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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Khur)와 수메르(Sumer)- 거석문화의 진실 4

by 檀童稗說 2024. 9. 17.

밀란코비치(Milutin Milanković 1879-1958)는 앞서 크롤이 했던 것처럼, 행성 표면의 일조량 분포가 세 가지 궤도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궤도의 이심률, 자전축의 기울기, 그리고 세차운동 주기상의 춘추분점의 위치이다. … 일조량 곡선은 고위도에서는 41,000년의 자전축 주기에 의해 지배되고, 저위도에서는 22,000년의 세차운동 주기에 의해 지배된다. - 존 임브리, 캐서린 팔머 임브리의 빙하기 중
우리의 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기후변화가 일어나면 사회 저변에 불만이 일어나거나 가중될 수 있다. 만약 이런 불만이 해소되지 못하면, 결국에는 사회 문제가 되고 이주나 반란, 어쩌면 사회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만약 계속 흉년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게 되면, 통치 제도를 바꾸자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자는 생각에 동조하기가 더욱 쉬울 것이다. - 랜디 체르베니의 날씨와 역사 중

The House of vein tubelar vessel(찻잎을 공급하는 혈관의 본부)라는 뜻을 가진 Alkhanai와 루왜은조리 사이 한 중간에 건설된 아스타나(Astana)


인류 역사의 모든 굴곡은 기후 변화 때문에 일어난 오미의 변(五味之變)으로 달성(達城)을 배달(背達)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류 역사의 모든 격변은 배달(背達)을 이끌었던 황궁씨(黃穹氏)가 본성을 되찾아 반드시 달성으로 돌아오겠다는 복본(復本)의 맹세를 버리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기후 한냉화로 생명의 나무인 차나무가 죽어 찻물이 우러나오는 우물들이 말라 버려 생긴 일이었기에 배달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차나무가 자라는 곳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방으로 흩어져 찾아 나선 생명의 나무, 차나무는 동북쪽 끝과 서북쪽 끝에서만 발견되었다. 동북쪽 끝은 황궁씨(黃穹氏)가 서쪽 끝은 백소씨(白巢氏)가 발견한 것이었다. 루왜은조리산에서 북쪽으로 그은 선이 경계선이 되었다. 그 경계선의 서쪽은 백소씨가 찻잎을 공급하도록 했다. 나머지 동쪽 전 지역은 황궁씨가 찻잎을 공급하기로 분담되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에게해 연안 지역이 그리스 로마 문화권이 되는 연원이었다. 후일 유럽이라 불린 지역에 찻잎을 공급하게 된 아일랜드(Ireland)의 갈웨이(Galway)는 산스크리트어로 흘려주는(pour out, flow) 길(path)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었다.



차(茶)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알카나이(Alkhanai)에 신시(神市)를 건설해 배달국(倍達國)을 건국한 환웅(桓雄)은 복본의 맹세를 지키겠다는 환인(桓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시(神市)와 루왜은조리를 연결하는 도시를 건설했다. 알카나이(Alkhanai)와 루왜은조리 사이 정확히 한 중앙에 세워진 그 도시는 아스타나(Astana)라고 이름 지어졌다. 계승(tana:succession)의 성지(Ash:shrine)라는 뜻과 루왜은조리로 가는(ash:go, move) 통로(tana:trunk stem)라는 중의적(重義的) 뜻을 가진 도시였다. 환웅은 아스타나 건설이 끝나자 루왜은조리로의 복본을 위한 전진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찻잎을 안정적으로 보급해 복본에 대비한 전진기지로 육성, 관리하기 위해 두 지역에 찻잎을 보급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 선정되었고 그 지역에 유프라테스강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끌어오는 수로 건설이 이루어졌다. 물병(Ba:water jar)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lih: licking) 듯하는 U자형 수로가 건설되어 유프라테스 강물이 안정적으로 돌아 나가 인공 삼각주가 만들어졌다. 인공 수로는 그래서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로 물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는 뜻을 가지는 발맄(Balikh)이란 이름이 붙었다. 인공 삼각주 안에는 하란(Haran)이라는 도시가 들어섰다. 하란 북쪽에 대규모 찻잎 보관 창고와 찻물 제조 공장이 연이어 건설되었다. 괴베클리(Gobekli) 테페(Tepe)였다. 동일한 작업을 했기에 스톤 헨지와 유사한 구조를 가졌던 테페(Tepe)는 이후 추가로 더 건설되었다.

찻잎 가공및 찻물 제조 공장인 테페의 기본 구조 출처: 나무위키



루왜은조리(Ruwenzori; 達城) 산으로의 복본(復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전진 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특별 원조(援助)가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으로부터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상(上) 이집트 일대가 하류 지역인 하(下) 이집트보다도 훨씬 진보의 속도가 빨리 나타나 하(下) 이집트에서 기원전 6000년경에야 신석기가 시작된 것에 반해 상(上) 이집트 유역에서는 이미 기원전 7500년대에 신석기가 등장했다고 밝혀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복본을 위해 루왜은조리 산과 가까운 지역에 기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알카나이(Alkhanai: 神市)에 터 잡은 황궁씨족의 후손들인 배달족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복본을 위한 나일강 지역 전초(前哨) 기지(基地)의 유지를 담보하기 위한 후방 지원 및 대체기지로 메소포타미아가 선정되었다. 복본을 위한 전진 기지로서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의의를 가지는 두 지역의 관리를 위해 동쪽 끝 배달국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 대대적인 식민(植民)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그 지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쿠르드(Khurd)족이라고 부르는 연유는 고대(古代)에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남부에 살았던 수메르인들이 쿠르(khur)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기원후 10세기경부터 그곳에 살기 시작한 튀르키예 사람들이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라고 부르는 유적을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쿠르드인들은 Gire Mirazan이라고 부르는데 산스크리트어로 Gire는 voice, speech 란 뜻이고 Mira는 산(mountain)의 한 특별한 부분(a particular part)을 뜻한다. Zan은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는 아니지만 파키스탄어인 우르드(Urdu)어로 여인(lady)을 뜻한다. 기레(Gire) 미라잔(Mirazan) 이란 쿠르드어는 결국 마고가 계시는 산(山)의 소리라는 뜻이다.

괴베클리 테페에서 38km 떨어진 카라한(karahan) 테페에서도 250개나 발견된, 한 개가 10톤이 넘는 T자형 돌기둥들이 흡사 영국 솔즈베리의 스톤 헨지와 같은 원 모양으로 서있는 이 유적들은 그러나 스톤 헨지가 신전이 아니듯 신전(神殿)이 아니다. 굳이 석회암으로 된 돌기둥들을 사용한 이유는 찻잎 약효에 치명적인 습기와 고온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석회암은 낮에는 태양빛의 열을 흡수하고 밤에는 그 열을 서서히 방출해 건물의 실내 온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고 또한 수분 흡수율이 좋아 실내를 건조한 상태로 만들어 주는 건축 자재였다. 각자가 알아서 적당한 크기와 깊이로 땅을 파 저장해도 충분히 다음 해까지 먹을 수 있는 곡식들이었다. 그런 곡식들을 저장하자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돌기둥 하나당 10톤이 넘는 암석을 그것도 조형(造形)하기 용이한 석회암으로만 캐서 운반해 와 다듬어 세우는 그런  위험하고 과중한 노동을 할 이유는 없었다. 배달(倍達)의 민족은 굳이 신전을 거창하게 지어놓고 과시하듯 보여주며 신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한수(井寒水) 한 그릇 떠놓고 두 손 비벼 기원하는 오로지 뜻으로 정화된 마음을 중요시하는 신앙의 민족이다. 그런 건물들을 그렇게 지은 건 오직 세상에서 두 곳밖에 나지 않는 찻잎의 보관과 가공 때문이었다. 고온과 다습을 제일 싫어하는 찻잎들 때문이었다. 고온과 다습은 찻잎을 빨리 산화(酸化)시켰고 산화된 찻잎은 약효를 잃어버린 그저 나뭇잎이고 풀이었기 때문이었다. 범어(梵語)로 정화된 것(to be purified)을 뜻하는 테페(Tepe)들이 위치한 지역은 우르(Ur)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던 아브라함이 중간에 머물렀던 하란(Haran)의 북쪽이었다.


테페(Tepe: 淨化된 곳)들이 있던 하란 북쪽 지역(하티)이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통제했다면 티그리스강 유역은 지금의 카부르(Khabur) 지역(후리)이 통제했다. 카부르(Khabur)는 산스크리트어로 관(管 kha:hollow stalk)의 땅(bhur: earth)이라는 뜻이었다. 찻물이 공급되는 땅이라는 의미였다. 찻잎등 제반 물자들의 보급을 위해 알카나이(Alkhanai:신시)와 아스타나(Astana)그리고 하티(Hatti)와 후리(Hurri) 사이에 12개 지역이 역참(驛站)으로 선정되어 개발되었다. 12 환국(桓國)이 바로 그 역참(驛站)들이었다. 환국이라 불린 이유는 푯말(桓)이 세워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참들이 연결된 길 곳곳에 찻잎을 수송하는 카라반(caravan)들이 멀리서도 잘 볼 수 있도록 높고 큰 바위들이 안내용 푯말(桓)로 세워졌다. 후일 탑(pagoda)으로 미나렛(minaret)등으로 대체되는 선돌(menhir)이었다. 알카나이와 아스타나 그리고 카부르와 하란의 테페를 오가며 물자를 수송해 주는 사람들을 찻잎을 갖다 주는 사람들이라 해서 카라반(caravan)이라고 불렀다. 후일 대상(隊商)이라고 번역된 카라반은 찻잎을 공짜로 갖다 주다는 뜻의 범어였다. 산스크리트어로 카(car)는 보내주다(send, move)는 뜻이고 라반(ravan)은 갚지 않아도 되는 지원(granting)을 뜻했다.

고구려 일식 관측장소와 일치하는 알카나이



루왜은조리로 가는(ash:go, move) 통로(tana:trunk stem)라는 뜻의 아스타나(Astana)와 배달국 신시(神市)에서 떠난 카라반들이 도착해 관(管:tube)으로 찻물을 공급하는 땅이란 뜻의 카부르(Khabur), 그리고 마고 삼신 할머니가 계시는 산(山)의 소리를 듣는 괴베클리 테페 즉 기레 미라잔이 연결되자 그 원천이 되는 배달국 도읍지 신시(神市)는 알카나이(Alkhanai)라고 불렸다. 산스크리트어로 알(Al)은 원천 혹은 본산이라는 의미의 the House라는 뜻이었고 카(kha)는 혈관(vein), 나이(nai)는 나우리(nauli)로 관(管) 모양의 운반용기(vessel)를 뜻했다. 결국 찻잎을 우린 찻물을 혈관처럼 관(tube)을 통해 세계에 공급해 주는 원천이라는 뜻이었다.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의 일식 기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역으로 꼽힌 곳에 알카나이가 있었다. 알카나이를 품고 있는 산은 Khan Khentii라고 불리는 곳인데 이집트 신화에서 수리(falcon)의 신(神)인 Khenti-kheti는 가장 먼저 철수한 사람(foremost retreater) 즉 제일 앞에서 배달(背達)한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하티(Hatti)와 후리(Hurri)까지 보내져야 하는 찻잎들이기에 그 찻잎을 생산해 가공하는 곳에서는 작업을 일찍 마쳐야만 했다. 절기(節氣)로 청명(淸明)은 되어야 따기 시작하는 찻잎의 배달국(倍達國)에서의 생산 기한은 단오(端午)였다. 단오까지는 찻잎 가공을 마치고 카라반의 말등에 가공 완료된 찻잎들을 실어 주어야 나일강까지 그 약효가 온전할 수 있었다. 그 단오를 우리 민족이 수릿날이라고 불렀기에 그 찻잎을 받아 고마운 나일강 사람들은 신화로 남겨 배달국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두고두고 기억해 주었다.


나일강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인더스 문명은 교과서에 서술된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룩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는 나일강이나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그리고 인더스강보다 훨씬 더 많은 유량(流量)에 훨씬 더 정기적인 범람(氾濫)을 많이 해 훨씬 더 기름진 땅들을 유역(流域)으로 가진 강(river)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교과서에서 열거되는 이유들로 이룩되는 문명이었다면 역사는 강마다 생겨난 문명들을 기록하느라 다른 일들은 기록조차 못했을 것이다. 나일강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그리고 인더스 강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조건 때문에 문명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그 강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구비하고도 문명은커녕 문화조차 일으키지 못한 전 세계 강들의 유역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중상(中傷)이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걸로 따지자면 전 세계 강들의 반 이상은 늘 정기적으로 범람한다. 사실 범람하지 않는 강이 어떻게 강이란 말인가. 개울마저도 넘치는 게 일인데 말이다. 나일강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이 문명의 발상지로 역사에 기록된 건 배달의 민족이 복본(復本) 해야 할 루왜은조리산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었기에 엄청난 인적 물적 지원을 그것도 공짜로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인더스강 유역 또한 후일 변화한 환경 속에서도 복본(覆本)의 기초 조건들을 유지하려는 배달족의 각고의 지원 덕에 이룩되었던 문명이었다.

출처:위키미디어
출처:위키미디어


아카드(Akkad) 사람들이 수메르(Sumer)라 부른 사람들이 쿠르(Khur)라고 부른 사람들은 루왜은조리 산과 가깝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일강 유역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지원을 공짜로 해주었다. 그런 지원을 해주던 본부가 있었던 지역은 배달족(倍達族)들이 식민(植民)되어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을 하티(Hatti)와 후리(Hurri)로 역사는 기록했다. 자신들을 검은 머리(상긱: saĝ-gíg)라고 스스로 호칭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살았던 수메르인들은 그들을 쿠루(Khur)라고 불렀는데 어느 순간부터 K가 빠지고 후르(hurr)가 된 사람들이 후일 건국한 나라의 이름은 미탄니(Mittanni)였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보내어진 도움을 아래로 내려준다는 뜻이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미(Mi)는 보내어진(throw, cast, scatter)이란 뜻이고 탄(tan)은 원조(aid), 니(ni)는 내려주다(set down)는 뜻이었다. 후리안(hurrian)으로 불리던 사람들은 배달국이 망하고 새로 건국된 고조선이 더 이상 메소포타미아를 관리하지 않자 대다수가 아사달로 돌아가서 자신들을 우리라고 불렀다. 우리 민족이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게 된 시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루왜은조리산을 배달(背達) 해야 했던 황궁씨는 달성(達城)을 떠날 때 본성(本性)을 회복한 후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마고 삼신 할머니에게 맹세했었다. 그 황궁씨가 천년동안 애를 써 노력했음에도 복본(復本)에 실패한 후 어쩔 수 없어 유인씨(有因氏)에게 천부인을 인계할 때 약속받은 것이 복본(覆本)하겠다는 맹세였다. 그 유인씨가 환인(桓因)에게 천부인을 인계할 때도 그 환인이 환웅(桓雄)에게 제세(濟世)를 다시 넘길 때도 언제나 확인하고 약속받은 건 반드시 루왜은조리로 돌아가겠다는 복본(覆本)이었다. 그렇게 맹세해 온 세월이 수천 년이었다.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쿠르(Khur)라고, 아카드(Akkad)라고, 배달(倍達)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그 세월 동안 이 세상에 쏟아부은 정성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제일 무서워 한 건 사람들이 복본(覆本)을 잊어버리는 거였다. 본성(本性)을 회복하겠다는 맹세를 잊어버리는 거였다. 사람들이 루왜은조리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는 건 본성(本性)을 되찾겠다는 복본의 맹세를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되는 건 지금 사는 게 너무 편하고 좋아서 일거라고 생각했다. 테페가 몇 번씩 인위적으로 파묻힌 흔적이 생긴 연유였다.

고구려가 신시 배달국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천문 자료다


배달족(背達族, 倍達族)은 그래서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들이 산속에 있는 알카나이(Alkhanai)나 아사달 같은 곳에 터를 잡는 건 차(茶) 나무들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돌아가야 할 때 언제든 신속히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아까워, 버리지 못해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되어 번듯한 집조차도 짓지 않고 살았다. 그러니 농사는 더욱 짓지 않았다. 농사는 그저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관련되어 지어야 할 게 너무도 많은 장치산업이었다. 그래서 떠돌아다니는 목축과 유목을 고집했다. 어디에 있든 언제가 됐든 아무런 미련도 부담도 없이 훌훌 털고 떠나 돌아간다는 복본(覆本)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그래서 그들은 말 타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등자(鐙子)가 없던 시절 말(馬) 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말(馬)을 오래 탄 남자들은 고환(睾丸)을 다쳐 자손을 보지 못하는 고자(鼓子)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말(馬)을 탈 줄 모르면 복본 할 수 없기에 승마 연습에 열심이었다. 그들이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했던 건 사람들이 현재 사는 것이 너무나 안락해 복본의 맹세를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거였다. 배달족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노예(奴隸)를 만들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상태로 나라를 건사했던 연유였다. 거의 4백 년 주기로 따뜻해졌다 추워지기를 반복하는 지구가 그래서 그들에겐 끝없는 시지프스의 바위였다. 추워지면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마고 삼신 할머니가 있는 루왜은조리, 달의 산이었다.

The first revolution that transformed human economy gave man control over his own food supply. Man began to plant, cultivate, and improve by selection edible grasses, roots, and trees. And he succeeded in taming and firmly attaching to his person certain species of animal in return for the fodder he was able to offer, the protection he could offer, and the forethought he could exercise. The two steps are closely related. Many authorities now hold that cultivation is everywhere older than stock-breeding. Others, notably the German historical school, believe that, while some human groups were beginning to cultivate plants, other groups were domesticating animals. Very few still contend that a stage of pastoralism universally preceded cultivation. 인류 경제를 변모시킨 첫 혁명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식량 공급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심고 재배(栽培)하기 시작했고 먹을 수 있는 풀과 뿌리와 나무들 중 좋은 것을 선택하는 개선(改善)을 시작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그들이 줄 수 있는 사료(飼料)와 제공할 수 있는 보호와 방목장(放牧場)을 미끼로 어떤 동물들을 길들여 확실히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고 붙어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두 가지 다른 갈래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많은 학술기관들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농경이 목축(牧畜) 보다 앞선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독일 역사학파는 어떤 사람들이 농사를 시작할 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농사가 아닌 동물들을 가축화하는 목축을 시작했다고 믿었다. 유목(遊牧)이 농경(農耕) 보다 앞서 전 세계적으로 먼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Veve Gordon Childe의 Man makes himself 중

기원전 4200년 경부터 다시 시작된 4백 년 주기의 한랭화(寒冷化:Frost Weathering)는 그러나 여태까지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후리안(Hurrian)이라 알려진 쿠르(khur)인들이 에아(Ea)라고 불렀던 엔키(Enki)들의 후손들이 맡아 경영했던 아이어(Ire) 땅의 차(茶) 나무들이 모두 죽어버린 거였다. 아이어 땅(Ireland)에서 생산된 찻잎들을 유럽 대륙으로 실어 나르던 배들로 가득해 템즈(Thames)로 불리던 강에 찻잎들을 실어 나르던 배들이 사라졌다. 차(茶:cha, kha)를 다(tha)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찻잎을 가공하던 스톤 헨지들에서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기원전 4000년 이후 아이어(Ire)와 웨일스(wales)에서 활동하던 찻잎 기술자들이 모두 철수해 배달국과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오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초원로를 통해 엄청난 숫자의 백소씨(白巢氏) 후예들인 지소씨(支巢氏)들이 에아(Ea;에이레) 땅을 떠나 차나무가 있는 알카나이로 몰려들고 있었다. 목축을 기반으로 한 유목과 채집만으로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아이어(Ire)와 웨일스에서 난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을 일단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으로 수용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결국 배달족(背達族)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농경(農耕:agriculture)이 시작되었다. 채집(gathering)과 어로(fishing)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인구 규모가 아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은 똑똑하기로 소문난 오미의 변을 일으킨 지소씨(支巢氏), 엔키(En-ki)들의 후예였다. 스스로를 상긱(saĝ-gíg:검은 머리)이라 부른 그들이 아이어(Ire)와 웨일스에서 철수할 때 가져온 게 영국의 콘월(cornwall)에서만 나는 주석(朱錫:tin)이었고 이것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산악지역에서 발견되던 구리와 합해져 청동기를 만들어내는 시작이 되었다. 청동기가 개발된 이유는 찻잎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알카나이(神市)에서 지원해 주는 그동안의 찻잎 물량으로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량에 턱없이 모자라자 그 대책으로 나온 게 기존 찻잎의 유효기간을 늘리는 방안이었다. 10일이 지나면 약효가 사라지는 찻잎의 유효기간을 20일로 늘릴 수 있다면 그건 생산량을 두 배 증대시킨 것과 거의 같은 효과였다. 특수한 흙인 점토(粘土)를 이용해 토기를 만들어 운영되던 빗살무늬토기 기반 경제에 청동기가 나타나자 모든 인간 생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활동의 중심이 대륙 초원로로만 집중되었던 과거와 달리 찻잎이 수송되는 경로가 바다로도 확장된 것이었다. 아스타나에서 정남 방향에 위치한 인더스 강이 찻잎 수송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개발되기 시작했다. 카라치(Karachi)가 그 시작이었다.


하란과 카부르에서 가장 멀어 가장 낙후되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이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철수한 지소씨(支巢氏)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완전히 다른 땅이 되었다. 인더스강 유역의 개발까지 동시에 추진되면서 발전은 휘황찬란한 것이 되어갔다. 아스타나에서 남쪽으로 거의 수직으로 연결되는 카라치(Karachi)에서 인더스강 수운(水運)과 아라비아해의 무역풍을 이용해 찻잎을 해상운송한 결과 하란까지의 찻잎 수송 기간은 거의 반으로 단축되었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바다를 항해해 찻잎을 수송하는 채널(channel)이 개척됨에 따라 지금까지 찻잎을 분배해 주는 중심 역할을 하던 하티와 후르리가 찻잎 분배자가 아닌 단순 수령인으로 전락했다는 거였다. 하티와 후르리는 찻잎을 분배해 주던 권력자에서 찻잎을 더 달라고 우르에 구걸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하란 북쪽에 찻잎 가공과 찻물 생산 공장들이 밀집해 번영을 누리던 테페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은 채 땅에 묻힌 연유였다. 하티와 후르리 지역이 경제적 활력을 잃어가는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메르 문명의 시작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인더스 강을 통해 찻잎들을 메소포타미아로 운반해 들여오는 것을 하티와 후리들이 더 이상 시비 걸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아스타나에서 카불로 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힌두쿠시 산맥을 적은 비용으로 횡단할 수 있도록 바퀴를 발명해 냈다.

모헨조다로. 출처: 위키미디어



배달국에서 보내오는 찻잎들이 아스타나에서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와 카불을 통해 인더스 강으로 운반되자 인더스강 유역에 크고 작은 찻잎 수송을 지원하기 위한 시설들이 구축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시작이었다. 토기도 변변히 없이 찻잎을 나르던 시절부터 구축되어 온 메소포타미아 지역과는 달리 인더스강 유역에서의 그것은 질서 정연하고 기술 집약적인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찻잎을 수송하기 위한 수송 기지로서의 효율성만 강조된 계획도시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애당초 자연적인 취락에서 시작되어 역사적인 경험과 지식의 축적으로 이룩된 문명이 아닌 이식된 문명이었다는 증거다.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인더스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 인더스 문명의 발흥으로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질서들이 무너졌다. 찻잎 공급 물량을 확대하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수천 년간 행사해 온 지도적 위치를 상실하고 피지배적 위치로 전락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의 상실감과 당혹감은 큰 것이었다. 결국 카라치와 나일강 상류로 연결되는 지부티(Djbouti) 항로가 아라비아 반도 남부 연안을 따라 개척되어 찻잎 수송선이 접안되는 항구가 지부티에 건설되자 전쟁이 일어났다.

Palette of Narmer. 기원전 3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이집트의 작은 석판. 출처:위키미디어


수천 년간 찻잎 분배자의 권력과 경제적 이득을 향유해 온 나일강 하류의 북이집트가 해양 수송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빼앗아 번영해 가는 나일강 상류의 남이집트에 대한 무력 정벌이 벌어졌다. 카라치(karachi)의 카라(kara)는 산스크리트어로 hands라는 뜻으로 어떤 일 또는 행위(acts)들을 말했다. 치(Chi)는 남용(abuse), 책망(reproach)을 뜻하는 단어였다. 인더스강 개발을 통해 새로운 찻잎 수송로를 만든 것을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남용(濫用)이라 평가했다. 과도한 것은 언제나 모자란 만 못했다. 굴러 들어온 돌들인 수메르인들에 대한 굳건히 박힌 돌들의 책망(責望)은 매서웠고 가차 없었다. 북이집트 왕국의 네르메르(Nermer)의 남이집트 사람들에 대한 책망은 이후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하던 아카드인들의 남부 수메르인들에 대한 정벌의 전초였다. 수메르인들의 동쪽으로의 피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수메르인들의 메소포타미아 엑소더스는 결국 수메르 문명과 더불어 인더스 문명의 처절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헨조다로라는 도시의 이름이 죽음의 언덕(Mound of the Dead)이 된 이유였다. 찻잎을 가공하고 찻물을 만들어내고 찻잎을 보관하던 그 정화된 곳에서 인더스 문명을 떠받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고 모헨조다로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인골들은 그 증거였다.


가장 낙후되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은 인더스 문명의 발흥과 함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 되었다. 땅의 신 엔키(En Ki)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수메르인들의 첫 번째 도시가 황당하게도 수메르 도시 족보에 오르지 못한 에리두(Eridu)인 것은 그래서였다. 수메르인들이 땅의 지배자라 부르며 주신으로 모시는 엔키(En-ki)를 북쪽에서 내려온 아카드인들은 굳이 에아(Ea)라고 불렀다. 그들이 에이레(Ire)에서 온 사람들이란 걸 끝내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처음부터 다스려 온 후리(Hurri)나 하티(Hatti)들이 당황할 정도로 그들의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휘황찬란한 문명은 너무나 매혹적인 것들이어서 복본(覆本) 해야 할 때 버리고 떠나지 못할 거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의심은 역전된 정치경제적 상황으로 촉발된 박탈감과 적개심에 불을 붙이는 훌륭한 명분이 되어 주었다. 무력으로 상황을 되잡는 당당한 근거가 되었다. 그 처음을 해양 무역으로 정치경제적 불이익을 뒤집어쓰게 된 북이집트 왕국의 나르메르(Narmer)가 기록했다.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고깔모자를 쓴 나르메르가 남이집트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몽둥이로 내려치는 위 사진 속 팔레트(palette) 부조(浮彫)는 이후 아카드인들의 수메르 정벌에서도 그대로 재현된 장면들이었다. 사르곤 대왕(Sargon the Great)의 아카드 제국(Empire og Akkad)의 출현이었다. Nation(민족국가) 이 아닌 State(다민족국가)가 형성되고 그곳에서 정치경제적 변동이 일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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