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를 만들기 위해 먼저 만들어진 것이 청기와였다. 청기와를 제대로 구워 낸다는 건 청자를 완벽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청자 자(瓷)자가 기와 와(瓦)자와 다음 차(次)자로 이루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청기와 장수에서 언급된 청기와 만드는 기술은 곧 청자를 제작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청자 만드는 기술을 자기 자식에게조차 비밀로 할 만큼 고수익을 가져다 준 건 청자 없이는 차(茶)를 해상운송으로 운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비싼 차(茶)를 구입한 개인들이 차(茶)를 저장하고 보관하기 위해서는 청자호(靑瓷壺)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초원로와 실크로드라는 두개의 주요 육상 무역로 지배권을 빼앗긴 송나라로서는 해상 무역로를 지키고 확충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나라의 미래였다.
사천에서 생산되는 차(茶)는 물량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실크로드를 장악한 육상 운송파들에게 과점(寡占)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차(茶)를 청자 항아리에 담아 이라크 사라마르(sarramar)까지 선박으로 운반하는 해양 무역이 송나라 상인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청자항아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지지대(遲遲臺)도 발명되고 선박들도 원양항해에 걸맞게 대규모화하고 돛(sail)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범선(帆船)으로 발전해갔다. 원양항해가 필수적이 되면서 나침반이 개발되어졌고 바닷길을 표시한 해도도 그려지게 되었다. 차(茶)를 원양수송하기 위해 그려졌기에 해도(海圖)를 영어로 chart 라고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청자의 한계가 곧 드러났다. 강이나 연안에서의 운항(運航)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던 청자의 경도(硬度)가 원양 항해시에는 너무 약해 자주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청자가 깨진다는 건 그 안에 들어있는 차(茶)들이 상품가치를 잃어버린다는 것이었고 그건 파산을 의미했다. 파산을 면하기 위해선 차(茶)를 운반하는 용기로서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았던 청자의 단점인 경도(硬度)를 개선해야만 했다. 거친 풍랑에 배가 흔들리거나 침몰하는 경우에도 쉽게 깨지지 않는 새로운 자기(porcelain)가 개발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백자(白磁)였다.
중국인들이 최고의 경도(硬度)를 가지면서도 그 어떤 수분과 습기로부터도 차(茶)를 지켜내는 자기(瓷器)를 만들 수 있는 흙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안 건 북제 말기였다. 고령진에서 캐낸 유백색의 흙으로 소성(塑性)해 1400도에 가까운 열을 내는 그저 단순한 산화염(酸化焰)으로만 구운 자기였다. 청자를 소성(塑性)하는 규조토는 장석질을 많이 함유한 유약을 두껍게 시유해도 산화염으로만 구우면 어느 순간 허물어지는 흙이었다. 그렇기에 청자는 반드시 가마의 불꽃을 어느 순간엔 공기가 가마에 들어가는 걸 모두 막아 환원염(還元焰)으로 만들어 구워야만 했기에 비싼 땔감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물건이었다. 같은 가마에서도 색깔이 제각각으로 나와 구운 제품의 반이상은 버려야 하는 그야말로 저효율 고비용 생산품이었다. 그런데다 낙타와 나귀, 말들의 등에 올려 차를 나르기에는 가성비가 너무 낮아 마땅치 않은 운송용기였다. 그런데 고령토로 소성(塑性)한 백자는 1400도까지 올라가는 산화염으로만 구워도 허물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경도가 더 좋은 자기로 가마에서 나와 주었다. 실크로드와 초원로를 장악한 소그드상방(sogd 商帮)과 진상방(晉商帮) 연합체 상인들에겐 배척되어진 자기(瓷器)가 그러나 청자가 아닌 백자로 마린 루트(해양무역로)에 투입된다면 소그드상과 진상(晉商)에겐 코끼리가 차(茶)들을 실어 나르는 것과 같은 악마의 경쟁력을 가질 발명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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