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이 981년 즉위한 후 경관(京官)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봉사(封事:밀봉하여 임금에게 고하는 일)를 올려 시정(施政)의 잘잘못을 논하라고 명하자 당시 종이품 벼슬인 정광(正匡) 행선관어사(行選官御事)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 으로 있던 최승로(崔承老)는 당장 바로 잡아야 할 시무(時務)를 28개로 정리해 올렸는데 이것이 최치원의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와 함께 한국사에서 시무봉사(時務封事)의 효시(嚆矢)가 된 시무(時務) 28조였다. 불교의 폐단(弊端)을 척결(剔抉)해 불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유교적 통치 이념에 기반한 정치체제 구축을 주장한 것이라는 오늘날까지의 평가는 그러나 사라진 6개의 조문이 상징하듯 명확한 것이 아니다. 성종이 깊이 공감해 매료된 최승로의 시무(時務)들은 유교적 통치 이념에 기반한 정치체제 구축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일본 차(茶)를 수입해 가공후 중국에 수출하면서 생기는 막대한 이익을 불교 사원(寺院) 세력들이 계속 전횡(專橫)하도록 방임할 것이 아니라 국가(왕실)의 재정수입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대책(對策)들이었다. 중국과의 사사로운 무역을 금지시켜야 하고 중들이 다투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시무(時務) 조항(條項)들은 최승로의 시무책(時務策)이 일본 차무역(茶貿易)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을 불교 사원 세력이 아닌 국가(왕실)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일본 차(茶) 가공무역(茶加工貿易) 산업의 국유화를 겨냥하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983년 12목(牧)이 설치되어 고려에선 처음으로 조정(朝廷)에서 선발임명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통일신라때에도 9주 5소경으로 지방행정조직을 완비해 고도의 중앙집권을 자랑하던 삼한(三韓)이었는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개경, 동경(경주)만을 행정 조직으로 설치했을 뿐 지방 행정 조직은 아예 설치하지 않았다. 어느 왕조나 나라를 건국하게 되면 제일 먼저 착수하는 것이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해 중앙집권을 통한 왕권의 강화인데 태조 왕건은 이를 실행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부교 사건의 진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결론만을 먼저 말한다면 해상무역입국(海上貿易立國)만이 삼한(三韓)이 살 길이라 판단했던 고려 태조 왕건은 통일신라 후기 일본 차(茶) 가공무역산업을 놓고 해상무역(海上貿易) 금지와 장려가 혼란스럽게 교차하던 시기에 선종(禪宗)이란 이름으로 개명해 중국에서 들어와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삼한(三韓)에 정착한 천태종단(天台宗團)을 보호했다. 거란을 움직여 발해를 멸망시킬 정도로 해상무역(海上貿易) 제거에 극악한 실크로드파의 탄압을 피하면서 일본 차(茶)를 해상 무역(海上貿易)하는 상단(商團)을 보호하는 데에는 방임말고 더 좋은 대안을 태조 왕건은 알지 못했다.
고려 조정(朝廷)에서 관리하지 않는 일본 차(茶) 해상무역(海上貿易)은 양과 질면에서 중구난방(衆口難防)이었고 그래서 실크로드파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는 언제나 밝음이 있으면 동시에 어두음이 있는 법. 삼한(三韓)의 해상무역을 살아남게 한 중구난방(衆口難防)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별로 호족들과 사원 세력이 연합해 일본 차(茶)를 무역하면서 축적한 거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방 권력을 구축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최승로(崔承老)가 조정(朝廷)에서 대외무역을 위해 공적으로 운영하는 객관(客館)과 역사(驛舍)에서 중들이 숙박(宿泊)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지시키고 중이 마음대로 궁궐에 출입하며 총애받지 못하도록 하라고 시무책에서 거론할 지경까지 되어버린 거였다. 983년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본산(本山)들이 있는 지역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일본 차(茶) 가공무역산업은 고려 조정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관장되게 되었고 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결국 993년, 실크로드 상단이 조직폭력배로 제휴(提携)하고 있던 거란(契丹)의 80만 대군이 고려 북쪽 국경에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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