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취락과 추장

by 檀童稗說 2023. 12. 21.

취락(聚落)은 사람들의 생활 근거지인 가옥(家屋)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마을이다. 취락은 그 규모가 커지면 도시(都市)가 되고 규모가 작으면 촌락(村落)이 되지만 촌락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일 때가 많다. 우리말로 마을 또는 벌이라 하며 향리(鄕里)등과도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원(語源)을 보면 취락은 회(會)의 의미를 안고 있다. 이것은 ‘한 곳에 모인다.’는 뜻이므로 군집의 의미와 같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酋長. 族長 / Chief, Chieftain, Jarl, Patriarch 부족(部族)이나 씨족(氏族) 등의 생활 공동체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를 지칭하는 단어. 쉽게 말하자면 구성원들이 혈연(血緣)관계로 묶인 작은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보통 씨족단계를 벗어나 두 가문(家門) 이상을 통솔하게 되면 군장(君長), 그 이상의 연합체 단계가 되면 왕(王)이라고 부른다…족장과 군장은 구분 없이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추장(酋長)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경우 좀 더 부족제(部族制)에 가까운 원시사회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 나무위키

촌락의 모습


소금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생활(生活)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한 생존(生存)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생활(生活)을 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수렵(狩獵)과 채취(採取) 또한 생활 방편(方便)이 안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정처(定處)없이 떠돌아 다녀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생활이 아닌 생존 수단밖에 안된다는 것이 정처(定處)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스스로 확인하고 있었다. 어차피 소금을 취하기 위해 수렵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찻잎(茶葉)을 위해 차(茶)나무를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을 정당화하던 사람들도 농경(農耕)이라는 재배(栽培) 활동을 통해 생존이 아닌 생활을 할 수 있는 터전을 가꿔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 둘 정착(定着)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차(茶)나무가 있는 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소금을 만들어 사고 파는 유통망(流通網)을 구축한 것이었다. 소금장수는 역사상 최초의 소매(小賣) 장사꾼이었다.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을 보내 신시(神市)라는 도시(都市)를 만들어 문명(文明)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줄 결정(決定)을 하게 만든 씨앗이 뿌려진 거였다. 우리가 촌락(村落)과 부락(部落), 취락(聚落)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마을들에 대한 표현은 그러나 엄연한 학문적 정의를 가진, 분명한 구분이 있는 용어들이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듯 사람은 물을 마시지 못하면 더더욱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소금과는 달리 물은 각종 균(菌)에 쉽게 오염되어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을 병들게 했고 곧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을 쓰러지게 했다. 차(茶)나무에서 딴 찻잎(茶葉)이 없으면 사람들은 함께 모여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터잡고 사는 마을에 새로 들어와 정착해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 소유의 차(茶)나무가 있는지 확인했다. 차(茶)나무에서 찻잎(茶葉)을 딸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아무 때나 잎을 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수인성 전염병을 예방해 줄 만큼 약효가 있는 찻잎을 따는 시기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새로 들어와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소유의 차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아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한 후 그들이 소지(所持)하고 있던 찻잎 상태를 확인하면 새로운 이웃으로 받아 들일지 여부(與否)는 쉽게 결정될 일이었다.

촌락이 인접한 지역에 하나 더 자리잡은 모습


우리 민족이 한식(寒食)을 설날, 수릿날(端午), 한가위(秋夕)과 함께 4대 명절(名節)로 중요시했던 이유는 그날이 동지(冬至)로부터 105번째로 날이 밝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부터는 매일 산에 올라가 자신의 차(茶)나무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시작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천문학(天文學) 수준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역법(曆法)으로 계산된 날짜였기에 직접 눈으로 매일 확인해야 가장 좋은 상태의 찻잎을 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찻잎의 약효가 최고인 시기였다. 한식(寒食) 다음날부터 단오(端午) 전까지 우전(雨前)과 세작(細雀), 중작(中雀)과 대작(大雀)이란 이름으로 네 번씩이나 약효 좋은 찻잎을 딸 수 있는 시기였다. 여름과 가을에도 두물과 세물, 네물이라는 이름으로 찻잎을 땄지만 약효는 단오 전에 딴 찻잎과 비교하면 형편없었다. 일년 동안 본인은 물론 가족의 건강이, 생사가 달린 일이었다. 그런 차(茶)나무를 유산(遺産)으로 남겨준 조상의 묘(墓)는 그래서 애틋했고 이 차(茶)나무가 누구의 것인지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가족 소유 차(茶)나무 주변에 있어야 했다. 우리 민족이 조상의 묘지를 깊은 산속에 모시고 성묘(省墓)를 중시하며 조상을 숭배하는 문화를 가진 중요한 배경이었다. 우리 민족이 고유 풍속이라 부르는 전래(傳來) 문화중에 허례허식이 많다고 생각하는 건 설날과 한가위에 모시는 제사(祭祀)만큼은 지독하게 유독 차례(茶禮)라고 지금까지 고집(固執)하는 배경(背景)을 모르기 때문이다. 민족의 고유(固有) 산업이었던 차산업(茶産業)을 빼앗기고 스스로 파묻은 한(恨) 때문이다.

사둔까지 함께해 형성한 몇개 촌락이 잇달은 부락의 모습


차(茶)나무를 한 그루 발견하게 되면 그 주변 지역에서는 서너개의 촌락과 함께 하는 취락이 형성될 정도로 여러 그루의 차나무들이 발견되었다. 폭풍우와 번개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집단 군락(群落)을 이루며 차나무들이 생장(生長)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곳은 깊은 산골이기가 십상이었고 좋지 않은 기상(氣象)에 자주 치는 벼락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거주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수령(樹齡)이 오래된 완전히 다 자란 차(茶)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면 한 씨족(氏族) 정도는 안심하고 일년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찻잎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차(茶)나무가 아닌 평범한 차(茶)나무라도 한 가족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찻잎을 제공해 줄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차나무를 발견하면 발견자는 그 차나무를 발견한 것이 누구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요란스런 의식을 치뤘다. 어차피 그 깊은 산을 들어 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지금 발견한 차나무가 혹여 다른 누구의 것인지 확인한 후 자신의 것이라고 공증받는 요식행위였다. 후일 차(茶)나무가 기후변화로 사라진 그 땅에 차나무의 변종으로 산삼이 자라나고 그 산삼에 대해 심마니들은 심봤다는 고함으로 동일한 목적의 의식을 치뤘다.

14세기부터 유럽의 진짜 주인인 푸거가(House of Fugger) 문장. 출처: 위키미디어


나중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차(茶)나무 소유권에 대한 다툼이 많아지자 나온 대책(對策)은 표지(標識)를 세우는 것이었다. 처음 표지로 세운 나무는 쉽게 뽑혔고 그래서 대체(代替)한 비석(碑石)은 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결국 각양 각색의 돌탑이 쌓아졌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돌탑을 사랑하는 연유였고 그 많은 산들에 그렇게 다양한 돌탑들이 수없이 세워진 연유였다. 기후변화로 차(茶)나무가 사라진 뒤 돌탑을 쌓는 우리 민족의 손길은 더더욱 애절했고 애절한 만큼 돌탑은 더 많이 세워졌다. 일부 가문(家門)에서 집안을 상징하는 고유 문장(紋章)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연유였고 대부분의 문장(紋章)이 차(茶) 꽃잎과 찻잎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연유였다. 푸거가(House of Fugger)와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의 문장(紋章)은 두 가문 모두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찻잎 모양이었다. 우리 민족이 일본과 유럽에서 성행한,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을 그들만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는 이유는 각양 각색의 돌들로 돌탑을 그리도 자유자재로 쌓을 수 있는, 돌을 보는 남다른 안목과 그들을 쌓아 올리는 비범한 손재주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서울 골목길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었던 비석 치기 놀이는 어떤 돌이 쉽게 깨지지 않는지 어떻게 세워야 잘 쓰러지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어려서부터 놀이를 통해 알게 하려는 선조들의 용의주도함이 아로새겨진 문화유산이었다. 잘 깨지지 않는 돌로 쓰러지지 않게 세운 돌탑으로 표시된 가문의 차나무는 미필적(未畢的) 고의(故意)와 착오(錯誤)를 가장(假裝)한 절도(竊盜)로부터 가문의 번영을 그리고 안녕(安寧)을 지켜 주었다. 비석 차(且)자가 네모진 돌들이 층층히 쌓인 모습을 하고 있는 연유다.

비석처럼 쌓아올린 돌탑


촌락과 취락, 부락은 도시와는 달리 모두 락(落)이란 글자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락(落)자는 삼수변과 풀 초자 그리고 몽둥이로 칠 복자와 입 구(口)자로 이루어진 글자인데 차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하는 작업을 상형(象形)한 글자였다. 풀 초자는 키 큰 차나무 가지에 달린 찻잎들을 가리키고 칠 복자는 그런 찻잎을 얻기 위해 자귀나 과(戈)들을 이용해 높이 있는 가지들을 치고 훓는 것을 그리고 입 구자는 그렇게 치고 훓어서 떨어지는 찻잎들을 담는 바구니를 나타내고 있었다. 즉 촌락, 부락, 취락이라고 락(落)자가 들어간 마을들은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차나무에서 찻잎을 따고 찻잎을 가공하는 곳이기에 그리 불린 것이었다. 찻잎과 찻잎으로 만든 차(茶)에 가장 좋지 않은 건 고온(高溫)과 다습(多濕)이었다. 차(茶)나무 가지에서 막 따낸 찻잎은 그로 인해 온도가 올라가는데 이러한 고온은 찻잎에 남아 있는 산화효소(酸化酵素)를 산화시켜 찻잎의 약효를 좌우하는 카테킨(Cathechin)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딴 찻잎을 차가운 물로 빨리 식혀주는 것이 중요했다. 마을들이 하천 유역에 터잡은 연유였다. 평지(平地)에 위치한 한정(限定)된 지역을 모두 유역(流域)으로 만들기 위해선 물길을 인위적으로 원형(圓形)으로 만들어 주어야 했으나 마을이 주로 차(茶)나무들과 가까운 산속에 들어앉은 우리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물을 꼬불꼬불하게 S자형으로 흐르도록 만들어 유역(流域) 면적을 극대화시켰다. 촌락(村落)이 무조건 차(茶)나무의 생장 지역을 중심으로 산에 가까운 지역들에 퍼져 있었다면 취락(聚落)은 차나무가 있는 산을 벗어나 몇 개의 촌락들을 비숫한 거리(距離) 안에 두는 상대적인 평지(平地)에 위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취락(聚落)에는 가파른 산지에 있는 촌락에서는 건설하기 어려운 찻잎의 가공및 저장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공과 저장에 있어 필수인 온도(溫度)와 습도(濕度)를 제어(制御)할 수 있는 과학자와 기술자 집단이 취락(聚落)에 존재했다는 걸 의미했고 그것들을 건설할 수 있는 많은 숫자의 기능공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성백제박물관의 돌방무덤 모형. 고대 찻잎가공및 저장시설이다. 목조건물이 생긴후 해체 또는 무덤으로 쓰였다.


소금 제조법에 나온 용해(溶解)와 침출(浸出:leaching)을 증류(蒸溜) 직전 단계까지 통제할 줄 알았던 전문가를 일컫는 용어가 추장(酋長)이었다. 그는 가는 잇금을 사용해 쳇불 구멍을 작게 줄인 체(簛)를 만들 줄 알았고 막 따온 찻잎을 물로 식히고 다시 뜨거운 물로 찻잎을 침출시켜 일정 수준 이상의 약효를 유지하는 찻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 소유의 차(茶)나무에서 따온 찻잎을 각자의 집에서 침출시켜 음용(飮用)했던 사람들이 이제 채집(採集)한 찻잎들을 모두 추장(酋長)에게 모아주었다. 추장은 이렇게 모인 찻잎을 촌락(村落)에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쳇불 구멍이 가장 작은 체(簁)를 사용해 용해와 침출로 찻물을 만들어 150명 정도의 사람들을 일년내내 차(茶)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영도하는 사람이었다. 쳇불(그물) 구멍이 큰 순서로 어레미, 도드미, 중거리, 가루체, 고운체로 구분되는 체(籭)는 건조시키는 중에 바스라져 작아진 조그만 찻잎까지도 침출시킬 수 있도록 계속 쳇불 구멍을 줄인 개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어래미는 가로 3㎜, 세로 3.8㎜ 크기의 가장 큰 장방형 구멍(쳇불)을 가졌고 도드미는 쳇불 구멍의 크기가 가로 1.8㎜, 세로 2㎜, 중거리는 가로 1㎜, 세로 1㎜, 가루체는 가로 0.6㎜, 세로 0.6㎜, 고운체는 세로가 0.5㎜, 가로는 이보다 더 좁은 쳇불을 가진 체였다고 한다.

취락의 전형을 보여주는 전남 화순. 하천과 산들의 가운데에 있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찻잎 가공및 저장시설이 해체된 후 남겨진 흔적인 고인돌들이 존재하는 연유다.


차(茶)나무가 줄어드는 만큼 찻잎을 걸러준 체(篩)들에 술이 걸러졌다. 추장의 추(酋)자에서 떨어지는 찻잎을 뜻하는 八 자가 없어진 酉자가 술을 뜻하게 된 연유였다. 영국 옥스퍼드대 진화생물학 로빈 던바(Robin Dunbar) 교수는 한사람이 제대로 사귈 수 있는 친구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고 밝혔다. 발칙한 진화론이라는 번역본 제목을 가진 그의 책에서 그는 그것이 요즘 같은 디지털세대여도 진짜 친구 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부족사회(部族社會)도 평균 구성원이 153명으로 조사되었다고 했다. 2011년에 나온 책이다. 지난 2019년 3월 23일 서아프리카 말리(Mali)에서 발생한 토착(土着) 유목민 부족 폴라니족에 대한 집단 학살로 밝혀진 규모도 130명이 약간 넘는 규모였다.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그 이외에는 증빙할 자료가 없어 어쩔수 없이 인용했음을 양해바란다.) 그 정도 인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이끄는 사람을 추장(酋長)이라고 불렀다. 찻잎을 모아서 죽여 끝낸다는 뜻의 추(酋)자 밑에 규격과 법도를 뜻하는 촌(寸)자가 붙어 따르다, 우러르다의 존(尊)자가 만들어 진 것은 당연했다. 존(尊)자의 동자(同字)인 아래 사진의 존자를 보면 찻잎을 여러개의 체(簛)들로 순차적으로 걸러내는 모습(井)이 잘 상형되어 있다.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속절없는 기후변화와 빼앗긴 차산업으로 촌락과 취락이 무언지조차 잊어버리기까지 한 우리 민족의 공동체 역사는 그러나 우리의 몸 속 유전자안에는 우리의 고유 문화에는 선명히 남아있다. 촌락이 취락과 함께 발전해 간 역사는 찻잎을 가공하고 저장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기후변화로 차나무가 사라지고 차 가공산업마저 빼앗긴 그 아픔들이 지금 돌탑으로 남아있다. 그 자체가 차나무를 상징했던 돌탑을 우리 민족은 아직도 몸으로 기억한다. 돌탑은 우리 민족이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정신으로 온 누리를 이끌었던 그때의 총화다. 그래서 그 역사를 잊어버린 우리 민족이 아직도 돌탑을 쌓고 그 돌탑에 기도하고 있는 연유다. 산에만 쌓아 올렸던 돌탑을 지금은 돌이 있는 모든 곳에 심지어 바닷가에도 쌓아 올리는 연유다. 까닭도 모르면서. 그러나 조상이 우리에게 유전자로 남긴 몸과 마음은 기억하고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에 의해 어디선가에서는 어떤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염원을 담아 쌓아 올려지고 기원되고 있을 돌탑들이다. 그게 우리 나라 사람들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