王) 사후(死後) 갑자기 왕()이 되어 재위(在位) 기간 내내 신라를 공격하는 것에만 집중하다가 익산(益山)에 동방 최대의 미륵사(彌勒寺)를 건설하고 금동(金銅)으로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제작한 것은 백제가 더 이상 실크로드 상방(商幫)과 대립각을 세우며 해상무역(海上貿易)을 고집(固執)하지 않았다는 증거(證據)였다. 코끼리와 악어, 원숭이 같은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물들이 부조(浮彫)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해양무역을 통해 얻어진 모든 정보와 지식을 담은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의 발견 경위(經緯)가 증명하듯 천태종(天台宗)이었을 위덕왕(威德王)의 원찰(願刹)은 내팽겨쳐 두고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표식(標識)이나 다를 바 없는 미륵사(彌勒寺)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내세운 건 무왕(武王:의자왕의 아버지)이 다스리던 시절의 백제가 어떤 생각으로 역사에 임()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에서 나온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금판(金版)엔 앞 뒷면 합쳐 모두 193자가 음각되어 있었는데 여기엔 동방(東邦) 최대 규모라 할 이 어마어마한 미륵사(彌勒寺)가 기해년(己亥年) 639년에 창건(創建)되었다고 밝혀 주었다. 당시 왕비(王妃)가 왕실(王室)의 안녕(安寧)을 기원(祈願)해 재물을 희사(喜捨)해 지었다고 했으니 미륵사(彌勒寺)는 당시 백제 왕 무왕(武王)의 뜻이 담긴 불사(佛事)였다. 결국 미륵사지(彌勒寺址)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가 알려준 건 모든 해양 세력을 없애버리고 모든 차()들을 실크로드로만 교역하려는 실크로드 상방의 독점(獨占)을 위해 가장 방해(妨害)가 되는 고구려와 신라를 없애는데 백제가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신라를 없애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남제(南齊)와 양()나라가 백제의 동성왕(東城王)과 무령왕(武寧王), 성왕(聖王)과 함께 사라진 후 홀로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차() 독점(獨占) 공작(工作)에 맞서던 위덕왕(威德王)이 죽자 삼한(三韓)의 차() 해상무역(海商貿易)을 지켜내던 백제는 없어졌다. 백제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도, 법왕의 아들도 아니었다. 즉위 과정만이 의문(疑問)인 것이 아니라 즉위 전 인생 자체가 의문투성이인 정체 불명의 백제왕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신라와의 전쟁에만 골몰했다. 실크로드 상방의 지원(支援)을 받아 현무문(玄武門)의 변()이라는 쿠데타로 626년 황제가 된 당() 태종(太宗)이 국가권력을 이용해 육성한 불교 종파(宗派)가 법상종(法相宗)이었고 그 법상종의 주불(主佛)이 미륵불(彌勒佛)이었다. 해상무역에 천착(穿鑿)한 천태종단(天台宗團)의 주불(主佛)은 법화경(法華經)의 주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었고 그래서 천태종단 법당엔 대웅전(大雄殿)이란 현판(懸板)이 걸린데 반해 실크로드로의 무역만을 강요한 법상종단 법당엔 미륵전(彌勒殿)이나 용화전(龍華殿)이란 현판(懸板)이 걸렸다. 그랬던 것이 당 태종의 권력을 등에 업은 법상종단의 계속된 무자비한 탄압(彈壓)으로 절멸(絶滅)의 위기에 몰린 천태종단이 자구책(自救策)으로 내세운 게 화엄종(華嚴宗)이었고 그래서 법당(法堂)의 현판(懸板)은 화엄전(華嚴傳)이나 비로전(毘盧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보광명전(普光明殿) 등으로 바뀌었다. 화엄종단(華嚴宗團)의 주불(主佛)은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었다. 법상종을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은 법상종(法相宗) 개조(開祖)인 삼장법사 현장(玄奘)의 법통(法統)을 이은 규기(窺基)가 서안(西安)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천태종(天台宗) 승려(僧侶)들에 대한 학살(虐殺)을 지휘했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천태종 승려들의 피를 뒤집어 쓴 규기(窺基)가 자은대사(慈恩大師)로 불린 건 희생(犧牲)된 천태종 승려들에 대한 희롱(戲弄)이었다. 그는 천태종(天台宗) 승려들이 한창 도륙(屠戮)되고 있을 때 새로 정립(定立)된 화엄종(華嚴宗)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원융(圓融)은 천태종(天台宗)의 가면(假面)이다.”

 2. 누더기 장삼과 탁발의 유래

중국 서안(西安) 동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에 화엄종(華嚴宗)의 본사(本寺)로 알려진 운제사(雲際寺) 승려 천명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원효(元曉)의 척반(擲盤) 신력(神力)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사건은 이 당시 법상종(法相宗) 양아치들이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천태종(天台宗) 승려들을 잡아 죽였는지 그리고 천태종단의 사찰들을 파괴했는지 은유(隱喩)하는 기록이다. 사찰은 파괴되고 학살되기 일보직전에 놓여 있던 그 천명(千名)이나 되는 천태종 승려를 신라로 데리고 들어와 화염경(華嚴經)을 강론해 모두 득도(得道)케 했다는 양산(梁山) 천성산(千聖山) 화엄벌 설화를 만든 건 그런 법상종 양아치들에게 살륙(殺戮)을 그치라 화쟁(和諍)을 외친 원효(元曉)였다.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본사(本寺)라는 부석사(浮石寺)의 법당(法堂)이 화엄종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이 아니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정토(淨土)가 있는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모셔져 있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는 현판(懸板)을 달고 있는 이유도 무자비한 자은종단(慈恩宗團:법상종단의 또다른 이름)의 학살(虐殺)과 사찰 파괴(破壞) 때문이라는 사실은 당시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사찰(寺刹)이 법당(法堂)의 현판(懸板)을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대웅전(大雄殿)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자신들의 뿌리가 법화경(法華經)을 소의경전(小衣經典)으로 삼은 천태종(天台宗)임을 뒤늦게 고백하며 살육과 파괴(破壞)로 일관한 법상종단(法相宗團)의 만행(蠻行)을 고발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큰 돌들을 날라 다니게 하는 기적(奇蹟)을 보이고 나서야 겨우 사찰 건립을 한사코 방해하던 도적(법상종단 깡패)들을 내쫓고 건립되었다고 하여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창건설화(創建說話)도 모두 다 차산업(茶産業)을 독점(獨占)하려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지원을 받은 자은종단(慈恩宗團:법상종단)의 만행(蠻行) 때문이었다. 천태종(天台宗:해양무역파)이라면 승려(僧侶) 학살과 사찰(寺刹) 파괴(破壞)를 일삼는 법상종단의 폭력앞에 천태종 승려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선승(禪僧)이 되는 길 뿐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스승이 누구인지도 밝힐 수 없어 나중에는 사제지간(師弟之間) 자체가 헷갈리는 것이 선종(禪宗)의 수행자(修行者)가 반드시 보여야 하는 특징(特徵)이 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이었다. 천태종(天台宗) 승려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던 엄연(儼然)한 사찰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을 압수(押收)당하고 사찰내 전각(殿閣)들은 모두 다 파괴되어 살해(殺害)당하지 않으려면 도망을 쳐야만 했다.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장삼(長衫)을 구할 수 있는 아무 천으로나 덧대 기워 입고 탁발(托鉢) 아니고는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었던 천태종 승려였다. 성철 스님의 누더기 장삼으로 대표되는 수행선승(修行禪僧)의 이미지는 이때 고착화(固着化)된 슬픈 역사의 산물이었다. 파계(破戒)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동냥질 말고 없없던 천태종 승려들의 비극은 차산업(茶産業)을 독점하려는 실크로드 상방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추워져만 가는 기후변화는 실크로드(Silk Road)가 아닌 마린로드(Marine Road)로 교역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알려 주고 있었건만 기후(氣候) 온난화(溫暖化) 시절 패권(覇權)을 장악했던 실크로드 상방(商幫)은 그 패권을 놓치려 하지 않았고 마린로드(Marine Road) 무역을 고집(固執)했던 천태종은 그렇게 선종(禪宗)으로 옷을 바꿔 입고 고난(苦難)의 생존을 지켜내야 했다.

 3. 자장율사가 친견한 문수보살 화신의 정체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재건(再建)해 나당전쟁(羅唐戰爭)의 전비(戰費)를 마련해 달라는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부탁을 받은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義湘)이 실크로드 상방의 차산업 (茶産業) 독점에 첨병(尖兵)으로 나선 법상종 승려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문무대왕의 청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 곳은 바로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가 이미 다녀갔던 명주(溟州: 강원도)였다. 속초(束草) 양양(梁陽)이었다. 당 태종과 그의 사주(使嗾)를 받은 백제 무왕(武王)의 압박으로 결국 선덕여왕이 죽고 그런 그녀를 통도사(通道寺)와 태화사(太和寺)로 황룡사(皇龍寺) 9층목탑(木塔) 건설로 뒷받침했던 자장(慈藏)이 최고(最高)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서 실각(失脚)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90 미터 높이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첨탑(尖塔)은 동해(東海)를 통해 경주(慶州)를 향해 오는 모든 무역선(貿易船)들을 안내하는 이정표(里程標) 와 등대(燈臺) 역할을 했고 울산(蔚山) 태화강변(太和江邊)에 지은 태화사(太和寺)는 그런 무역선들에 실려 있는 찻잎들을 모두 인수한 후 증차(蒸茶) 제조를 위해 통도사(通度寺)로 보내는 역할을 했었다. 선덕여왕이 죽자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포기(抛棄)하는 댓가(代價)로 나라의 보존(保存)을 얻어냈고 그래서 새로운 차()산업기지(産業基地)의 비밀스런 구축(構築)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요청(要請)이 되었다. 새롭고 비밀스런 차() 교역로(交易路)를 만들기 위해 실각(失脚)한 채 경주(慶州)를 떠난 자장(慈藏)이 선택한 곳은 최오지(最奧地)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이었다. 동예(東濊), 하슬라(何瑟羅)로 불리던 시절부터 울릉도(鬱陵島)를 통해 일본 차무역선(茶貿易船)이 해류(海流)와 계절풍(季節風)에 말려 본의 아니게 들어오고 있던 명주(溟州)가 그의 목표였다. 신라 전래(傳來)의 차()산업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오대산(五臺山)까지 들어간 자장(慈藏)은 마침내 새로운 차() 교역로(交易路)를 만들어냈다. 강릉(江陵)과 평창(平昌), 동해(東海)와 정선(㫌善), 영월(寧越), 속초(束草)와 횡성(橫城), 원주(原州), 단양(丹陽)과 충주(忠州), 원주(原州)와 제천(堤川), 괴산(槐山)과 공주(公州)에 사찰(寺刹)들을 새로 건립(建立)하거나 기존의 사찰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최초의 내륙(內陸) 횡단(橫斷) 교역로(交易路)가 만들어졌다. 아달라(阿達羅) 이사금(尼師今)이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같은 내륙 종단(縱斷) 교역로를 만든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횡단(橫斷) 교역로의 이름은 차령(車嶺). 수레 거()자로 위장(僞裝)했으나 그것은 분명 차령(茶嶺)이었다. 피물고 덤벼드는 실크로드 상방의 청부업자(請負業者) 법상종 승려들의 경계(警戒)를 풀기 위해 차령(茶嶺)은 차령(車嶺) 말고도 산맥(山脈)이라는 위장막(僞裝幕) 하나를 더 뒤집어 써야 했다. 차령산맥(車嶺山脈). 산맥 아닌 산맥이 만들어 진 연유였다. 그러나 자장율사는 그 차()들을 구입(購入)해 줄 머천트(Merchant:차상인)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만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自責)한 자장(慈藏)은 가리왕산(加里旺山)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자장(慈藏)이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苦待)하던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사실은 선덕여왕이 통치하고 있던 시절, 수많은 위험에도 신라 차()를 구입해 주던 머천트(Merchant 茶商人)였고 그 머천트(Merchant 茶商人)는 싸고 질좋은 신라차()를 대량으로 판매(販賣)하는 자장(慈藏)을 신뢰(信賴)했었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에서 신라차()를 구입해 줄 머천트(Merchant 茶商人)를 만나 선덕여왕의 신라 차산업(茶産業) 보전(保全) 정책(政策)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던 자장(慈藏)이었기에 선덕여왕이 없는 지금, 그 때의 기적(奇蹟)을 재현(再現)해 줄 거라는 염원(念願)를 담아 해동(海東) 오대산(五臺山)이라 명명(命名)한 그곳으로 그를 비밀리에 초청(招請)한 자장(慈藏)이었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에서 만났던 그 머천트(茶商人)에게 실크로드 상방의 파괴공작(破壞工作)에도 불구하고 건재(健在)한 신라 차() 산업현황을 보여주며 중단된 차수출(茶輸出)을 재개(再開)하려던 자장(慈藏)의 계획은 그러나 실패했다. 세계 시장에 신라 차()가 교역되고 있는지를 삼엄(森嚴)하게 감시하는 실크로드 상방(商幫) 때문에 접선(接線) 장소도 옮기기도 하고 형편없는 몰골로 위장(僞裝)도 하며 자장(慈藏)과 오랜 관계를 맺어 온 머천트(Merchant 茶商人)도 자장(慈藏)을 만나려 했지만 자장에게 실크로드 상방이 심어놓은 세작(細作)의 방해(妨害)로 변장(變裝)한 머천트를 알아채지 못한 자장(慈藏)의 실수로 결국 신라 차() 수출계약(輸出契約)은 이뤄지지 못했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을 비밀 터전으로 하여 오랫동안 자장(慈藏)과 차무역(茶貿易)을 이어온 머천트를 그가 원한 갈반지(葛蟠地)에 정암사(淨巖寺)를 창건하고 자장慈藏)은 기다렸건만 그는 자장慈藏)을 만나지 않고 돌아섰다. 아니 만나지 못하게 하였기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 가버린 그였다. 그를 돌아서게 한 건 세작(細作)으로 들어와 있던 시자(侍子)의 간계(奸計)때문이었다. 그 시자는 용화향도(龍華香徒)의 화랑(花郞)이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4권 자장정율조(慈藏定律條)에 이 이야기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의 깊은 갈반처(葛蟠處:정암사)를 찾았다. 어느 날 어떤 노거사가 남루한 가사를 수하고 칡으로 된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가지고 와서는 시자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자장을 보러 왔다고 했다. 시자는 스승을 받들어 모시면서부터 나의 스승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이를 보지 못하였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러한 광언(狂言)을 하는가라고 답했다. 이에 거사가 말하기를 다만 너의 스승에게 고하여라고 했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니, 자장이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심각한 광자(狂者)인가 보다고 했다. 시자가 나와서 그를 쫓으니, 거사가 말하기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이 있는 자가 어떻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삼태기를 뒤집어서 터니 죽은 개가 변화하여 사자보좌(師子寶座)가 되었다. 그 자리에 올라가 방광하며 떠나갔다. 자장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바야흐로 위의를 갖추고 방광한 빛을 찾아서 남쪽봉우리(南嶺)로 황급히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묘연(杳然)하여 미칠 수 없게 되니 마침내 몸이 떨어져서 죽었다(殞身). 이에 다비(茶毘)하여 뼈를 돌구멍 가운데 안치했다.

 

4. 차령산맥의 탄생

대마난류(對馬暖流)가 대마도(對馬島) 북쪽을 지날 때 갈라져 나와 신라의 남동쪽 해안을 따라 북상(北上)하는 동한난류(東韓暖流)는 울릉도(鬱陵島) 부근에서 남하(南下)하는 한류(寒流)와 만나 큰 소용돌이를 만들며 환류(還流)하는데 이러한 현상 때문에 강릉과 동해, 울진(蔚珍)과 영덕(盈德)지역에서는 피항(避港)하는 차()무역선(貿易船)들이 많이 들어오는 포구(浦口)였다. 일본 차()를 독점(獨占)하기 위해 신라의 차() 중계무역(中繼貿易)을 한사코 막아서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감시(監視)와 견제(牽制)를 뚫고 이렇게 어렵사리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들을 가공해 다시 무역로(貿易路)에 올리기 위해 자장(慈藏)대사가 새로 만든 일명 차령(車嶺)은 강릉과 동해, 삼척(三陟)으로 들어오는 차()를 정선(旌善)과 영월(寧越)로 연결하는 주선(主線)과 속초(束草), 양양(襄陽)으로 들어오는 차()를 평창(平昌)과 원주(原州)로 연결하는 배선(陪線) 이렇게 두 개의 공급선(供給線)이 연결된 교역로였다. 영덕(盈德)과 울산(蔚山), 기장(機張)으로 들어오는 차()를 양산(梁山)으로 연결하는 또 하나의 교역선(交易線)은 선덕여왕때 가동되던 전성기(全盛期) 시절의 교역로였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에서 친견(親見)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시대로 황룡사에 9층 목탑(木塔)을 세우고 태화사(太和寺)를 창건했던 시절의 교역로는 차령로(車嶺路)와는 별개인 소백산맥 이남의 교역로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영덕(盈德)의 유금사(有金寺), 포항(浦項)의 천곡사(泉谷寺), 울산(蔚山)의 태화사(太和寺)에서 각각 들어온 찻잎(茶葉)들을 양산(梁山)의 통도사(通度寺)에서 집산(集散)해 증차(蒸茶)로 제조한 뒤 밀양(密陽)의 보림사(寶林寺)를 거쳐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 청주(淸州)의 동화사(東華寺),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보령(保寧)의 무량사(無量寺)로 옮겨 수출(輸出)하는 경로(經路)였다. 선덕여왕이 죽고 자장대사도 대국통(大國統)에서 실각(失脚)하자 결국 이 교역로는 폐쇄(閉鎖)되었다. 이후 신라의 차()산업을 지키려는 자장대사의 희생(犧牲)적인 노력으로 새롭게 개척(開拓)된 차령로(車嶺路)는 강릉(江陵)의 월정사(月精寺), 평창(平昌)의 수다사(水多寺), 정선(旌善)의 정암사(淨巖寺), 영월(寧越)의 흥녕사(興寧寺:지금의 法興寺), 단양(丹陽)의 대흥사(大興寺) 그리고 천안(天安)의 광덕사(廣德寺)를 거쳐 공주(公州)의 마곡사(麻谷寺)로 연결되는 동서 횡단(東西橫斷) 무역로(貿易路)였다. 지금 산맥(山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차령(車嶺)산맥을 굳이 산맥으로 불려지게 한 건 신라의 차()산업(産業)을 한사코 없애려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감시(監視)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위장책(僞裝策)이었다. 자장(慈藏)대사가 결국 실크로드 상방(商幫)의 세작(細作)의 방해(妨害)로 정암사(淨巖寺)까지 변장(變裝)을 한 채 찾아온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化身), 머천트(Merchant)를 친견(親見)하지 못한 채 가리왕산(加里旺山)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자 신라인들의 원망(怨望)은 깊었다.

5. 진상떠는 진상의 유래

 실크로드 상방(商幫)을 이루는 두개의 축()인 진상방(晉商幫)과 소그드(Sogd) 상방(商幫)중 소그드인들을 볼 수 없었던 당시 신라인들은 신라의 차()산업을 말살(抹殺)하고 차()무역을 독점하려는 세력이 오직 진상방(晉商幫)인 줄만 알고 진상(晉商)만을 원망(怨望)하고 저주(咀呪)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진상손님진상 떤다라는 말은 임금에게 공물(貢物)을 바치는 진상(進上)에서 유래( 由來)된 말이 아니다. 나라를 구하고자 심심산골을 마다않고 몸소 누볐던 절세의 애국자 자장(慈藏)대사를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한 진상(晉商)들을 신라인들은 사람들을 막 대하는, 과도한 요구를 하면서 뻔뻔하게 구는 철면피,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로 여겼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을 상놈중의 상놈이라고 하여 진상이라 하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진상 떤다 라고 혐오(嫌惡)했다. 방언(方言) 연구가 김성재씨가 “‘진상진상 떨다라는 방언(方言)을 쓰는 지역은 경북(慶北)과 충남(忠南)이다. 경북에서도 청송·의성·예천·봉화 같은 북부지역과, 충남과 접경을 이루는 문경·상주 등에서 널리 쓰인다. 충남에서는 거의 전역에서 쓰는데, 대표적인 지역으로 공주·부여·논산 등지와 대전을 꼽을 수 있다.”(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최태호 교수의 글에서 발췌)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자장대사가 개척한 차령로(車嶺路)로 수송(輸送)된 신라의 증차(蒸茶)가 전 세계로 수출되는 곳이었던 충남에서 그리고 통도사에서 만들어진 증차(蒸茶)를 보령(保寧)으로 보내는 계립령(鷄立嶺)이 있는 문경(聞慶)과 영덕((盈德)에서 만든 차(茶)를 보은(報恩)을 통해 공주(公州)와 보령(保寧)으로 연결하는 상주(尙州)에서 진상이라는 방언(方言)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라인들이 진상이다또는 진상 떤다라며 혐오(嫌惡)하던 진상은 진상(進上)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차()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신라의 차() 산업을 부당하게 힘으로 말살해 급기야 자장대사를 죽음으로 내 몬 진상(晉商)들에 대한 신라인들의 평가(評價)에서 유래한 것이다. 차령로(車嶺路)의 주 무대였던 충남사람들과 경남북 해안에서 집산된 차()들을 차령로(車嶺路)로 수송하던 역할을 담당하던 경북 북부 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업(生業)을 부당하게 파괴(破壞)하는 진상(晉商)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이를 좀 더 상세히 알아보면 당시 차령로(車嶺路)로 차()를 보내는 영남지역의 수송로는 크게 세 개였다.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이었던 영산현(靈山縣:지금의 창녕)의 영축산(靈蹙山)에 있던 보림사(寶林寺)를 떠난 수송대(輸送隊)가 김천(金泉)의 직지사(直指寺), 옥천(沃川) 상원사(上院寺), 대전(大田)을 거쳐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도착해 자장대사가 새로 건설한 차령로(車嶺路)에 통도사(通度寺)의 증차(蒸茶)를 유통되게 하는 것이 첫번째. 고려말의 개혁가 신돈(辛旽)의 사찰이었던 밀성군(密城郡) 계성현(桂城縣)의 옥천사(玉泉寺)에서 떠난 양산(梁山)의 증차(蒸茶)가 청도(淸道)의 운문사(雲門寺)와 달성(達城)의 소재사(消災寺)를 거쳐 군위(軍威), 의성(義城), 예천(醴泉)을 지나 문경(聞慶)에 다다르고 문경(聞慶)을 통해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월악산(月岳山)을 넘은 수송대가 충주(忠州)와 천안(天安)을 거쳐 역시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도착하는 두 번째. 그리고 영덕(盈德) 유금사(有金寺)에서 떠난 차()들이 상주(尙州) 황령사(黃嶺寺)와 보은(報恩)을 거쳐 청주(淸州)의 동화사(東華寺), 천안(天安) 광덕사(廣德寺)를 거쳐 역시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도착하는 세 개의 경로였다. 차령로(車嶺路)라는 무역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충남사람들과 경남북 해안에서 집산된 차(茶)들을 차령로(車嶺路)로 운반하는 일을 했던 경북 북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빼앗은 진상(晉商)을 어떻게 조롱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진상이란 단어다.

6. 자장가의 유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그렇게 죽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의 헌신(獻身)이 보람없이 사라진 것을 원통(怨痛)해 한 강원도 사람들은 그의 애국애족 정신(情神), 그의 헌신(獻身)을 대대(代代)로 전하고자 자장 자장으로 시작하는, 아기 재울 때 부르는 자장가(慈藏歌)’를 만들어 그의 염원(念願)을 아이들에게 알렸다.

자장자장 우리애기 잘도잔다/ 금자둥아 은자둥아 만고청산 보배둥아 / 금을주니 너를사랴 은을주니 너를사랴 / 금두나 다싫고 옥도 다 싫다 나는나는 네가좋아/ 하느님전엔 충신둥아 나랏님전엔 보배둥아 부모님전엔 효자둥아 일가일신 우애둥아 동네방네 인심둥아/ 인심좋아 말끝마다 영화로다 너를 사랴” “국가에는 충성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동기간에 우애동이 일가친척 화목동아 동네에는 유신동이 태산같이 굳세어라 악대같이 실하여라 하해같이 깊으거라, 유명 천하 하여보자

라고 하는 가사(歌詞)들로 이루어진 이 노래는 강원도에서 아기 재울 때 부르는 노래였다. 노동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반드시 재워야 할 아기에게 불러주는 노래에도 사람들은 자장대사의 헌신과 희생을 기렸고 애국자에 대한 칭송을 잊지 않았다. 효자가 되어 집안과 마을을 단결시키고 나라를 지키는 자장대사같은 충신이 되라는 이 노래는 자장가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강원도를 넘어 신라 전역에서 불려졌다. 결국 이 자장자장 소리는 온 신라에 퍼져 모든 신라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들의 자식들인 아이들을 향해 주문처럼 불려졌다. 제주도까지 건너간 이 자장자장 소리가 자랑 자랑으로 변해 불려 질 정도로 자장대사의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은 온 민족을 감동(感動)시켰고 그의 인생은 실패였으나 자랑으로 기억되어졌다. 아이들을 재우는 노래를 자장가라고 쓰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뿐이다. 중국인들은 요람곡(搖籃曲)이라고 쓰고 일본인들은 고모리우따(子守歌)라고 쓴다. 자장가는 한자가 없는 순 우리말이 아니다. 자장가는 자장가 아니다. 慈藏歌. 영어로는 lullaby라고 그들은 그저 달래고 어르는 노래로 자장가를 다루었다는 걸 알게 하는 이름이다. 

7. 아리랑의 유래

 자장대사가 절벽에 떨어져 생을 마친 강원도 정선(旌善)에서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시작된 건 그래서 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정선 아리랑의 가사 중 1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慕春) 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울어/ 영감은 할멈치고 할멈은 아치고 아는 개치고 개는 꼬리치고 꼬리는 마당치고-

여기에서 언급된 만수산(萬壽山)은 다름 아닌 충남(忠南) 보령(保寧) 성주면(聖住面)에 있는 만수산(萬壽山)이었다. 만수산(萬壽山)은 자장대사(慈藏大師)가 개척(開拓)한 새로운 차() 교역로인 차령로(車嶺路)를 완성시키는 보령(保寧)에 있는 차령산맥(車嶺山脈)의 끝자락에 있는 산이다. 보령(保寧)과 부여(扶餘)의 경계(境界)에 서있는 산()으로 후일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이 터 잡은 성주산(聖住山)은 이 만수산(萬壽山)의 서쪽에 연이어 있는 산()이다. 동해(東海)와 삼척(三陟)을 통해 들어온 일본 찻잎(茶葉)들이 아우라지로 집산(集散)되는 곳이 정선(旌善)이었고 그래서 정선(旌善) 사람들은 자장대사의 좌절(挫折)을 애도(哀悼)했다. 그리고 자장 죽음의 책임을 진상(晉商)과 당()나라가 져야 함도 알고 있었다. 영감은 할멈치고 할멈은 아치고 하는 마지막 가사에 담긴 점층법 논리는 실크로드 상방(商幫)이 진상(晉商)을 압박했고 진상(晉商)이 다시 당()나라를, 당나라가 신라지배층을, 신라 지배층이 신라의 하급관리들을 차례로 압박했고 그 결과 하급관리인 세작(細作)들이 자장대사(慈藏大師)를 죽게 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노래에 남긴 것이었다. 정선 아리랑과 밀양 아리랑과 함께 3대 아리랑으로 꼽히는 진도 아리랑 가사에는 진도(珍島)에서 멀리 떨어진 문경(聞慶)의 고갯길이 언급된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문경은 차령로(車嶺路)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을이었다. 또한 3대 아리랑 가사중에는 신기하게도 3개 아리랑에 똑같이 들어있는 가사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서산에 지는 해가 지고 싶어 진 게 아니'라는 가사다. 자장대사가 절벽에 몸을 날린 것이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는 신라인들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표출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는 게 아리랑이라는 노래에 담은 민족의 마음이었다. 아리랑은 그런 자장대사의 정신을 그런 그의 희생을 잊지 말자는 약속이었다. 아리랑이 그토록 사무치고 그토록 가슴을 치는 이유가 그래서 겨레의 노래로 남은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정들이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정선아리랑 이별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니자 날두고 가신 님은 가고 싶어 간. (밀양 아리랑)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날 두고 가신 임은 가고 싶어 가느냐. (진도 아리랑)

7. 맺는 말

 자장대사는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자장대사는 잃어버린 대국통(大國統)의 승직(僧職)을 되찾기 위해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려 한 것이 아니다. 자장 대사는 깨달음과 득도만을 위해 그토록 헌신(獻身)한 것이 아니다. 자장대사가 오대산으로 향한 이유를 권토중래(捲土重來)에서 찾았기에 오늘 한국의 불교는 국립공원 입장료 따위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자장 대사가 그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장가를 잃어버리고 브람스와 모차르트의 Lullaby를 자장가라고 부르고 있게 된다. 자장 대사가 그 때 무슨 마음으로 가리왕산(加里旺山)의 절벽에 몸을 던졌는지 잊어 버렸기에 우리 스스로도 산맥이 아님을 알면서도 차령로(茶嶺路)를 차령산맥(車嶺山脈)이라 그저 계속 외우게 되었다. 이제...아리랑은 더 이상 겨레의 노래로 일상(日常)에서 불려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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