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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기와 장수라는 말이 담고 있는 진짜 역사

by 檀童稗說 2023. 3. 2.

환율과 금리, 물가는 치솟고 수출과 국제수지, 부동산가격은 떨어지는 그야말로 총체적 경제위기가 살떨리게 실감나는 요즘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안 시행으로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는 한국의 관련 산업들을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거칠게 몰아세우는 어처구니없는 오늘, 급격히 변하고 있는 기후는 인류 문명의 기반들마저 뒤흔들며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오랜 동맹으로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한 근원인 미국과 40년간의 미국 지원으로 G2까지 치솟으며 한국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준 중국이 이젠 서로 적대국처럼 경쟁하고 있는 지금,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지키기 위한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이 위험하면서도 결정적인 이유는 향후 백년간 한국과 한국민들의 운명이 그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는 지금 같은 결정적 선택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누리고 있는 번영에 취해 시시각각으로 정세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저하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적도 있었고 앉아서 가난해지느니 서서 죽겠다며 국가적 명운이 걸린 선택을 전쟁으로 결정해 900년의 나라를 결딴낸 적도 있었다. 그렇게 파국으로 끝나버린 비극적 경험 때문에 가난한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지레 머리 조아린 사대를 견뎌야 했던 적도 있었다. 이런 세 가지 경우에 해당되는 대표적 역사적 경험들을 꼽아보면 그 첫째가 청기와 장수 속담을 만들어 낸 고려 의종대, 둘째가 연개소문이 주도한 고구려가 수,당나라와 대결했던 시기 그리고 셋째가 주원장과 주태의 연이은 협잡에 무릎 꿇은 조선  태조와 태종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사적 순간들을 차례로 드러내 반성하면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후손들에게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 줄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1-1. 청기와 장수란 말이 생겨난 이유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의종 11(1157) 4, 만월대라 불린 고려의 정궁 동쪽에 이궁이 건설되었다. 이궁의 여러 건물 가운데에 양이정이란 건물이 신축되는데 놀랍게도 양이정의 지붕은 온통 청기와로 덮여졌다고 한다. 당시 최고급 도기로 전 세계에서 중국과 고려에서만 생산되었던 청자는 황실과 일부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초고가 상품이었는데 그런 청자를 만들 때 사용하는 똑같은 재료와 기술로 만든 기와를 건물기와로 사용해 지붕을 덮었다고 하니 고려 의종 때의 영화를 웅변하는 기록이었다. 당시 청자는 중국의 일부 지역들에서만 만들어 내는, 초일류 과학기술이 있어야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략물자였는데 당시 고려는 중국과 함께 그런 청자를 생산해 내는 세계에 둘밖에 없는 나라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무신정변(1170) 이 발발하고 뒤이어 의종이 이의민에 의해 등골뼈가 부러져 경주 곤원사 북쪽 연못에 던져지자 청기와는 다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드는 기술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청기와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생산되던 청자도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역시 사라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고려청자와 청자기 제조기술을 당대 고려 사람들은 청기와 장수란 말을 만들어 민족의 역사에 그 일들을 잊지 않도록 남겼다.   

당시 청자로 대변되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보유한 송나라(중국)가 고려에 그 청자 제조 기술자들을 파견해 주요 지역에 청자공장들을 지어 청자기까지 대량생산해 낸 것은 고려 현종이 개발하고 강감찬이 지켜낸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으로 제조한 황차(黃茶)를 독점하려는 속셈때문이었다. 실크 로드는 서하에게, 초원로는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대륙 무역로의 지배권을 상실한 송나라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해양무역로를 통해 차(茶)무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고려와의 동맹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었다.  고려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 왕안석의 신법이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청기와 장수란 말의 뜻은 어떤 사람이 청기와 굽는 법을 알아냈으나 이익을 혼자 차지할 생각으로 자식에게조차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죽어버려 그 바람에 비법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매우 고약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비법이 전수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익을 혼자 차지하려고 죽어가는 마당에도 자기 자식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았다는 건 매우 믿기 어려운 상당히 의심이 가는 언급이다. 이익 때문에 자기 자식에게조차 감추었다는 것은 그 일을 행한 자들이 진짜 아버지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모든 죽어가는 부모는 살아봐서 잘 안다. 세상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자식들이 살 떨리도록 애인해진다. 이익에 짓밟히는 애처로움이라면 천륜이 아니다. 청기와 장수를 뜬금없는 사건으로 만든 이유는 왕안석의 신법과 신주, 그리고 고려 대각국사 의천과 윤관의 여진정벌,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들이 한 맥락으로 엮이는 것을 누군가가 호도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1-2 왕안석 신법 시행의 진정한 목적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등에 의해 자행된 무신정변으로 끝장난 고려의 부귀영화는 사실 1009년 고려 현종이 개발한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으로 황차(黃茶)를 개발, 수출함으로써 번영을 시작하고 1069년 왕안석의 신법으로 시작된 송나라의 혁명적인 대외경제정책으로 폭발적 발전을 구가한 선물 같은 백육십여년의 호황이었다. 왕안석이 주도한 것으로 기록된 희녕변법(熙寧變法)은 그러나 왕안석이 아니라 북송 6대 황제였던 신종()이 왕안석을 방패삼아 황실과 왕조의 운명을 걸고 감행한 경제혁명이자 세계화 전략이었다. 23살의 나이로 1067년에 즉위한 신종은 왕안석을 강녕부(지금의 남경일대) 지사로 임명해 장강 하류의 차 무역(茶 貿易)실상을 상세히 파악하게 한 후 다음해엔 수도 개봉으로 불러올려 황제의 조칙(詔勅)을 기초하는 한림학사로 등용해 자신의 구상을 실현할 방안을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로 대내경제와 대외경제 그리고 재정을 통괄해 경제혁명을 일으킬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가 설치되었다. 신종은 염철과 탁지, 호부로 삼분되어 각각 염철사와 탁지사, 호부사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관리되던 대내외 경제 관리(官吏)를 모두 제치삼사조례사(삼사) 예하에 두어 재상이 통합감독지휘하게 했다. 1069년 신종은 왕안석을 제치삼사조례사를 맡는 참지정사에 임명하고 여혜경과 소철을 검상문자관(檢詳文字官)으로 함께 등용해 균수법과 청묘법으로 대표되는 희녕변법들을 전격 시행했다. 그 신법들의 진짜 목적은 철저히 숨겨진 채로.

 대지주와 대상인을 억제하고 자영농과 중소상인을 보호하면서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이른바 경제민주화로 알려진 왕안석의 신법들은 그러나 우리가 알고있는 그런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중국 왕조들에게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던 주요 무역로(貿易路)들에 대한 통제권을 모두 잃어버리고 주변 군사강국들에게 배상금을 바치느라 재정적자에 허덕여가던 희망 없는 송나라 황실이 일대 반전을 꾀하고자 시행한 혁명적 시도였다. 막대한 교역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무역로(실크 로드)를 이용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하서회랑(河西回廊:무위,장액,주천으로 이어지는 길)의 지배권은 이미 1044년 인종(仁宗)때부터 서하에게 빼앗겨 있었다. 게다가 초원로라 불리던 태초부터 있어온 무역로 지배권은 이미 인종의 아버지 진종(眞宗)대인 1005년에 전연지맹(邅淵 盟約)으로 불리는 조약에 의해 요()나라에 넘어간 지 오래였고. 중국을 대륙 서쪽 끝까지 연결시켜주던 교역로들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빼앗긴 송나라로서는 기댈 데라곤 마린루트(marine road)라 불리는 장강과 바다를 이용한 해양무역로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지배하고 있는 해양교역로를 통해 국제무역을 활성화하고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는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신종이 택한 정책은 일본차(日本茶)의 중계무역이었다. 일본차를 국제 무역품으로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송나라 조야의 원로들이 극렬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초원로(草原路)와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의 매서운 감시가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송 태조의 급사(急死)와 송 태종의 어둠속 도끼소리를 다시 들려주고 있었다.

청기와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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