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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삼봉과 신안선의 정체 - 거북선의 진실 2 黃海道罪人李箕 李光秀等 鄭汝立同謀叛逆承服 行刑于軍器寺前 隨後絞于堂古介. 황해도의 죄인 이기, 이광수등이 정여립과 반역을 공모한 사실을 승복하여 군기시 앞에서 행형하고 뒤에 당고개(堂古介)에서 교수(絞首)하였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1589) 10월 15일 기축 安岳水軍黃彦綸 方義臣等 往來鄭汝立家 同謀叛逆事 承服伏誅. 안악(安岳)의 수군(水軍) 황언륜과 방의신 등이 정여립의 집에 왕래하며 반역을 공모한 사실을 승복하여 복주(伏誅)되었다.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7일 신묘 上御宣政殿 親問鄭玉男等.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임어하여 정옥남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9일 계사 左參贊鄭琢差謝恩使 加崇政 黃允吉 金誠一差日本通信上 副使 許筬差.. 2024. 1. 10.
거북선의 진실 1 命試倭船. 命代言柳思訥 將本國兵船 與平道全所造倭船 較其疾徐于漢江. 思訥復命曰 順流而下 則兵船不及倭船三十步或四十步 逆流則幾百步矣. 명하여 왜선(倭船)을 시험하게 하였다. 대언(승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본국의 병선(兵船)과 평도전(平道全)이 만든 왜선을 한강에서 그 빠르고 느림을 비교하여 보게 하였더니 유사눌이 복명하였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병선이 왜선보다 뒤지기를 30보(步) 혹은 40보나 하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몇 백 보나 뒤졌습니다. -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 1월 14일 갑오 上曰姑從之 世子喜形於色 上過臨津渡 觀龜船 倭船相戰之狀 임금이 잠시 동안만 따르라 하니, 세자가 안색이 기쁜 빛을 띠었다.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 2024. 1. 1.
옥새(玉璽)- 중국이 옥을 사랑한 이유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厲王使玉人相之. 玉人曰 石也. 王以和爲誑, 而刖其左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 石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 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 三日三夜, 泣盡而繼之以血. 王聞之, 使人問其故, 曰 天下之刖者多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誑, 此吾所以悲也. 王乃使玉人理其璞而得寶焉, 遂命曰 和氏之璧. - 韓非子 第13篇 和氏 초나라 사람 화씨가 비취휘석을 캐냈다. 여왕이 감정을 시켰는데 돌이었다. 보석이라며 진상한 화씨의 왼발을 잘랐다. 무왕이 새로 즉위하자 화씨는 재차 진상했다. 무왕이 감정했는데 또 돌이라는 결과였다. 오른발을 잘랐다. 문왕이 또 새로 즉위했다. 화씨는 비취휘석을.. 2023. 12. 30.
청야전술(淸野戰術) 明臨荅夫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玄菟郡太守 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執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答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小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答夫帥師數千騎 追之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賜答夫坐原及質山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명림답부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현토군 태수 경림이 대군을 발동하여 우리를 침공하려 하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2023. 12. 24.
사돈과 사둔 사돈(査頓) 남녀 두 사람의 혼인으로 발생하는 인척관계(姻戚關係) 또는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상대편의 친척을 일컫는 친족 호칭…우리나라의 부계(父系)친족제도에서도 이런 집단적인 측면이 특히 강조되어 자녀의 혼인은 곧 어느 가문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혼인이 당사자 두 사람의 결합 이상의 것으로, 한 가문과 다른 가문간의 결합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대 국어에서의 ‘사돈’은 16세기부터 나타나서 현재까지 이어진다. ‘사돈’의 어원(語源)은 정확하지 않은데, 19세기에는 한자어로 ‘사돈(査頓)’을 표기한 문헌이 있으나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1. 혼인한 두 집안의 부모들 사이.. 2023. 12. 22.
취락과 추장 취락(聚落)은 사람들의 생활 근거지인 가옥(家屋)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마을이다. 취락은 그 규모가 커지면 도시(都市)가 되고 규모가 작으면 촌락(村落)이 되지만 촌락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일 때가 많다. 우리말로 마을 또는 벌이라 하며 향리(鄕里)등과도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원(語源)을 보면 취락은 회(會)의 의미를 안고 있다. 이것은 ‘한 곳에 모인다.’는 뜻이므로 군집의 의미와 같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酋長. 族長 / Chief, Chieftain, Jarl, Patriarch 부족(部族)이나 씨족(氏族) 등의 생활 공동체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를 지칭하는 단어. 쉽게 말하자면 구성원들이 혈연(血緣)관계로 묶인 작은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보통 씨족단계를 벗어나 두 가문(家.. 2023. 12. 21.
단군신화의 진실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인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즉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2023. 12. 17.
이사금(泥篩今, 또는 泥簛今) 의 유래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남해(南解)의 태자(太子)이다.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말하기를 왕비의 성은 박(朴)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처음 남해왕(南解王)이 세상을 떠나자 유리(儒理)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脫解)가 평소 덕망이 있어서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고자 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신성한 기물은 큰 보배라서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누가 이빨이 많은지를 알아봅시다.”라고 하였다.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니, 이에 좌우 신하들과 더불어 왕으로 받들었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불렀다.. 2023. 12. 17.