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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전술(淸野戰術)

by 檀童稗說 2023. 12. 24.

明臨荅夫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玄菟郡太守 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執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答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小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答夫帥師數千騎 追之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賜答夫坐原及質山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명림답부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현토군 태수 경림이 대군을 발동하여 우리를 침공하려 하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에서 어느 것이 유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는 병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반면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관문을 지켜도 만 명이 당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한군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납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며, 지금 정예병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또한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상법입니다. 지금 한 나라 사람들은 천 리 길에 군량을 운반해 왔으므로 오랫동안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을 비워 놓고 기다린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강병을 앞세워 추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 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렸으므로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교전하였는데, 한 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하사하여 그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가 15년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통해하며 7일 간 조회를 금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하고 묘지기 20가를 두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 45(卷第四十五) 열전(列傳) 제5(第五)

섬진강을 통해 들어오는 일본 찻잎을 가공해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낙동강을 통해 한강과 연결시키려는 백제가 신라와 치열하게 싸웠던 경남 함양 사근산성 전경


청야전술(淸野戰術)은 초토화(焦土化) 전술이다. 침공해 들어간 공격군이 방어하고 있던 수비군을 격파한 후 자신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맞선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기 위해 감행하는 전술이다. 카르타고와의 오랜 전쟁 후 승리한 로마군이 카르타고의 모든 걸 불태운 후 소금까지 뿌렸던 게 청야전술이었다. 서하(西夏)와 호레즘(Khwarezm, Chorasmia)을 굴복시킨 칭기즈칸의 몽고군이 수레바퀴보다 큰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모든 걸 불태워 공포에 떨게 하는 게 초토화 전술이었다. 1945년에 끝난 전쟁에서조차 일어났던, 전쟁 범죄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모든 걸 초토화시킨 후 점령하던 소련에서의 독일 나치군이 보여준 전술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습격해 온 외국군대로부터 자기 땅을 지키겠다고 나선 자기 나라 군대가 자기 나라 백성들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후퇴하는 것 또한 청야전술(淸野戰術)이라 불렀다. 1812년 70만 나폴레옹 군의 침략을 받은 러시아 쿠투조프 장군이 모스크바까지 이르는 프랑스군의 점령지역을 모조리 불태우며 후퇴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모든 전쟁은 더 많은 재화(財貨)를, 경제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마지막 형태의 패권 경쟁이다. 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그래서 전쟁 후의 경제적 풍요다. 전쟁이 끝난 후 복구(復舊)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초토화 전술은 그래서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최악의 전술이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이런 청야전술을 너무나도 당연한 전술로 받아들이고 게다가 필승의 전법으로 구사했다.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8년(172년)부터 구사(驅使)되기 시작한 청야전술은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 백제에서도 지속된 그야말로 우리 민족 특유의 방어 전법이 되었다.

금강을 한강에 연결시키는 달천을 통제하기 위해 신라가 삼년에 걸쳐 쌓았다는 보은의 삼년산성


기원전 2000년경의 청동기시대 중반부터 보이는 중국 고대(古代)의 읍성(邑城)들이 우리 민족 고대(古代) 강역(疆域)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읍(邑)이란 곳이 일정한 규모의 평야를 끼고 있는 평지나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기에 방어(防禦)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성(城)으로 둘러싸여야 하는 취락(聚落)이었고 성(城)이란 건축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고을이었기에 중국은 국가의 기원(起源)이 읍제(邑制) 국가였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중국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대 강역(疆域)엔 이런 읍성(邑城)의 흔적이 없었다. 왜일까? 심지어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다투던 5세기에도 우리 민족은 읍성(邑城)은 안중에도 없고 주야장천 산성(山城)만을 경쟁적으로 축조(築造)하고 있었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積城面)은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기리영(崎離營) 전투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 기록된 마한(馬韓) 때부터 축조된 성(城)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축성(築城)으로 성(城)들이 켜켜이 쌓인 고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켜켜이 쌓인 성(城)들은 거의 모두 언덕과 산(山)들에 위치한 산성(山城)들이었다. 그런 산성들은 모두 일정한 원칙과 순서에 의해 다듬어지고 놓이고 쌓인 계획적인 토목건축물(土木建築物)이었다. 판축공법(版築工法)이라 불린 특유의 토성(土城) 축성법(築城法)을 주로 사용해 산성(山城)의 비중이 크지 않았던 백제와 산성(山城)을 주로 쌓던 신라가 주류를 이루었던 남한 지역에서만도 1200개의 산성터가 남아 있을 정도이니 나라 자체가 산성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고구려가 전 강역을 지배한 북한 땅에서는 그 숫자가 얼마일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산성(山城)의 나라.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한 스스로를 지키는 국방전략이었다. 왜 그랬을까? 중국인은 너른 평야가 있는 곳에다 축조한 성(城)을 왜 우리 민족은 산(山)에다 건설(建設)해 놓은 것일까? 그리고는 침략을 받을 때 왜 집과 곡식들을 불태우고 스스로 산성(山城)으로 올라간 걸까?

한강을 임진강과 연결해 만주로 나가는 차수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신라의 한강과 임진강 연안의 산성들. 출처:경기문화재연구원


차(茶) 나무 때문이었다. 차(茶) 때문이었다. 차나무는 산에만 있었고 찻잎은 산에 있는 절(寺刹)에서 가공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차(茶)는 사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岩子)에 저장되었다. 우리 민족이 사찰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가까이에 건설하지 않고 구태여 많은 돈과 큰 힘을 들여야 하는 깊은 산속에 건설한 연유였다. 찻잎 저장고에서는 무조건 제거해야 할 고온(高溫)과 다습(多濕)이기에 규소(硅素, SiO2)가 많이 든 돌(石)들로 저장고를 만들었고 돌들로 만들어진 공간의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이에 의해 생겨나는 수분(水分)을 흡수하기 위해 돌들 위에 흙들을 쌓았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石窟庵)은 암자(岩子)가 암자(庵子)로 변하기 전의 진짜 암자(岩子)가 어떤 일을 하던 곳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차(茶) 나무가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는 그래서 찻잎을 가공할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산(山) 속에 산성(山城)을 축조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기후변화로 초원로(草原路, Steppe Route)가 얼어붙자 중국 땅을 동(東)에서 서(西)로 횡단(橫斷) 해야 했던 차(茶)를 운반하는 카라반(Caravan)들의 숙식(宿食)을 제공하는 일과 그사이 도둑들로부터 그들의 차(茶)를 지켜주는 일이 큰 돈벌이가 되었다. 중국이 역참(驛站)처럼 띄엄띄엄 성(城)을 가진 읍(邑)중심의 부락을 기본으로 하여 시작한 나라가 된 연유였다. 중국이 읍제(邑制) 국가로 출발했다고 단정하는 연유였다.

기후변화로 차생산이 줄어든 고구려가 신라를 통해 일본찻잎을 수입하기 위해 확보한 한강과 임진강의 교두보인 산성들(광개토대왕의 눈물들이다) 출처:경기문화재연구원


찻잎을 따고 씻고 찻잎을 시루로 찌어 증청(蒸靑)하고 절구로 찧어 동그랗게 또는 네모지게 긴압(緊壓)하고 하는 모든 일이 천문학(天文學)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역법(曆法)에 따라 진행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차(茶)를 만드는 일을 농사(農事)라고 불렀다. 별이 하는 일. 그렇게 만든 청태전(靑苔田)과 청전차(靑甎茶)를 후일 암자(庵子)로 이름이 변하게 되는 암자(岩子)에 저장했다. 식량과 필수 가재도구만을 챙겨 마을에 있는 모든 걸 불태우고 산성(山城)으로 올라왔다 해도 마을에 있는 돌로 만들어 놓은 차(茶) 가공시설(고인돌)들은 그을릴 뿐 그대로였다. 올라온 산성(山城)엔 우물도 있었다. 우리 민족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쏘았을 때 그 살상(殺傷) 효과가 더욱 커지는 활과 화살에 그토록 능했던 연유였다. 나무가 많고 길도 좁아 활동 공간이 협소한 산속에서 칼을 휘두르고 긴 창을 쓴다는 것은 몹시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몸을 비스듬히 하여 몸통 크기 내에서 화살을 재우고 쏘는 사격(射擊)은 산(山) 안에서는 무척 효과적인 전투행위였다. 검술(劍術)과 창술(槍術), 권법(拳法)은 산속에서는 쓸데없이 배만 고프게 해 밥만 많이 축내게 하는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우리 민족이 산성(山城)의 민족이 되고 활의 민족이 된 연유였다.

경기 하남에 있는 백제의 판축토성이 아닌 석성으로 축조된 이성산성 유적


기후변화로 차나무가 사라지면서 청야전술도 잊혀져 갔다. 결국 당나라에 의해 백제와 산성의 나라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마저 차(茶) 산업에서 손을 떼자 산성(山城)은 더이상 축조되지 않았다. 9주 5소경이란 지방의 도회지(都會地)가 만들어지고 산성이 아닌 평지의 읍성이 축조되는 근본적인 변화가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생기면 산으로 들어가 산성에서 버티는 우리 민족의 DNA는 여전해서 홍이포같은 대포(大砲)가 종횡무진(縱橫無盡) 하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백마(白馬)산성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주된 전장(戰場)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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